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배우 맞아요

무려 23년, 연기자로 살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캐릭터를 만난 적이 드물었던 김민정이 코미디영화 <가문의 귀환>에 출연했다. 또래 여배우들이 절대 닿을 수 없는 지점에서, 자신감과 내공이 있기에 가능한 고민을 껴안은 채.





“옛날에는 아이가 뭘 먹는 장면을 CF에 쓸 수 없었대요. 그런데 제가 참 예쁘게 잘 먹는다고 감독님이 그 모습을 찍었어요. 코알라빵을 입에 가져가는 모습은 말고, 오물오물 씹고 있는 모습만요.” 데뷔한 지 23년 된 배우의 시초라니, 너무 오래전 얘기인가? 김민정을 두고 ‘해피 아이’ 아동복이나 <키드캅>에 얽힌 추억을 풀어놓는 건 반칙이다. 아역 배우 출신이면서 현재 커리어가 과거 영예만 못한 성인 배우라면 지난날 에피소드를 들춰내야겠지만. 다만 김민정은 예전과 변함없이(적당히 볼륨 있는 몸매를 제외하고) 보존된 이목구비와 갸름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덕분에 그녀는 훌쩍 커버린 대상을 볼 때의 낯섦을 안겨준 적이 없다. 그녀에게선 아역 스타의 유별난 성장통이 감지되지도 않았다. 매번 작품으로 다시 만날 때면, 과거보다 지금에 더 방점이 찍혀 있던 ‘중견 배우’.

“저는 하라는 대로만 하고 살았어요. 머리를 양 갈래로 땋으라고 하면 양 갈래로만 땋았고, 교복 밑에 신은 양말은 발목 길이를 넘지 않도록 했어요. 수업 시간에 절대 졸지 않았고요.” 어리고 예쁜 스타들은 또래의 시샘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 삶의 방식을 터득하곤 한다.그 방식으로 과도하게 털털한 애티튜드를 취하면서 타인의 경계심을 푸는 법을 익히는 타입이 있다면, 김민정은 모범적이고 은둔형에 가까운 생활로 흐른 타입이다. 그렇게 애써 존재감이 튀지 않도록 살아온 사람이 자기 안으로 일의 에너지를 축적시키면서 한 분야를 오래 파고들었을 때, 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완벽주의자인지는 가까운 사람만이 안다. “네, 연기할 때 저는 완벽주의자예요. 완벽주의자는 예민해지죠. 미치도록 추운 날 야외 촬영을 하는데, 감정이 깨질까봐 외투를 안 입고 그랬어요. 그렇게 저를 혹사시켰어요. 작품 하나 고를 때도 얼마나 까다롭게 골랐는데요. <아일랜드>처럼 인정옥 작가가 있다든지, <음란서생>처럼 석규 형과 최고의 스태프들이 있다든지, 다 이유 있는 작품만 골랐어요. 다작을 하지 않은 것도 제 의도였고요.”

김민정은 작품 속에서 울지 않은 적이 거의 없다. 그녀는 ‘봐주는 사람 눈에야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이라는 전제를 달면서, 자신한테 쉽고 단순한 작품이 한 번도 들어온 적 없다고 했다. <아일랜드>에서처럼 밝아도 슬픈 역이거나, <패션 70s> <뉴하트> <가시나무 새>에서처럼 똑 부러지는 커리어우먼인데 속에 아픔이 있는 역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김민정의 얼굴은 슬픔보다 영롱함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웃는 표정보단 눈을 동그랗게 뜬 표정이 더 눈에 익지만 말이다. 그러나 김민정에게 찢어진 스타킹을 신기고, 터프하지만 무심한 태도로 오늘 사진 촬영에 임해달라고 했을 때, 그저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이 상당히 서정적이라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작가나 감독들이 캐치한 인상도 그 점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김민정의 눈망울을 보면 거기서 꼭 눈물 방울이 떨어져야 이치에 맞다고 여긴 게 아닐까?

