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서영희

우리 시대 약자의 얼굴을 연기했던 여배우 서영희 가 새 영화 <비정한 도시>로 돌아왔다. ‘자아도취’의 흔적 없이, 처연하게 시지프스의 천형을 지는 이 여배우를 <보그>가 누아르의 강렬한 아름다움 속으로 초대했다.


비즈 장식 시스루 블라우스는 구찌(Gucci).

서영희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스크린에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그녀에게 닥칠 불행의 전주곡을 감지하고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동그랗고 해맑은 그녀의 표정 어디에 낭떠러지 같은 ‘피해자의 얼굴’이 숨어 있는 걸까. ‘단지 그녀가 배우라는 이유만으로’ 서영희는 이 땅의 여자들이 약자로서 당할 수 있는 온갖 더러운 ‘꼬라지’를 다 겪었다. 데뷔작인 <질투는 나의 힘>부터 연쇄살인의 처절한 희생자인 <추격자>, 국내외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쓰는 쾌거를 거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까지. 그래서 <김복남 살인 사건> 후반부에서 자신을 괴롭힌 자들을 향해 사정없이 낫을 휘두른 ‘복남이’는 그동안 서영희 안에서 숨죽이며 참았던 ‘피해자들의 함성’과 맞물려 격렬한 복수의 하모니를 이뤄낸다. 어떻게든 사랑받으려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다가 값없이 희생 당하는 잡초 같은 여자. 매번 자기 보호 장비도 없이 위험 속에 던져진 여자. 세상에서 가장 운 나쁜 여자. 이름조차 ‘선명하게’ 불려본 적 없던 여자. ‘구타 유발자’라는 농담처럼 맞거나 죽는 게 삶이었던 서영희 안의 그녀들. 새 영화 <비정한 도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췌장암에 걸린 부인 역할이에요. 제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남편(김석훈)이 사채를 쓰고, 저는 그게 보기 힘들어 자살을 시도해요. 도시 밑바닥 얘기죠. 제가 울면 팔자 눈썹이 되는데, 인상 쓰고 울어서 밉상 완결판이 됐어요. 히히.”

매번 힘든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그 표정 어디에도 트라우마의 자취가 없는 게 신기하다. 서영희를 볼 때마다, 그녀가 김기덕이나 박찬욱같은 ‘쎈’ 감독과 만나면 어떨까 싶었다.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매번 극한 상황을 소화하는 이 귀한 여배우의 에너지가 극적 긴장을 조성하는 데 소비되기 보다, 영화의 스토리텔러로 제대로 대우 받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이미 산업화된 남성 중심의 영화계에서 여자 혼자서 끌고 나갈 수 있는 격렬한 스토리가 어디 흔한가. 성적인 격렬함이 추진력이 되는 <하녀>와 <정사>가 다시 나오지 않는 한, 김혜수도 문소리도 전도연도 강혜정도 모두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영화계. 그리고 그녀들보다 더욱 서늘한 곳에 변방의 여배우, 서영희가 있다. 평범함과 광기를 오가며 푸른 멍이 든 창백한 얼굴로.

“저는 잡초처럼 살았어요.” 서영희가 붉은 입술을 벌려 낙타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공격적이지도 방어적이지도 않은 초연한 어투로. 그녀가 처음 등장했던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을 볼 때부터 “저러다 일 나지” 싶었던, 오로지 자기 앞길만 보고 갔던 ‘무섭고도 가여운 아가씨’가. 문성근, 박해일, 배종옥이 펼치는 질투의 삼각관계에 끼지도 못한 채 박해일의 곁가지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하숙집 딸로 스물한 살에 괴물 같은 존재감을 드러날 때부터 그건 그녀의 운명이었다.

“처음에 그렇게 ‘험하게’ 시작해서 그래요. 박찬옥 감독님이 머리카락에 윤기 돈다고 샴푸로 머리 감지 말고, 빨랫비누로 감으라고, 저를 배우로 조련하셨어요. 그 영화로 처음 오디션 보러 갔다 나오면서, 문앞에서 하얀 원피스 입고 대자로 넘어져서 무릎팍이 깨졌어요. 그때 피를 봐서 지금까지 피 보는 거라고···, 저 혼자 그래요. 하하.” 어떻게 여배우가 저렇게 ‘자아도취’가 없을까 싶을 만큼 처연한. 서영희의 고요한 미소는 상처와 인내로 발효된 ‘웅숭깊은 자존감’의 다른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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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얼굴만으로 그림이 되는 김태희 같은 여배우, 알콩달콩 연애질만 해도 귀여운 공효진 같은 여배우들이 부러울 때가 왜 없었을까.하지만 사람마다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는 법. “인생에서 필요한 건 인내심이죠” 안톤 체호프의 연극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어쩌면 인생의 검은 상복을 미리 차려입고 수선을 피우는 건 더 쉽다. 서영희는 9남매에 고모가 일곱인 시댁에서 참고 대소사를 치러낸 어머니의 딸로 자랐다. 대가족 제도의 피해자였던 가여운 어머니를 도와 ‘명절증후군을 앓는 아기’에서 ‘생활력 강한 여자’로 성장했고. 대학 입학과 함께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이들 모녀의 오랜 부역은 끝이 났다. 그녀는 엄마와 거실 통창으로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자연의 위엄 속에 계절의 냄새를 맡아가며, 그날그날의 평화를 감사해하며. 지금은 잘 웃고 평범한 남자와 결혼해서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며 산다. 마흔엔 세계 여행을 하기 위해 적금도 들어놓은 채로.

