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배두나라는 행성 1

한국에서는 아무도 그 정체를 규정할 수 없었던 배두나라는 행성이 지금 할리우드에서 머나먼 시간 여행을 시작한다. 워쇼스키 감독의 SF 서사극 〈클라우드 아틀라스〉로 ‘경이로움 그 자체’라는 호평을 받고 있는 배두나를 LA 현지에서 만났다.

모피와 펀칭 디테일 장식의 블랙 드레스는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블랙 가죽 부츠는 커스텀내셔널(Costume National), 가죽 벨트는 스택(Staerk), 뱀피 장갑은 가스파 글로브스(Gaspar Gloves for The Row).

버건디 가죽 드레스는 아크네(Acne), 블랙 페이턴트 가죽톱은 프라발 구룽(Prabal Gurung).

시크한 느낌을 주는 블랙 가우초 팬츠와 톱, 레이스업 부츠는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 롱 장갑은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

LA의 가을은 뜨거웠다. 대낮이면 30도를 웃도는 열기로 할리우드 사인이 있는 밸리는 멀리서 보기에 지열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배두나는 이틀 전 LA에 도착해 할리우드 미디어 밸리 안으로 들어갔다. 토론토영화제에 이어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공개되는 미국 언론 프리미어 시사, 그리고 40개가 넘는 외신 인터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할리우드 밸리에선 김지운 감독이 <라스트 스탠드> 개봉을 기다리고, 이병헌이 <레드 2>를 촬영 중이다. 싸이가 유튜브 뮤직 비디오 한 편으로 음악계를 평정한 이후, LA 거리에선 택시 기사조차 ‘코리안 말춤’으로 농담을 건넨다. 그리고 할리우드 스트리트를 차로 달리다 보면 <클라우드 아틀라스> 포스터가 돌아가는 회전형 빌보드를 만날 수 있다. 포스터 중앙의 인물은 놀랍게도 배두나다. 그 뒤로 삼각 대열로 톰 행크스, 휴 그랜트, 수잔 서랜든, 할 베리 등이 늘어서 있다. 그녀는 은하계 저 멀리에서 날아온 행성처럼 가운데서 신비롭게 빛났다. 서양인도 동양인도 외계인도 사이보그도 아닌, 홀로그램처럼 빛으로 가득한 배두나라는 독특한 행성. 토론토영화제에서 영화가 처음 공개된 이후 외신들은 온통 배두나얘기뿐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배두나는 영화에서 중요한 열쇠’라고 평했고,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가장 강력한 인상을 심어준 배우’, <더 뉴요커>는 ‘경이로움 그 자체’라고 호평을 쏟아냈다. 시사회 직후 톰 행크스는 “영화를 본 기자들이 나한테 다들 배두나가 누구냐고 묻는다. 네가 자랑스럽다”며 그녀를 포옹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나로선 톰 행크스와 할 베리가 깔아 놓은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 배두나가 있다고 상상할 뿐! 인생에서 특별한 확장 전략을 세워본 적 없는 그녀가 어떻게 이런 특별한 상황 속에 놓여 있게 되었는지는 잠시 후 이야기하기로 하자.

배두나를 만나기 전 잠시 할리우드의 그 유명한 간판에 얽힌 스토리를 들어보자. 멀리서 보면 투명한 파란 하늘로 솟아 오른 언덕 위에 ‘Hollywood’ 간판이 세워져 있다. “LA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이미 그곳의 냄새를 맡았다”라고 1949년 레이몬드 챈들러는 이곳에 대해 기록했다. 루이 B. 메이어가 아카데미를 설립하기 3년 전인 1924년, 그 유명한 할리우드 간판이 세워졌다. ‘할리우드랜드’라고 적힌 간판의 가장자리는 4000개의 전구로 장식됐다. 그것은 할리우드대로에서도 보일 만큼 거대했다.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던 1929년, 장래가 촉망되던 뉴욕의 연극배우 릴리안 밀리센트 엔트위슬이 다른 사람들처럼 영화계에 뛰어들기 위해 할리우드로 왔다. 그러나 릴리안이 계획했던 일은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1932년 9월 대공황 와중에 그녀는 그 할리우드 광고사인의 ‘H’자에 올라가 투신했다. 그 후 몇 년간 할리우드 간판은 그 자체로 불운의 상징처럼 보였다. 간판은 1978년에 복원됐다. 그동안 할리우드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지금 세계 영화계의 중심지가 됐다. 워너 브라더스, 드림웍스, 유니버설, 폭스 등 메이저 스튜디오의 오피스는 할리우드 드림에 도전하는 배우들의 프로파일이 쌓여 있다.

