견고한 자부심

이범수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공백 없이 작품 활동을 해왔다. 일에 대한 애정과 자신에 대한 확신이 남다른 배우. 20여 년 세월이 만들어낸 한 남자의 견고한 자부심이다.

그레이 수트는 솔리드 옴므(Solid Homme), 화이트 브이넥 티셔츠는인터메조(Intermezzo), 슈즈는 발리(Bally).

<닥터 진> 촬영은 보통 몇 시까지 이어지나요?
일찍 끝나면 새벽 1시나 2시고, 늦게 끝나면 아침이죠.

기자들도 간혹 마감 기간에는 동이 틀 때쯤 집에 갑니다.
결국 끝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바로 다음날이 시작되는 거니까.그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제작 시스템은 바꿀 수 없는 건가요?
바꿀 수가 없고, 아무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에서 고용된 사람이 힘든거지, 주최가 되는 입장은 그만큼 안 힘드니까요.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힘들 걸 알고 시작했기에 불만은 없어요. 힘든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은 참여를 안 하면 됩니다.

시청률엔 만족하나요?
드라마가 절반 이상 진행된 지금, 평균 12~13% 정도는 나오죠? MBC에선 축제 분위기예요. 절대적인 시청률 수치에선 경쟁 드라마보다 어떨지 몰라도, 수도권 내에서 광고가 잘 팔렸나 봐요. 성인층이 많이 봐서 충성도도 높고.

경쟁 드라마인 <신사의 품격>도 챙겨 보십니까?
우리 드라마 챙겨 볼 시간도 없는데요, 뭘.

스타일리스트가 그러더군요. 자신이 아는 연기자 중 옷을 가장 많이 가진 배우라고.
정말 많아요.

주로 어떤 스타일의 옷들인가요?
좋아하는 스타일을 많이 사다가, 낯선 스타일에도 도전해보다가, 요즘엔 심플함이 최고라는 생각을 해요. 간혹 ‘나 오늘 약속 있어’ 티 내는 것처럼 늘 완벽하게 차려입은 사람을 봐요. 딱 봤을 땐 멋진데, 5초만 지나면 느끼합니다. 자연스러움이 없으니까.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자선 전시회에 아티스트로 참여하신 적 있죠? 선명한 색으로 표현한 그림들이었어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쭉 미술부 활동을 했어요. 다들 미대 갈 생각 없냐고 했지만, 취미였죠. <닥터 진>이 끝나면 사진을 배워보고 싶어요. 언젠가 글도 써보고 싶어요.

배설의 욕구가 있나요?
아니요. 즐거울 것 같아서요.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경철은 긴장했다.’

하하. 경철이가 누구예요?
몰라요. 그냥 경철이죠. 대체 경철이가 왜 긴장하는 거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고, 막 재밌지 않나요?

인생이 심심한 걸 못 견디시나요?
그런 건 아니에요. 예술가적인 피가 조금 흐르니까 그런가 봐요. 노래도 잘하고 싶고.

욕심이 많으시죠?
욕심! 욕심이라… 아니요, 승부욕이 강하단 표현이 어울리겠네요. 욕심이 많다면 이것저것 다 건드려야죠. 저는 관심 있는 일만 잘해내고 싶습니다.



아내가 ‘뭘 하든 참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면서요. 라면 하나 끓일 때도 열심이라고.
집중을 잘 해요. 뭐든 관심 있는 일이면 대충하질 않아요.

스스로 삶을 피곤하게 만들진 않나요?
그런 말을 들을 때 좀 우습죠. 나는 그걸 즐기는 사람인데, 피곤하지 않냐고 물으니까. 제가 뭔가 일을 한다면 관심이 있기 때문이에요.그러니 일로 만나는 사람들은 제가 대충하지 못하는 모습만 보게 되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범수는 깐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겠군요?
저를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이 저를 평할 땐 답답해요. 이범수는 깐깐하고, ‘지랄’맞을 것 같다고. 사람이 그렇게만 살면 죽습니다. 저는 돈 빌려주고 안 받고 마는 경우도 많은데, 그럼 안 깐깐한 사람인가요? 그저 일하는 순간 만큼은 타협의 의지 없이 치열하고 싶은 거예요.