자신을 몰아붙이며 일을 하던 완벽주의자는 ‘아픈 이미지’가 결국 자신에게서 비롯된 거라고 판단했다. ‘뭐 이렇게 심각하게 사나’ 하는 마음이 들 무렵, 약간의 변화를 줄 수 있었던 드라마가 11월 초 종영한 tvN <제3병원>이다. 양한방 협진병원 내 신경외과가 배경이었던 의학 드라마. “전공의를 마치는 즉시 사랑에 빠질 계획입니다”라고 스승 김승우에게 고백하는 사랑스러운 의사(다가가기도 차가웠던 <뉴하트>의 의사에 비하면 그저 귀여운), 지상파 드라마보다 느낌이 산뜻한 케이블 드라마는 좀더 깐깐했던 원래의 김민정이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카드’다. 의외의 카드는 이어 등장했다. 어느 날, <제3병원>의 제작사인 태원 엔터테인먼트의 정태원 이사가 건넨 시나리오. <가문의 영광>시리즈 5편인 <가문의 귀환> 시나리오였다. “네?” 김민정의 첫 반응은 이랬다. 이 영화, 총 네 편의 시리즈를 거치면서 관객 1600만 명 이상을 모은 한국 코미디영화의 비밀병기다. 그와 별개로 이런 ‘비밀병기’에 합류하는 배우는 스스로를 설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프랜차이즈영화의 원년 멤버인 유동근과 정준호, 이번 시리즈에 새로 투입된 성동일이 영화에 납득 못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무려 23년’을 연기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캐릭터를 만난 적이 드물었던 김민정은 울지 않아도 되는, 자신을 무방비 상태로 풀어놓을 수 있는 이 영화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어? 꽤 재밌는데?’ 하는 발견도 했다.

“배우에겐 시나리오상에서 캐릭터가 탄탄하게 설계돼 있는 것이 안도감으로 작용하거든요. 하지만 이번 작품에선 인물을 만들어가야했어요. 그러다 보니 제 생각과 감독 생각과 제작자 생각이 다 달랐죠. 그냥, 나를 놨어요.” 그녀는 촬영 현장에서 ‘이게 도대체 뭐지?’ 싶은 상황을 맞을 때마다 치밀한 계획 없이 자신을 놓아두려 했다. 그럴수록 남들은 모르고 자기만 아는 모습이 연기로 배어 나온다는 희열도 느꼈다. “저는 몰랐던 방식인데, 코미디영화는 한 신에 대해서 여러 버전을 찍어요. 보통은 여러 버전을 해도 느낌이 비슷한 수준 내에서 하는데 말이에요. 내가 이것저것 시도를 해봤는데 안 되면, 나중에 감독님이 잘 된 걸 쓰시겠지 했어요.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내가 나에 대해 알아가는 느낌?”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과 재킷에 연출한플라워 모티브의 골드 네크리스는 디올(Dior),터틀넥 시스루톱은 김동순(Kim Dong Soon),슬리브리스톱은 제이미앤벨(Jamie&Bell),쇼츠는 에피타프(Epitaph), 스트랩슈즈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골드 네크리스와 링이 연결된 뱅글은먼데이 에디션(Monday Edition), 골드 링은불가리 세르펜티 컬렉션(Bulgari), 스타킹은아메리칸 어패럴(American Apparel).

김민정은 이미 오래전에 흘러간 아역 배우 시절이 기억 밑바닥에서 굳이 끄집어내지 않는 이상 잘 다가오지 않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경력은 자신도 모르는 새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는 토대일 것이다. 그녀는 일을 그만두고 싶었을 때가 ‘자신만큼 주변이 따라오지 않는 듯한 느낌에 지쳤을 때’라고 했다. “저는 일을 할 때 나를 다 줘요. ‘나는 이만큼 했는데 왜 주변이 이만큼 못 따라와?’라는 생각을 하니까 상황을 탓하게 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어요.” 서른을 갓 넘긴 그 어떤 배우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천성과 관성으로 오랜 시간 동안 연기라는 태양을 보고 온 사람이기에 김민정은 여전히 볼살이 오른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서 농익은 고민을 털어놓는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김민정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내 안에 무수한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곤 했어요. 저란 사람 자체가 워낙 스펙터클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하지만 사람이라면 그렇지 못해요. 그럴 수가 없어요. 저는 그저 많은 캐릭터를 떨쳐내지 못하고 내 안에 꾸역꾸역 쌓아뒀다는 걸 깨달았어요.”



