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시간

상황이 주어지는 영화 현장도 아니고, 작정하고 뛰어드는 레드 카펫도 아닌 이곳, 배우들만의 은밀한 사교 현장은 어떤 모습일까? 한국의 배우들에게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보내온 <보그>가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아주 사적인 배우 파티에 단독으로 동행했다.

1. ‘‘우리는 한 식구입니다!’’배우 파티를 발족시킨영화계의 큰형님 안성기와박중훈의 건배 제의. 2. 댄디한 청록색 벨벳 재킷이 잘 어울렸던 지성. 3.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손을놓지 않았던 유지태와 김효진.

4. <해운대의 연인>들 이후 부산에 매료됐다는 조여정. 5. 강혜나, 김아중, 이기우 등 10월에 생일을 맞은 배우들을 위한 서프라이즈 생일 파티. 6. 싱그러운 미소가 매력적인 최시원과 이특. 7. 다정하게 모여 앉아 웃음꽃을 피우는 나무 액터스 소속 배우들. 이윤지, 문근영, 전혜빈, 김강우. 8. 포장마차촌으로 이어진 애프터파티까지 즐긴 고아라.

해마다 10월이면 부산엔 배우들이 지치지도 않고 몰려든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그와 그녀의 가슴에 격렬한 호출 신호라도 보내듯. ‘부산영화제’라는 자석에 끌려 온갖 화려한 드레스와 턱시도를 차려입고, 바람 부는 해운대 바닷가로 그들이 온다. 저마다 불타는 화재 현장, 쓰나미가 몰려오는 바다, 칼바람이 부는 황야와 무정부적인 대저택에서 외롭게 고투하던 배우들이 영화 동료와 영화 팬의 우정을 확인하기 위해, 한 해의 물리적 고독을 버텨낼 만한 나르시시즘을 수혈 받기 위해 빛 가운데로 온다. 부산의 밤은 수많은 파티들이 난무하지만, 그래도 배우들이 허심탄회하게 맘을 나눌 수 있는 곳은 아시아연예매니지먼트협회((Asia Pacific Actors Network)에서 주최하는 ‘APAN party’. 일명 ‘배우 파티’라고 불리는 APAN party는 APAN Village에서 파라다이스 호텔 야외 공간까지,관객과 프레스를 위한 두 시간에 걸친 ‘블루 카펫’ 세리머니 서비스를 마친 배우들이 모두 한 공 간에 모여 맘 편하게 모여 즐기는 유일한 프라이빗 파티다. 한국의 배우들에게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보내온 <보그>는 재작년에 이어 APAN party’ 후원자 자격으로 이 파티에 동행했다.

9. 파티 내내 섹시한황태자 포스를 풍긴박시후. 10. 감독 대 감독으로만난 강제규와 박중훈.박중훈은 내년 2월감독으로 데뷔한다. 11. 음악에 맞춰 춤도 추며 분위기를 흥겹게주도했던 두 신사 김수로와 김민종. 12. 호기심 가득한 영롱한 눈빛이 빛나던 남규리. 13. 오지호, 전혜빈, 정석원. 사교적인활동력이 돋보였던 삼총사 14. 의 성공으로 아우라가 엄청난 이병헌.

밤 11시 즈음, 안성기와 박중훈은 그랜드 호텔로 가장 먼저 달려와, 친해지고는 싶지만 방법을 모르는 후배들끼리 서로 인사도 시키고,해외 관계자들을 호스트 자격으로 접대하느라 분주했다. 그들의 인격은 항상 ‘연기’라는 매체를 아주 품위 있게 사용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야 배우들이 절친이 될 수 있나 고민했다”는 두 사람의 변. 박중훈은 ‘우린 식구 ’라는 표현을 썼다. 마이크를 잡고 선 두 ‘형님’의 건배 제의에 따라 풍부한 발성을 가진 수십 명의 배우들이 순하게 “네! 형님!” 하고 순하게 복창하는 풍경이 펼쳐지고, 가장 사이가 좋은 식구는 나무 액터스 배우들이었다. 문근영과 전혜빈과 이윤지, 여배우 3인방은 샴페인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뭐가 즐거운지 오손도손 얘기도 나누고. 로열 블루 드레스로 레드 카펫 성인식을 치른 문근영과 작정하고 벼른 듯 비대칭 옐로 드레스 커팅 사이로 탄탄한 보디를 뽐낸 이윤지, 정글에서도 바다에서도 에너지가 넘쳤던 전혜빈은 파티가 끝날 때까지 여고 동창처럼 함께였다.

15. 파티 내내 사람좋은 웃음을 짓던배수빈. 영화 개봉을앞두고 있다. 16. f(x)의 공연 내내 함성을 지르며 에너지를 보탰던 슈퍼주니어 청년들. 17. 파티장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 f(x)의 공연. 18. ‘‘Shall We Dance?’’ 묘하게 어울리는이윤지와 조성하.