배두나는 물론 예외적인 경우다. 그녀는 할리우드에 뛰어들 계획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워너 브라더스의 캐스팅 디렉터, 로라 케네디는 뜻하지 않게 007 작전을 벌여야 했다. 감독인 라나 워쇼스키가 그녀가 제안한 루시 리우를 비롯한 중국의 톱 여배우 리스트를 다 제치고 무조건 ‘한국의 배두나’를 찾으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의 것>과 <공기 인형>에 나왔던 그 놀라운 에너지의 소녀를! 중국 프로듀서와 한국 프로듀서, 봉준호 감독을 거쳐 연락이 닿았고, 작년 6월 워쇼스키는 배두나와 스카이프로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데이비드 미첼 원작의 SF 서사극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복제 인간 ‘손미 451’이라는 캐릭터는 두나를 만났다. 그건 어느 한쪽의 전략이나 노력이 아닌 ‘운명’이라고 해야 한다. 박찬욱(<복수는 나의 것>)과 봉준호(<괴물>)와 고레에다 히로카즈(<공기 인형>)의 손에서 손으로 전달된 이 ‘순수한 원석’이 몸 안에 내장된 나침반에 따라 흘러간 필연적인 목적지라고나 할까. 그렇게 배두나라는 퍼즐의 한쪽이 할리우드에서 완성됐다.

시크한 느낌을 주는 블랙 가우초 팬츠와 톱, 레이스업 부츠는 마이클코어스(Michael Kors), 골드 링 귀고리는 지방시(Givenchy Riccardo Tisci).

고급스러운 광택으로 섹시한 느낌을 주는 가죽 패널 드레스와 블랙 가죽 벨트는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 블랙 롱 가죽 장갑은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그리고 며칠 전 선셋대로에 위치한 샤또 마몽에서는(할리우드의 유명인사들만 머무는 곳) 그곳 스위트룸에서 배두나가 <보그> 촬영을 해도 좋다는 레터를 보내왔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헤로인에 대한 극진한 예우였다. 하지만 두나는 보름간의 일정을 위해 할리우드힐 꼭대기에 자리한 작은 집을 선택했다. 일본인 할머니가 주인인 오밀조밀한 별장이었다. 덕분에 <보그> 촬영지도 LA 근교에서 2시간 떨어진 사막으로 결정됐다. 사막으로 떠나기 전날밤, 우리는 시내의 유명 쇼핑몰인 그로브의 파머스 마켓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꽃무늬 셔츠에 헐렁한 배기 팬츠를 입고 납작한 통을 신은 배두나는 혼자 빈티지숍을 어슬렁거리며 커피 그라인더와 양초를 사고 있었다. “오래 해외 생활을 하다 보면, 막 갈아 내린 커피가 간절해져요”라고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언제부턴가 해외 일정엔(영화 촬영을 포함해) 매니저도 없이 혼자서 단출하게 돌아다니는 배두나. “어제까지 호텔에 갇혀 40개가 넘는 해외 인터뷰를 했어요. CNN, 이뉴스, 엑서스 할리우드… 영어로 그 인터뷰를 소화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전생과 후생에 대한 질문부터 여성 혁명에 대한 의견까지. 와우~! 그럴 땐 ‘으흠~’ 하면서 제 파트너 짐 스타게스를 쳐다봐요. 짐은 가만히 기다리다 제가 난처해 하면 천사처럼 말을 받아준답니다.” 그때 휴대폰으로 카톡 문자가 도착했다. “이거 보세요! 벌써 할리우드 액세스 TV 인터뷰를 보고 봉준호 감독님과 사촌언니가 문자를 보내왔네요. 맙소사! 부끄러워요. 기자가 ‘준비됐니? 너한테 곧 할리우드 페임이 들이닥칠 거야’라고 해서 제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예스! 아임 레디! 노노노! 저스트 키딩! 으하하.”

