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미인도

늘 사랑받는 쪽이었던 한효주가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선 웃음을 잃은 왕의 여자로 분했다. 촬영장은 촬영장일 뿐이었지만, 그 공간으로 한효주가 걸어 들어가자 우리가 바랐던 한 점의 수묵화가 보이는 듯 했다.

노란색 모피 코트는 펜디(Fendi),소매가 긴 모시 저고리와 속속곳은 담연 이혜순 한복.

흰끝동 저고리와 모본단 마고자 삼합무지기 치마는 담연 이혜순 한복, 허리 부분에오간자 꽃잎 디테일로 포인트를 준 검정벨벳 소재 드레스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Veneta).(

한효주가 걸어 들어올 때, 둘러앉아 왁자하게 떠들던 스태프들은 한창 수다를 떨던 관성대로 그녀를 맞았다. 오늘의 여배우는 그저 이웃집 소녀처럼 그 무리에 합석했다. 그러나 잠시 후 한효주가 사라지자, 모두는 참았던 숨을 내쉬듯이 비슷한 말을 뱉어냈다. “어쩌면 저렇게 투명해요?” “키가 몇이래요?” 한효주의 실물을 처음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란다.

화사함과 담백함은 서로 반대편에 놓인 말일 텐데, 한효주를 보면 두 형용사가 동시에 떠오른다. 3년 전 <보그> 화보 촬영장에서 대학신문의 표지모델로 썩 어울릴 법한 <찬란한 유산>의 정직한 얼굴이 상상도 못했던 카리스마를 뽐냈을 때, 그녀는 ‘밍밍하게’ 생긴 자기 얼굴이 좋다고 했다. 어떤 색을 칠해도 그대로 흡수하고 변할 수 있으니까.

“저는 한복이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동이>를 촬영하며 1년 동안 한복을 입었더니, 보는 사람도 익숙해지고 제 눈에도 익숙해졌어요. 눈에 익으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동이> 이후, 효주는 다시 한복을 입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의 주된 뉴스거리는 이병헌이 처음으로 사극에 도전한다는 사실이었다. 역사엔 폭군으로 남아 있는 왕(현대에 들어와 다른 시점으로 재조명되긴 했지만), 실록에서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 그의 15일간의 행적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메운 사극. 이병헌은 독살의 두려움에 떠는 광해와 광해를 대신해 가짜 왕 역할을 하는 천민으로 1인 2역을 했다. “이 영화는 광해가 이끌어가죠. 제목처럼 광해에 대한 이야기예요. 저는 제 역할에 부담감을 느꼈다기보다 어떻게 하면 주어진 역할을 넘어 영화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했어요.” <광해>에서 한효주는 왕의 여자다. 천하를 호령하는 남자를 옆에 뒀지만,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해 웃는 법을 잃어버린 여자.

한효주가 말하는 ‘도움’이란, 극의 중심 인물이 아니라도 극에 긴장감을 주는 역할(광해와 똑 닮은 또 다른 광해의 존재를 그녀가 언제 알아챌 것인가!)로서 자신의 효용을 염두에 뒀다는 뜻이다. 참된 정치인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정치 태세를 은유하기도 하는 영화에서웃음기 가신 중전이 등장할 때마다 관객은 ‘가짜 왕’이 그러하듯 연민을 느낄 것이다. “참 불쌍한 여자예요. 궁에 사는 모든 여인들이 불쌍했겠지만요.” 광해의 달라진 태도에 다시 스르르 녹아 내리는 중전, 그녀는 천상 여자다.

소매에 주름이 풍부한 아사 블라우스는헥사 바이 구호(Hexa by Kuho).

스타일리스트 서영희는 한효주의 중전을 위해 한복 스타일링에 참여했다. 웃음을 잃은 여자의 한복이 마냥 화려할 순 없었다. 서영희는 중전의 기품을 간직하되, 색은 절제하는 한복들을 준비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사랑을 놓치다>처럼 감정이 잔잔하게 스며드는 영화를 연출했던 추창민 감독의 성향 역시 담백한 정서에 가깝다.

“사실 처음엔 쪽머리를 해도 장식 있는 방향으로 스타일링 했죠. 그런데 제가 제안했어요, 정말 심플한 머리로 하자고. 중전에게서 화려함은 덜어내고 싶었어요.” 추창민 감독은 영화 크랭크 인 전 처음 한효주를 만났을 때, ‘효주와 중전 사이에 닮은 점이 있냐’고 물었다. 한효주는 감독이 그런 질문을 한 이유가 상처 깊은 중전을 연기하기엔 자신이 밝은 이미지인 것을 우려해서라고 짐작했다. 선뜻 대답을 못하는 한효주에게 감독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하나 있어요. 예쁜 거!” 지금까지 한효주는 주로 사랑을 받는 쪽이었다. <찬란한 유산>의 씩씩한 은성이, <동이>의 총명한 동이, <오직 그대만>의 소지섭은 청순한 한효주의 눈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자 말 그대로 몸을 바쳤다. 사진가 조선희는 <오직 그대만>을 보면서 감독 혹은 촬영감독이 여배우를 얼마나 예뻐했는지 보였다고 했다.