치열하고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보이긴 쉽지 않죠.
마음씨 좋은 아저씨는 일상에서나 좋은 사람이지, 일하는 현장에서는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어떤 배우는 술도 안 깬 채 늦게 와요. 대사도 다 못 외웠어요. 근데 스태프들한테 서글서글하고, “오늘도 끝나면 한 잔?” 이래요. 그럼 좋은 사람 소리 들어요. 저는 화가 납니다. 그게 어떻게 좋죠?

이범수 씨가 깐깐한 건 사실인 것 같네요, 프로니까.
그렇지 않은 제 모습을 아는 사람이 아내밖에 없을 겁니다. 아내는 제가 릴랙스된 모습도 많이 보니까요.

아내 분은 동시통역사 일을 여전히 하시지요?
네. 국제 행사나 시도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위해 일을 하죠. 책도 쓰고 있고, 하는 일이 서너 개 돼요.

바쁜 커리어우먼이네요. 서로 터치하지 않고 각자의 일을 바쁘게 하며 사는 편인가요?
아내는 바쁜 와중에도 제게 신경을 꽤 써줘요, 귀엽게도. 서로 너무 바쁘다 해도 본질적인 진심이 통한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요.

한 사람의 남자로서 현재 삶에 대한 만족도는 어때요?
너무 감사해요. 지금의 상황이 앉아서 감 떨어지기만 바라다 얻게 된 것도 아니지만,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 노력을 해야겠죠. 15개월 된 딸과 사랑스러운 아내를 보고 있으면, 내 아버지가 맛있는 걸 사와서 자식이 맛있게 먹을 때 참 뿌듯했겠구나, 그 느낌을 알 것 같아요.

남자 이범수의 큰 장점은 뭔가요?
많죠.

하하. 다 얘기해 보세요.
일단, 책임감! 윤택함, 부유함, 다 가졌는데 책임감 없으면 뭐해요?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충실한 책임감을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또 하나는 유머러스함.

한 유머 하시죠. 유머가 안 되는 사람은 누가 유머 칠 때 알아듣기라도 해야 합니다.
아내는 제가 대학교 3학년 학생 회장 오빠 같다고 했어요.

많은 함축이 있네요.
피터팬 같단 얘기도 해요. 저는 지금도 길 가다가 문방구 있으면 형광 요요 사고 신나 해요. 그럼 아내는 재밌어 하면서, 영원히 늙지 말라고 합니다.

그레이 재킷은 유니티(Unity at Celebration),티셔츠는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 뱅글은 아르코 발레노(Arco Valeno),반지는 엠포리오 아르마니 주얼리(Emporio Armani Jewelry).

철 들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남자 예술가들을 많이 봅니다. 그들과는 좀 다른 피터팬인가요?
철이 안 들었다는 표현은 맘에 안 들어요. 배우가 사회성이 떨어져도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유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작품 끝나면 여행 떠난다는 배우들이 많아요. 근데 내 몸이 호화로운 여행지에 있어도 몸이 불편하면 뭐 합니까? 우리 집 골방에서도 내 마음이 평온하면 그게 자유죠.

원효대사 강림하셨어요.
집에 철학책과 역사책이 많아요. <외과의사 봉달희> 마치고 나선가? 촬영이 다 끝난 다음날 눈을 뜰 때, 오늘은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아이스크림이 당겨서 슬리퍼를 끌고 편의점에 갔어요. 스무 개쯤 사서, 하나는 손에 쥐고 비닐봉투를 건들거리면서 걷던 순간. 그 골목길에서의 시간을 잊지 못해요. 어느 휴양지에서보다 행복했죠.

오래된 얘기지만 예능 프로 <동거동락>에 출연했던 게 기억나네요. ‘스댕’이라는 유행어를 만들면서 입담을 뽐냈죠.
원래는 4회 하고 빠지는 거였어요. 하지만 반응이 좋아서 안 놔주더군요. 예능의 실없음에서 오는 허탈함도 있었지만, 거기서 느끼는 재미도 분명 있었어요. 그 후 MC 제의가 많이 들어왔던 게 기억나네요.

이범수 씨는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지만, 진중하고 타이트하게 틀이 잡혀 있는 사람이란 느낌도 듭니다.
제가 원했던 바예요. 누구는 저를 유쾌한 쪽으로, 또 다른 누구는 저를 진지한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사실이 즐거워요.