어쨌든 배우의 삶은 천형적으로 시지프스다. “전 그냥 창피하고 싶지 않아서 매 순간 최선을 다했어요. 나에게, 사람들에게 쪽 팔리고싶지 않아서. 가끔은 왜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역할을 맡지 못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일까? 괴로웠는데, 결론은 기다리자,였어요.” ‘조민수 선배처럼, 엄정화 선배처럼 언젠가는 기다리면 나에게도 기회가 오겠지’, 그건 그녀 말대로 체념이나 한탄이 아니라 ‘굉장한 시간의 선물’일 거라고, 젊지도 늙지도 않은 서른넷의 나이가 좋은 것도 남은 날 동안 오로지 더 나이 들 수 있다는 희망에서다.

가죽 조각들을 이어 붙여 마치 악어가죽처럼 보이는 블랙 드레스는톰 포드(Tom Ford), 볼드한 반지는 세린 오(Serin Oh).

무방비 상태에서 덮쳐오는 삶의 고통에 직면하는 여배우의 표정은 오로지 한 컷만으로 영화의 전사를 드러내곤 했다. <더 리더〉의 케이트 윈슬렛이나 <케빈에 대하여>의 틸다 스윈튼처럼. 나치 전범으로(케이트), 관계에 서툰 엄마로(틸다), 의도하지 않게 타인의 인생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 동시대 여배우들의 얼굴, ‘나무가 흔들리는 것’ 같은 서양 여배우들의 스산한 표정을 보면서, 서영희를 떠올렸다. 남편과 다른 여자가 섹스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비빔밥을 먹는 모습이나, 산발한 채 여름 땡볕 아래 낫을 치켜든 그녀의 모습은 2010년 가장 강렬한 이미지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오늘 긴 머리카락을 붙이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그녀를 보니, 뉴에이지 시절의 담백한 대만 영화가 떠오른다. 여배우의 감정이차오르고 마침내 꺽꺽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5분간 보여주던 <애정 만세>의 엔딩 신 같은 모습… .

“우와~! 여배우의 감정을 5분간 기다려주는 영화가 있었다니 놀랍네요. 저도 그런 정적인 연기를 해보고 싶은데…, 그런데 한편 저는 몸을 쓰고 고생을 좀 해야 연기를 한 거 같고, 쓸모가 있는 거 같고…, 히히.” <추격자>에서 온몸이 묶인 채 살려고 파닥거리는 연기를 하느라 무릎과 허리 관절이 다 상했지만, 가장 힘든 건 ‘시체 연기’라고.

“<궁녀> 할 때였는데, 그냥 며칠을 숨 참고 찬 바닥에 누워 있어야 했는데, 그게 견디기 힘들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참 힘들었어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무언가 해보려고 안달복달 애쓰는 사람과 힘 주지 않고 자기 본성대로 가는 사람들. 전자는 고생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몸을 쓰는 온갖 아르바이트는 다 해보고, 영화 노동에 잔뼈가 굵은 그녀가, 특유의 잡초 같은 생명력을 존엄하게 쓰려면 목소리가 더 쩌렁 쩌렁해져야 한다고 충고해주었다. 참고 참아서 나오는 에너지를 넘어서, 때론 고결하게 직진하는 다부진 발성으로. 그래서 김여진 같은 맑고 건강한 배우와 함께 <델마와 루이스> 스타일의 로드 무비도 찍으면 좋겠다고.

“제 성격은 급하고 잘 참고 변덕스러워요. 연기에 좋은 성격은 변덕스럽고 기복이 심한 거, 그건 감정을 빨리 불러왔다가 지울 수 있으니까. 정신과 의사에게 물어보고 싶은 건 제가 왜 이렇게 많이 참는 성격이 됐을까, 하는 거예요. 최면도 받아 보고 싶어요. 참는 게 힘들진 않은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좀 하고 살면 좋겠어요.”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얼마 전부터 CJ E&M에서 한국 영화를 이끌어 갈 차세대 실력파 신예 감독 6명이 벌이는 단편영화 배틀 <디렉터스 시즌 2>의 MC도 맡은 옹골찬 서영희. 촬영 내내 속에 꿀이 풍부한 벌집을 숨겨두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한결같이 겸손 뒤로 숨었다. 기꺼이 희생애에 가득 찬 여배우라는 이름 속에서, 극단적 성향이 언제나 수도관처럼 분출하고 있다는 걸 느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