며칠 후부터 시작될 대대적인 북미 개봉 시사회를 비롯해 러시아, 독일, 중국, 일본까지 그녀의 해외 일정은 빠듯했다. “한동안 한국엔 못 들어갈 것 같아요. 전 말하자면 예술가에게 고용 당한 여행자죠.”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그녀가 입을 드레스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토론토영화제에서 입었던 쟈뎅 드 슈에뜨의 점프수트는 매우 쿨했으며, 미국 개봉 시사회에서는 미국 독립 디자이너 의상을 입어도 좋겠다고. 패션에 관심이 많은 그녀는 한국의 스타일리스트에게 전화해서 조언을 구했다. “멋진 드레스를 입고 싶어. 샤넬 꾸뛰르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어.” 배두나에겐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톰 행크스, 수잔 서랜든, 할 베리, 짐 스터게스와 벤 워쇼, 휴고 위빙 등과 시카고에 모여 함께 만든 영화를 보고, 1주년 디너 파티를 하고, 워너 브라더스 전세기를 타고 토론토로 날아가는 스펙터클한 삶이. LA에서 생일을 맞은 그녀를 위해 휴고가 칵테일을 사주고, 톰과 수잔이 유명 인사들의 회원제 클럽인 ‘소호하우스’로 초대하는 일상적인 할리우드 라이프가. 그리고 워쇼스키 감독은 배두나를 자신의 에이전시에 소속시킨 후,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 관계자들에게 적극 소개하고 있다. 이 모든 스토리를 그녀는 내가 꼬치꼬치 캐물어야 마지 못한 듯 이야기한다. 과장이나 자랑을 누구보다 남사스러워 하지만,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만은 기분 좋게 인정했다. “촬영을 시작했던 작년 가을 베를린에서부터 지금까지. 아! 이 사람들이 정말 나를 사랑하고 인정하는구나, 그런 느낌, 정말 행복해요.” 워쇼스키는 그녀의 전폭적인 지지자였다. “처음엔 스태프들의 인종 차별이 분명 있었어요. 게다가 영어도 잘 못하는 애가 와서 뭘 할까… 하는. 그런데 촬영을 시작하고서는 달라졌죠.” <브레이브 하트>와 <가을의 전설>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거장 카메라 감독조차 현장에서 그녀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너 그거 아니? 넌 정말 아름다워.”

데이빗 미첼의 원작과는 달리 한국에 공개된 〈클라우드 아틀라스〉예고편은 <러브, 액추얼리>를 연상시킨다.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500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수직으로 맞춰지는 사랑의 조각, 인생의 퍼즐은 장엄하고 뭉클하다. 19세기 남태평양에서부터 시작해 1930년대 벨기에, 1970년대 미국, 그리고 모든 것이 자본에 의해 조직된 2144년의 한국까지. 동서양과 시대를 가로지르는 숨가쁜 롤러코스터를 타고 태어나고 또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사람들. 톰 행크스와 할 베리, 짐 스터게스와 배두나는 인연의 사슬, 사랑의 사슬에 묶여 이 우주의 나이테에 깊이 뿌리 내린다. “인생은 내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얽혀 있다. 전생, 현생, 후생… 각자가 쌓은 선행과 악행에 따라 다른 생에서 만나고 또 만난다”는 내레이션이 시사하듯, 이 이야기의 핵을 관통하는 것은 ‘숭고한 사랑’이다. 전생을 기억하고 후생을 기약하는, 그렇게 언제 어디서 태어나도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난다,는 로맨틱한 서사시. 이 엄청난 서사의 클라이맥스에 연민을 자아내는 캐릭터 ‘손미 451’-순혈 인간들의 비인간성에 맞서는 복제 인간으로, 순수한 종에서 혁명의 상징으로 변화하며 절절한 사랑을 보여준다-이 있다. 바로 그 신비로운 캐릭터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고 외신들은 평가한다.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감독 중 한 명인 워쇼스키가 내재된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의 감독을 하기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