김효진과 유지태의 금슬은 아무도 갈라놓지 못 한다. 파티장에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유지태는 부산에서 <마이 라띠마>라는 장편영화를 공개해놓고 감개가 무량하고, 김효진은 가슴이 떨려서 아직 남편의 영화를 못 봤다고 했다. 강제규 감독은 부산과 파티를 좋아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작년 디올 파티의 오킴스바에서도 제일 신이 났었는데, 올해 APAN 파티에서도 먼저 샴페인 잔을 들고 이 사람 저 사람과 허그를 한다.

미니 드레스를 입고 금빛 헤어를 휘날리며 파티장을 헤엄치는 김아중은 배우 지성의 공식 파트너였지만(영화 <마이 PS파트너>), 여보란 듯이 박중훈이나 류승룡과도 격의 없이 어울렸다. 키가 큰 이기우는 소파 밑으로 기다란 다리를 뻗어 외진 곳에서 소리 없이 웃고 있고, 류승룡은 모태 카사노바 기질을 발휘하며 좌중을 휘어잡을 줄 알았건만, 소파에 앉아 지긋이 윙크만 날린다.

<신사의 품격>의 ‘철없는 신사들’ 김수로와 김민종 브라더스만 플레이보이와 분위기 메이커 기질을 섞어 간간히 막춤도 추며 여흥을 돋우고. 옆에서 박시후는 ‘<내가 살인범이다>의 영화 캐릭터를 털어내는 중’이라며 회색 베스트까지 갖춰 입고 카메라 앞에서처럼 서늘한 폼을 잡는다.


19. 공연에 열광하는 나무 액터스의 세 자매.이윤지, 문근영, 전혜빈. 20. 모델 출신 신인 배우들. 김영광, 구은애, 성준. 21. 선한 눈매가 자매 같은 문정희와 황우슬혜. 22. 새신랑처럼 보는 사람들마다 악수를 청한럭키 가이 이병헌. 23. 의 헤로인 강소라.

24. f(x)의 엠버와 슈퍼주니어의 최시원의 시그니처 포즈. 25. 18개월 된 딸아이를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 온 문소리. 26.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로 커플 연기를 할 박시후와 문근영의 깜찍 포즈 27.작은 영화에서 총명한 빛을 발하는 김혜나. 28. 남자 배우들과 가장 격의 없이 어울린 김아중. 29.부산 사나이다운 거친 매력을 풍긴 김강우. 30. 지성이 영화 <마이 PS파트너>의 주제곡을 부른 가수를 무대로 불러 즉석 공연이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가장 핫한 우리의 ‘왕’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스타 이병헌이 파티 중간에 거침없이 등장해서 BH 엔터테인먼트 손석우 대표와 배수빈의 ‘가오’를 살려주었다. 뿔테 안경에 캐주얼한 재킷, 블랙 진의 평범한 차림인데도, 온몸에 빛이 나는 이병헌.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줄 줄도 안다고 했던가. 그는 할리우드 제작자 파티의 한국 호스트를 해본 경험을 살려 파티장에 모인 배우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일히 눈을 맞추고 따스하게 손을 잡아주었다. 배우 김남일을 대신해 참석한 스타 제이 정용범 대표가 김남일이 제작했다는 음악영화 다큐의 클래식 아티스트들을 오지랖 넓게 이병헌에게 소개도 하고. 강제규 감독은 블록버스터 재기를 하려는 듯 이병헌과 계속 할리우드 시스템에 관한 귓속말을 나누며.

지금 영화계에는 스타들이 넘쳐난다. 세계가 한국 영화의 무대다. 윌리암 모리스 에이전시의 성공작으로 평가 받는 이병헌은 지금, 할리우드와 충무로에서 동시에 활동한다. 여배우 배두나는 워쇼스키 감독과 영화를 찍고 LA에서 영화 오디션 미팅에 여념이 없으며, 장동건·장백지·장쯔이가 허진호 감독의 진두지휘로 부산에서 오픈한 <위험한 관계>는 심지어 중국 국적의 영화다. 부산은 그렇게 날로 진화를 거듭해서 놀라운 성취를 이룬 배우들의 자축의 장이 됐다. 한국 배우, 한국 영화가 아닌, 한국 출신의 세계적 감독과 배우들이 서로에게 감동하고 격려하고 자극도 받는.

문소리는 시끄러운 파티장에서도 휴대폰을 꼭 그러쥔 채 친정 엄마에게 맡긴 18개월 딸아이를 챙기는 모습이 뭉클했다. 여배우 황우슬혜와 <연가시>의 문정희를 데리고 온 제이원플러스 김효진 대표는 막 스크린에 윤기와 찰기를 더하기 시작한 다소곳한 이 두 배우들의 기념 사진을 찍어주고 싶어 했다. 먼저 서울로 간 한가인을 아쉬워하며, 언제 한번 <보그>가 여배우들을 모아 근사한 가족 사진을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제안도 하고.