“두 분 다 저를 예뻐했죠, 하하.” 한효주의 어머니는 한효주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밖에 나가면 늘 웃어라,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대해라’라고 말한다. 한효주는 늘 자신보다 남들을 더 배려해야 했고, 부모님 말씀을 잘 따라야했다. 그런 가정교육이 자연인 효주의 반듯한 성정을 만들었다. 이 바탕 때문일까, 배우 한효주는 극 중에서 시련을 겪더라도 진흙탕 속을 구르는 고된 여자가 아니라 언젠가 해피 엔딩이 기다리고 있는 캔디처럼 보였다. 이제훈과 함께 나온 카메라 광고 속의 효주에겐 세상 모든 구김살을 잊게 만드는 풋풋함만이 있다. ‘20대가 왜 다른지’ 알 수 있는 광고다. “작품으로 저를 본 사람들은제 밝은 모습을 많이 기억할 거예요. 하지만 <광해>의 중전은 한 번도 활짝 웃지 않죠. 변신까진 아니어도, 작품 속의 저는 조금 다른 모습일 거예요.”

퍼프 소매로 여성스러운 느낌을 강조한모피 재킷은 펜디(Fendi), 삼합 무지기 치마는담연 이혜순 한복.

먹색 항라 저고리와 드레스 안에 받쳐 입은무지기 치마는 담연 이혜순 한복,비즈 장식과 플라워 장식 시스루 드레스는오브제(Obz ), 겨자색 펌프스는 프라다(Prada).

정통 멜로물인 <오직 그대만>에서 한효주는 예의 햇살 같은 미소와 가슴 먹먹한 사랑 때문에 아픈 여인의 모습을 순차적으로 보여줬다. “한번쯤 멜로물을 해보고 싶었고, 그래서 만족해요. 하지만 쉬운 장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감정에 한번 푹 들어갔다 나오니까 진이 빠지더라고요. 영화를 찍는 동안 매번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야 했죠.” 지난해 여름, <오직 그대만> 촬영을 마친 직후만났던 한효주는 연기에 대한 부담감을 내비쳤다. 연기를 생전 처음 해보는 아이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고도 했다. 긴 호흡의 사극과 시력을 잃어가는 쉽지 않은 연기를 거치면서 그녀는 조금 지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먹색 철릭과 소매가 긴 삼베 저고리와노방 소재의 속속곳은 담연 이혜순 한복, 검정볼레로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다시 만난 한효주는 <광해> 다음 작품인 <반창꼬> 크랭크 업을 며칠 앞두고 마무리하느라 정신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오랜 시간 지속된 화보 촬영 이후, 몇 시간 후면 다시 영화 촬영장에 나가야 했는데도 오히려 한결 여유 있어 보였다. “저는 예전보다 아주 자유로워졌어요. 오랫동안 나에 대해 소홀했다는 느낌이 어느 순간 훅 왔어요. 그래서 이젠 나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자고 맘먹었죠. 예를 들어 예전의 저는 힘든 일이 있을 때도 남에게 피해주기 싫다는 생각에 그저 감내했어요. 그런 것들이 쌓이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지 못했어요. 요즘 갑자기 3년 전에 상처 받았던 일이 생각난다니까요?”

한효주는 우리의 대화가 새벽 시간에 이뤄진 탓에 이상한 흐름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러면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적지 않은 설명을 이어갔다. “요즘의 저는 자아가 마구마구 형성되고 있는 시기랍니다. 이 시기가 지나면 더 행복해질 거예요.”

스타일리스트 서영희는 전통 한복에 비즈가 달린 드레스, 모피 코트 등을 매치해 <광해>의 중전과는 또 다른 한효주의 맵시를 살렸다. 안타깝게도 이날의 ‘상전’은 한효주가 아니라 카메라였다. “오늘 밤 제 꿈에 이 예민하신 카메라가 나올 것 같아요!” 몽롱한 그림을 위해 차출된 이 특별한 카메라는 워낙 피사체의 끈기를 필요로 하는데, 오늘따라 여배우를 앞에 두고 예열 시간이 길었다. 그러나 촬영장은 촬영장일 뿐이었지만, 그 공간으로 한효주가 걸어 들어가자 우리가 바랐던 한 점의 수묵화가 보이는 듯했다. 화선지 더미를 요 삼아 누워 있는 한효주를 응시하고 있으면, 뼈대를 드러낸 채 그녀를 비추고 있는 조명도 등불처럼 보였다. 오늘만큼은 화사한 청춘보다 그윽한 여인이 거기 있었다.

먹으로 번진 듯한 문양의 실크 블라우스는셀린(C line), 라피아 소재 칼라는 마르니(Marni),검정 벨벳 소재 벨트는 구찌(Gucci),삼합 무지기 치마는 담연 이혜순 한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