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의 유준상과 오만석

뮤지컬〈레베카〉에서 유준상과 오만석은 비밀스러운 맨덜리 저택의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을 연기한다. 1930년대 영국 상류층 신사 막심 드 윈터로 변신한 두 배우가 레베카의 흔적이 망령처럼 떠도는 그 차가운 집으로 <보그>를 초대했다.

오만석이 입은 회색 솔리드 수트와타이는 모두 갈라테오(Galateo),흰색 셔츠는 니나리치(Nina Ricci),스웨이드 구두는 토즈(Tod’s),시계는 론진(Longines).유준상의 남색 체크 수트는 권오수클래식(Kwonohsoo Classic),프릴 셔츠와 안경, 회중시계는모두 벨앤누보(Bell&Nouveau),갈색 구두는 로크(Loake), 타이는갈라테오, 포켓치프는 니나리치.

짙은 남색 줄무늬 수트는 갈라테오(Galateo), 체크 셔츠는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 와인색 타이는 권오수 클래식(Kwonohsoo Classic), 메탈 시계는 오메가(Omega)여자가 입은 연두색 드레스는 베라 왕(Vera Wang), 리본 장식 검정 펌프스는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골드 목걸이는 블랙 뮤즈(Black Muse), 골드 뱅글은 모두 엠주(Mzuu).

“이 집은 무덤이다. 우리의 공포와 고통이 그 폐허 속에 묻혀 있다. 부활은 없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황량한 절벽 사이를 위태롭게 유영하는 푸른 안개 속 해변 마을. 육지가 끝나는 그곳에 음산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맨덜리 저택이 있다. 뒤 모리에의 소설과 히치콕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레베카〉에서 유준상과 오만석은 이 유서 깊고 비밀스러운 저택의 주인 막심 드 윈터를 연기한다. 그는 <제인 에어>의 로체스터처럼 원죄와도 같은 어두운 과거를 지닌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다. 아름다운 전부인 레베카가 의문의 죽음을 맞은 후, 집 안 곳곳에 남은 그녀의 흔적은 망령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평범한 일상을 공포로 몰아간다. 그리고 어느 겨울 밤, 30년대 영국 상류층 신사로 변신한 두 배우가 <보그>를 전설 속의 맨덜리로 초대했다. 다행히 그들은 막심처럼 괴팍한 타입과는 거리가 멀다.

“레베~에카아~!” 남들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온 유준상은 히말라야에서도 끄떡없을 것 같은 오렌지색 방한 점퍼에 양손을 쿡 찔러 넣고선 틈만 나면 극중 전부인의 이름을 목청껏 외쳐 불렀다. 하루라도 소리를 내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독립 투사처럼, 그는 매니저에게 담배를 부탁할 때조차 뮤지컬처럼 멜로디를 붙여 노래했다. 1998년 뮤지컬<그리스>의 대니 역으로 처음 무대에 오른 유준상은 5~6년 전부터 1년에 한 편씩은 꾸준히 뮤지컬에 출연하고 있다. 뮤지컬을 하는 동안엔 집안에서도 늘 이런 식이다. “이젠 동네 분들도 다 그러려니 이해해줍니다. ‘저 나이에 저렇게 계속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거죠.” 한때는 반상회까지 꼬박꼬박 참여했던 ‘유배우’의 성실성은 분당 주민들 사이에서도 정평이나 있다. 등산화를 신은 한쪽 다리는 테이블 아래로 쭉 편 상태였다. 영화 <전설의 주먹> 촬영 중 무릎 부상을 당해 수술을 받은 다리가 아직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절뚝거리면서도 연습은 한다. “공연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그리스>의 대니, <잭 더 리퍼>의 앤더슨 형사, 이번엔 막심! 언제 이런 외국 이름을 가져보겠어요? 뮤지컬이니까 내가 <삼총사>의 아토스도 될 수 있는 거죠.” 확실히 ‘막심’과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방귀남’은 이름부터 느낌이 확 다르긴 하다.

오만석은 2004년의 대니였다. “안 그래도 어제 준상이 형이 ‘올드 그리스’를 한번 만들어보잔 얘기를 했어요. 옛날에 대니, 로저, 두디 했던 배우들 다 모여서. 되겠어요, 그게? 흐흐. 할 거면 이름을 바꿔야죠. ‘그리스’가 아니라 ‘구림스’로.” 얼마 전, 뮤지컬 <헤드윅>을 끝낸 오만석은 7년 만에 다시 여장을 하고 밴드 앵그리 일인치의 ‘오드윅’이 되느라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했다. 여전히 날카로운 턱 선을 유지하고 있는 그가 록스타 같은 차림으로 들어서자 유준상은 시골 이장 어른 같은 말투로, 한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그 이름 일만 만(萬)자에 돌 석(石)자, “만석아~”를 연거푸 불러가며 반가움을 표했다. 두 사람은 2008년 뮤지컬<즐거운 인생>에서 연출가와 배우로 만난 적이 있다. 오만석의 연출 데뷔작이었다. 우연하게도 당시 공연장 역시 이번 작품과 같은 충무 아트홀이다. 연습실은 물론, 밤새 작품에 대한 열정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던 공연장 뒷골목의 닭발집, 곱창집, 순댓국집까지 모두 추억이 깃든 장소들이다. “요즘 연습하면서 그때 얘기를 많이 해요.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만석이가 연출도 워낙 잘해요.” 뮤지컬계 후배들이라면 무조건 지갑과 마음을 열어젖히는 유준상은 연출가로서의 오만석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는다. 배우로서 함께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류정한까지 세 사람이 막심역에 캐스팅됐다.