배우들은 어쩌면 캐릭터의 방패를 쓰고 사는 조용한 사람들이다. 때로 정신과 의사 같은 감독의 격려로 분출된 대담한 모습들은 그들과의 본성과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써니>에서 선 굵은 연기로 제2의 진희경으로 불렸던 강소라는 화려한 졸업 파티장에 잘못 온 시골 아가씨처럼 홀로 외로워 보였다. 10년 전 <꽃섬>으로 데뷔했던 ‘까만콩’ 김혜나는 여전히 건강한 에너지로 작고 진지한 영화들을 여행하는 기쁨에 차 있고. 드라마 <해운대의 연인들> 때문에 부산이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진다는 조여정은 항구 도시에서 보냈던 나날들을 참새처럼 조잘댄다. f(x)의 공연을 가로막는 나무액터스 김종도 사장에게 “비켜보라”며 귀엽게 시비 걸던 김강우, 배우들의 공간에서 땀을 흘리며 두 곡이나 라이브 댄스곡을 소화해 인기를 독차지한 f(x)의 크리스탈, 설리, 빅토리아, 엠버. 그리고 그녀들을 응원하러 와서 목이 쉬도록 환호를 외친 SM의 동료 슈퍼주니어 청년들. 슈퍼주니어의 이특은 이어지는 축하 공연에서 “내년엔 꼭 댄스곡을 준비해 오겠다”며 너스레를 떨고.

우리는 대부분 환한 대낮에 멀쩡한 정신으로 극장문을 나선다. 그러곤 맑은 정신인 채로도 낭만적인 꿈을 충족시키길 소망한다. 우리의홍채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늘 빼어난 배우들의 증폭된 연기에 사로잡힌다. 몰풍경한 현실에 발을 디딘 옆집 소녀든, 현실과 유리되어도 낭만적인 현실에 충만한 히어로든. 거기엔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배우들이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배우들은 피도 분홍색일 것 같다’고 하지만, 슬쩍 보면 다가가기 어렵고 새침해 보여도 무척이나 넉넉한 성정에 상처 받기 쉬운 배우라는 피조물.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점점 더 정겨운 광경이 연출됐다. 어딘가 샌님 같아 보이지만 대담한 구석도 있는 배우 지성이 마이크를 잡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김아중과 찍은 영화 <마이 PS 파트너>에서 노래를 불러준 친구라고 무명 가수 한 명을 소개한다. 서프라이즈처럼 펼쳐진 통기타 가수의 공연에 따뜻한 박수가 쏟아지고. 그리고 이어지는 더 놀라운 서프라이즈! 김아중, 이기우, 김혜나 등 10월에 생일을 맞은 배우들의 이름이 불리고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배우 성가대가 부르는 ‘생일 축하합니다’가 울려 퍼지고, 소담스러운 케이크의 촛불이 꺼졌다.

동선과 상황이 주어지는 영화 현장도 아니고, 대중 앞으로 작정하고 뛰어드는 레드 카펫도 아닌 이곳에서, 배우들은 오랜만에 ‘혼자가아니라’는 사실에 감격해 했다. 제아무리 영화에서 배우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관객들 대부분의 시선은 주인공의 행보와 교통한다. 주인공이 핏물을 뒤집어쓰고 신음하면 관객들의 가슴은 새가슴이 되고, 예상치 않은 주인공의 불행은 하루 종일 관객을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에 빠진 배우의 눈동자를 보고 잠 못 이루고, 시장에서 흔하게 만날 것 같은 배우를 보며 위로를 받는다. 인생은 지겹도록 한 편의 영화와 비유된다. 배우가 아닌 우리는 한 사람의 역할 행동에 충실하도록 태어났고 교육 받지만. 한때 고현정은 말했다. “타고난 고유의 성격을 유지하고 사는 게 얼마나 행운이에요. 저는 배우 안 할 때 오히려 24시간 연기한다고 질책을 받았어요. 다시 배우를 하고 나서 작정하고 내 기질을 바꿔보자, 모두가 행복해지는 캐릭터를 잡아 연기해보자, 그랬어요.”

그렇게 배우들은 사람들에게 환상도 주지만, 정신적 힐링 효과도 준다. 영화를 시작하는 그들 한 명 한 명은 최소한의 욕망과 희망으로 시작하지만, 결과를 지켜보는 시선은 최대한의 지점에 머무른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다. 그날 새벽 그랜드 호텔에서의 파티가 끝난 후 이병헌, 김주혁 등 배우들은2차를 하자며 포장마차로 몰려가 생새우에 소주를 마셨다. 롱테이크를 쓴 것이 어땠고, 리얼리즘적인 연속성이 어땠고, 롤랑바르트 이미지론이 어쩌고 하는 어려운 얘기는 도마 위의 칼자루에 날려버리고. 그저 맑은 소주에 교감의 눈빛을 담아 날이 새도록 그들만의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