물론 배우라면 양쪽의 모습을 오가며 살수밖에요.
다만 저는 연기할 땐 나를 놔버려도, 그 외에선 놓고 싶지 않아요. 자연인일 때도 마냥 풀어져 있다면 그런 연기를 할 때 어디 그게 연기인가요? 그냥 그런 사람 자체지. 늘 자신을 놔버리면, 기인이 되는 겁니다. 저는 좋은 배우가 기인이라고 여기진 않아요.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뭐였죠? 최근 영화를 보면 <시체가 돌아왔다> <홍길동의 후예> <정승필 실종사건>… 관객들이 웃으며 편하게 볼 수 있는 오락영화를 선택했던데.
기준은 철저하게 하나였어요. 이거 하면 내가 재밌겠다 싶은 거. 물론 안 했던 걸 해봐야지 하던 때도 있었고요. 이젠 생각이 좀 바뀌고 있어요. 내겐 새로운 시도가 중요하지만, 관객에겐 별로 안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그럼 관객이 좋아할 만한 걸 해봐야겠구나 싶어요.

관객에 대한 예의인가요?
그럼요. 그만큼 제가 성장하고 성숙해졌다는 뜻 같아요.

지금은 종영된 SBS 예능 <밤이면 밤마다>에 나왔을 때, 제작진이 재밌는 자막을 달았더군요. 20여 년 동안 점차
스르르 정상에 올랐다고 해서 ‘스르르 범수’. 그 방송에서 길었던 무명과 조연 시절 얘길 많이 하셨어요. 과거에 대한 기억은 한으로 남아 있나요, 자부심으로 남아 있나요?

자부심이죠. 저는 자기 확신이 강한 편입니다. 배우로서의 신뢰도이든, 한 사람으로서 지닌 가치관이든, 여러 면으로 볼 때 제가 꽤 멋지다고 생각해요.



맡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배역도 있나요?
중요한 질문입니다. 많은 배우들이 인기가 떨어지고, CF가 떨어질 만한 배역은 피한다고 해요. 그건 배우의 본분에 위배되는 일 아닌가요? 저는 그 점이 옳다, 나쁘다를 떠나서 아예 그쪽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다 최근에야 그 개념을 알게 됐어요. 그들은 그렇게 살아서 얻어지는 것이 있나 보구나, 그들처럼 살았을 때 얻는 것과 어떤 역할이든 가리지 않고 충실히 했을 때 얻는 건 어떻게 다른가. 요즘 생각 중입니다.

단순하지 않네요. 그 생각의 끝엔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저는 제가 제법 진취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잘해온 건가 돌이켜보게 됩니다. 잘 해왔다면, 가려서 해온 사람보다 인정을 받고 있는 건가. 인정을 받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는 거죠.

순진하게 혹은 바보스럽게 진정성으로만 일하느냐, 자기 밥그릇 찾으면서 요령 있게 일하느냐, 이 문제는 종자의 차이에 있을 거예요.
저는 비슷한 말로 역량의 차이라고 표현합니다.

스스로의 역량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요?
저는 제 역량이 좋다고 자부합니다. 소위 스타여서 사랑받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이유에서든 스타가 된 건 훌륭한 일이지만, 함부로 배우라는 말을 거론하진 말라고 하고 싶네요. 배우로서 명예와 존경의 영역까진 건드리지 말라는 거죠.

요즘 자기 점검을 하면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게 드러나는 중이군요?
그래야죠. 아니라면 지난 20여 년이 헛수고가 되니까.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더 두고보자. 앞으로 더 두고 비교해달라는 청을 드리고 싶어요.

하하. 관객과 시청자에게 드리는 청인가요?
20년 전부터 스타였지만 1센치도 발전하지 않은 사람과 ‘스르르’ 올라 온 사람 중에 과연 누가 더 박수 받을 만한지 두고보자는거죠.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누가 제일 멋진 배우인지 국민투표를 해서 답이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국민투표 들어가면 자신 있어요?
음, 아직 멀었죠. 전혀 발전 없는 스타와 저 같은 사람이 공존할 수는 있어요. 단, 배우만이 받을 수 있는 존경과 명예의 영역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건드리면, 서운해지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