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여자, 이요원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용의자 X〉는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요원은 검은 절망 속에 살던 천재 수학자에게 찾아온 한 줄기 햇살 같은 여인이다.



밀레니엄의 흥분으로 모두가 들떠 있던 그 해10월, 고양이를 안고 찾아온 새침한 여자 아이는 미래에 대한 순진한 기대도 없이 일찌감치 어른들의 세계에 작은 발을 밀어 넣고 안간힘을 다해 외쳤다. “평생 잔심부름만 하는 저부가가치 인간으로 살 수는 없어. 코도 높이고 영어 공부도 하고 반드시 성공할 거야!”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혜주는 스무 살 무렵의 이요원이었다. 얄미울 만큼 예쁘고, 깍쟁이처럼 제 몫의 연기를 해내고, 어수룩한 실수 없이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쌓아 가는 야심 찬 신인. 오규원의 시 <한 잎의 여자>가 엔딩을 장식한 드라마 <푸른 안개>에서는 ‘물푸레나무 한 잎의 솜털’같이 맑고 순결하고 자유로운 롤리타였다. “그땐 딱 그 나이였기 때문에 그 나이대의 연기를 가장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담백한 얼굴로 까만 눈을 반짝이는 이요원은 어느 면으로 보나 자극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스릴러 영화 <용의자 X>에 출연하게 된 건 그래서 뜻밖이었다. “추리물이나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시나리오를 받은 후에야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유명한 작가의 베스트셀러라는 걸 알았죠.” 원작이 된 <용의자 X의 헌신>은 천재 수학자가 만든 수수께끼 같은 살인 사건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에서는 이미 드라마와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다. 영화 <오로라 공주>를 촬영할 때부터 영화화를 결심했다는 방은진 감독은 치열한 두뇌싸움으로 흘러가는 원작과 달리, 난해한 살인 수식의 숨은 변수가 되는 사랑에 초점을 맞췄다. 로프를 든채 목을 맬 장소를 찾아 서성이던 남자는 옆집에 새로 이사 온 깨끗하고 아름다운 눈빛의 여인을 보고 처음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는다. 방은진 감독은 이요원이야말로 누군가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줄 ‘햇살 같은 여자’ 화선이라고 확신했다. 튼실하게 살아가주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존재. 비록 호스티스라는 어두운 과거를 지녔고,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떻게 보면 멜로영화죠. 결국은 사랑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첫눈에 반한 여자를 위해 완전 범죄를 구상하는 천재 수학자 역은 류승범이 맡았다. 논리적이고 침착한 인물이다. 화선과는 모든 게 정반대다. 때문에 순식간에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극과 극은 원래 끌리게 마련이니까. 두 배우 역시 물과 불처럼 다르다. “전 여행을 가도 조용히 풍경 보는 걸 좋아하는데, 승범 씨는 예술가들이 많은 도시, 핫한 클럽, 이런 데를 찾는다고 해요. 얘기를 나눌수록 우린 너무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었죠. 그래서 서로를 신기하게 생각했어요.” 멋쟁이 류승범에게 왁자지껄한 파티가 어울린다면, 이요원은 조용하고 수수한 타입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옷차림에 있어서도 요란을 떠는 법이 없다. 멋진 것보다는 편한 게 제일이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매니저는 데뷔 때부터 함께해왔고, 다른 스태프들도 거의 변함이 없다. “말 하지 않아도 알잖아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또다시 나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게 귀찮은 거죠. 그래서 여자들이 나이 먹을수록 연애를 못 하나 봐요.”