스터드 장식의 트렌치코트는벨앤누보(Bell&Nouveau), 쇼츠는 서리얼벗 나이스(Surreal But Nice), 실버와골드 믹스 링은 까르띠에(Cartier).

그리하여 일만 보고 내달린 중년이 그동안 자신을 보살피는데 소홀했음을 깨닫고 과거를 돌아보듯, 김민정도 그랬다. 김민정이 털어놓는 말들은 대개 ‘과거형’이었다. <아일랜드>의 시연과 <음란서생>의 정빈과 <뉴하트>의 혜석은 있지만, 자연인 김민정은 없더라는 깨달음. 그녀는 작품을 마치고 빈 시간이 주어지면 스스로에게 ‘누구지?’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인인 내가 온전해야 연기자인 나도 잘 갈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연기만 생각하는 게 결국 연기하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이제야 알아버렸어요. 저, 너무 도사처럼 말해요?” 예스. 본연의 자신을 찾자는 마음이 결국 더 좋은 상태로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작동되는 그녀의 머릿속은 지독한 면이 있다. “내가 열심히 했다는 이유로 자꾸 주변을 탓하는 것도 병든 마음이죠. 모든 걸 맘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거, 그게 꽤 파워가 세요. 모든 요인을 내 안으로 돌리면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져요. 여전히 자신 있는 것 하나는 누구보다 이 일을 사랑한다는 거죠. 오로지 그거 하나! 딴 건 없어요!” 프로페셔널한 여배우의 뒷면엔 이렇게 자신을 옭아매던 사정이 있었다. 그래서 김민정이 <가문의 귀환>에 임한다고 했을 때, 그녀를 잘 아는 친구들은 잘된 일, 재밌는 일이라고 북돋워줬다. 대중의 눈과 사적인 김민정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친구들은 평소 김민정이 좀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활동을 하길 바랐다(“너는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예능을 하면 대박날 거야”라고 말해준 친구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저한테 백치미가 있다고 해요. 호호호!” 그리고 김민정은 크고 동그란 눈이 가늘게 찢어지도록 웃었다.

수년 전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보톡스를 맞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단지 주름 있는 배우로 늙고 싶다는 천진한 감상이 아니었다.인위적인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과 더불어 얼굴 근육과 미세한 표정의 중요함을 아는 배우의 마음가짐이었다. 김민정의 매니저는 새삼 김민정이 ‘자연미인’이라는 걸 강조해달라고 했다. 김민정과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매니저는 ‘그래도 코는 손 봤을 것’이라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감동한 모양이다. “이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봐요. ‘아, 다 이유가 있나 보다. 내가 나이 들어도 맞아야 하는 이유가 생길까? 내가 주름이 많아졌을 때 그게 연륜으로 비치면 좋겠지만, 시청자나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면 어쩌지?’하는 생각이요.” 김민정은 결심했다. 마음을 잘 써서, 보톡스를 맞지 않아도 되는 자신을 만들기로. 곱게 잘 나이 드는 삶 말이다. “제가 지금보다 입술이 좀더 얇거나 눈이 좀더 작으면 객관적인 미인의 지표에 해당한다고 해도, 뭐 어떻게 하고픈 마음 역시 없다는 거죠. 자기 얼굴에 불만족하면 어떻게 카메라 앞에 서겠어요? 어릴 적과 크게 변함없는 얼굴로도 작품 따라 성인 연기에 필요한 느낌들을 다르게 낸다면, 그게 배우라는 소리잖아요. 그래서 저는 배우 맞아요. 그게 제 자신감이죠.”

“커지기만 하면 뭐해. 잘 커야지.” 유승호가 CF에서 속삭인 한마디를 김민정은 이미 오래전에 내뱉을 수 있었다. 그녀보다 훨씬 스타 대접을 받는 또래 여배우들이 절대 닿을 수 없는 지점에서, 자신감과 내공이 있기에 가능한 고민을 껴안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