방은진 감독과는 스승과 제자로 먼저 만났다. “학창 시절 선생님이 주연한 연극 <햄릿>을 봤어요. 학교에서 강의를 하셔서 수업도 몇 번 들었죠.” 이요원은 방은진 감독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영화 <된장>의 이서군 감독도 두 사람을 잇는 연결고리다. 1995년 개봉된 영화 <301 302>에서 방은진은 대식증에 걸린 이웃집 여자 송희로 첫 주연을 맡아 충무로의 떠오르는 연기파 배우가 되었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이서군은 그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리고 그 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과 각본상을 나란히 수상했다. 여성 감독과의 작업은 이로써 세 번째다. “유난히 여자 감독님들과 많이 작업한 것 같죠? 제가 느끼기에도 그래요. 편한 부분도 있지만 그래서 더 힘든 부분도 있어요.” 이번 영화에서 방은진 감독은 이요원에게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된 틀을 깨부수고 익숙하게 굳어진 연기 톤을 완전히 뜯어고칠 것을 요구했다. 여성 감독 특유의 섬세함으로 디테일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연기를 하면서 자꾸 벽에 부딪히는 걸 느꼈어요. ‘나는 진짜 연기를 못하나 보다. 이제 그만둬야 하나.’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표현이 안 되니까 답답했죠.” <용의자 X>의 화선은 이요원이 지금까지 해온 역할들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다. 밑바닥부터 시작했지만 오뚝이처럼 일어섰던 <패션70>의 더미, 정의롭고 씩씩한 외과의사 봉달희, 한 나라의 여왕이 된 덕만이 비현실적일 만큼 밝고 긍정적인 캐릭터라면 화선은 비참한 현실의 여자였다. “이 여자도 참 기구한 팔자죠.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려 애를 썼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지면서 모든 게 무너져 버렸으니까.”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화차>의 선영(김민희)과 닮은 부분도 있다. 이요원 역시 그 영화를 봤다. “일본 추리소설이 원작이라고 해서 일부러 봤어요. 그런데 전 좀 찝찝했어요. 너무 현실적이잖아요. 그에 비해 우리 영화는 따뜻해요. 여주인공도 엄청나게 말이 많고요.”

류승범은 이번 영화를 “나의 진정한 30대 연기 인생의 문을 여는 작품”이라고 했다. 둘은 동갑이다. 이요원에게는? “글쎄요, 전 어떤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이요원이 나른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는 질문의 마침표를 기다렸다가조금씩,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답변은 언제나 솔직하다. “저는요, ‘나는 배우’ ‘나는 영화인’ 이런 게 없어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연기를 하니까 참 신기할 따름인 거죠. 저에겐 그냥 직업이에요. 직업인은 직장에서 당연히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거고, 거기에 따른 보상을 받으면 행복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작품을 하는 동안 제가 행복했잖아요.” <용의자 X>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평가 받고 잘 되면 좋은 거고, 그게 아니라도 실망스럽지는 않은 작품.” 딱 거기까지다.

10월부터는 드라마 <마의>가 시작된다. 사극의 대가 이병훈 PD 작품이다. 조선 최초의 한방외과의 의관 백광현의 이야기다. 조선시대 의술을 다루지만 주인공이 원래 말을 다루는 수의사였다는 점에서 <허준>이나 <대장금>과는 또 다르다. 이요원은 백광현(조승우)과 신분이 뒤바뀐 혜민서 의녀 강지녕을 연기한다. 조선시대의 단아한 규수가 아니라 진취적인 여성이다. <선덕여왕> 이후, 당분간 사극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요원은 대본을 읽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해볼까? 사극에 대한 트라우마를 깨볼까? 그래,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한 번 더 해보자 싶었어요.”

차가운 가을, 고양이를 안고 우리 곁에 찾아왔던 스무 살 소녀도 이제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걸까? 드라마와 <용의자X> 외에도 또 한 편의 영화가 올해 안에 개봉될 예정이다.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를 생각하면 꽤 의욕적인 행보다. “과연 내가 몇 살까지 연기를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한 많은 작품을 하고 싶어요.” 얼마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 <피에타>의 조민수는 이요원을 비롯한 여배우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했다. 작품 활동에 있어 여배우의 나이는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다. 여배우는 피고지는 꽃이 아니라 반짝이는 보석이다. 보석은 오랜 시간 갈고 닦을수록 빛이 난다. 중요한 건 어떻게 그 시간을 보내느냐 하는 것이다. “전 분명 과거의 선배들보다 좋은 세상에 살고 있어요. 이번 영화를 하면서 느꼈어요. 이제는 나이에 맞는 사람이 되고, 또 그런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걸.” 오랜 시간 우리의 옆집에 살아왔던 그녀가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누른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우리가 알고 있던 예쁜 여자 아이가 아니다. 눈부신 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