밝은 회색 체크무늬 수트와 셔츠는 모두 권오수 클래식(Kwonohsoo Classic), 타이는 갈라테오(Galateo), 포켓치프는 라피규라(La Figura), 회중시계는 벨앤누보(Bell&Nouveau).문 앞에 선 여자의 붉은색 드레스는 베라 왕(Vera Wang), 볼드한 실버 반지는 블랙뮤즈(Blackmuse)와 벨앤누보.

오만석이 입은 흰색 턱시도와핀턱 셔츠는 모두 구찌(Gucci),검정 몽크 스트랩 구두는로크(Loake), 짙은 회색 니트타이는 반하트 디 알바자(Vanhartdi Albazar), 메탈 시계는오메가(Omega), 동그란 안경은벨앤누보(Bell&Nouveau).유준상의 검정 수트와타이는 라피규라(La Figura),줄무늬 턱시도 셔츠는 권오수클래식(Kwonohsoo Classic),검은색 구두는 프라다(Prada).두 사람 사이에 앉은여자의 검정 드레스는비바탐탐(Vivatamtam), 펌프스는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Ferragamo), 레이스 장갑은제이미앤벨(Jamie&Bell).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간 지 3주. 오만석의 말에 따르면 현재까지의 에이스는 유준상이다. “사실, 저희가 조약을 맺었거든요. ‘누구 하나 특출나게 잘하기 없기’라는 발언을 준상이 형이 했는데, 약속을 깨고 제일 먼저 가사와 음을 외우고 연습도 가장 열심히 하더니, 혼자 에이스가 됐어요. 우린 뒤에서 준상이 형의 열연을 보며 쫓아가는 입장이죠.” 엄살 섞인 푸념을 늘어놓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시절부터 오만석은 알아주는 노력파였다. 2000년 연극 <이(爾)>의 공길 역으로 남자 신인 연기상을 수상하고, 2005년 조승우와 함께 출연한 <헤드윅>에서 오만석의 시대를 예고한 그는 드라마 <포도밭 그 사나이>로 대중적 인지도를 쌓았다. 한 번도 연기를 쉰 적이 없다. “지금 하라면 다시 못할 것 같아요. 〈포도밭 그 사나이>를 할 땐, 밤새 충북 영동에서 촬영을 하고 낮엔 서울의 극장에서 <김종욱 찾기> 공연을 했어요. 스케줄이 꼬이는 바람에 하루에 두 개의 공연을 했던 기억도 나요. 낮엔 동숭아트센터에서 대니를 연기하고, 저녁엔 정동극장에서 공길이 되었죠.” 배우로서 안정적 궤도에 오른 요즘의 그는 전보다 한결 유쾌하고 편안해 보였다.

“드디어 레베카의 얼굴을 보게 되는군요!” 오만석이 메이크업을 하는 동안, 어딘가에서 혼자 비빔밥을 먹고 정확한 타이밍에 세트장으로 돌아온 유준상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모델을 보고 “비로소 레베카의 이미지가 확실히 잡히는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사실, 영화나 뮤지컬에서 레베카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만 그녀의 미모와 교양, 명성이 칭송되고, 침실과 서재, 거실, 발코니, 집 안 곳곳에 남은 존재감으로 맨덜린 저택과 막심을 지배할 뿐이다. 그를 구원할 수 있는 건 극중 화자가 되는 막심의 어린 연인 ‘나(I)’뿐이다. 막심이 이 새로운 사랑을 만난 건 몬테카를로라는 지중해 연안의 휴양 도시를 여행할 때였다. 유준상은 실제로 그 이국적인 장소에 가보았다. “10여 년 전, 니스를 여행한 적이 있어요. 존경하는 샤갈 선생님을 찾아 거기까지 간 거죠. 그 해안가 너머가 칸이라고 들었는데, 거긴 영화로 가야지 싶어 대신 옆에 있는 몬테카를로에 갔죠.” 이후,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며 세 차례나 칸의 레드 카펫을 밟은 그는 그때마다 몬테카를로를 다시 여행했다. “누구와도 금세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그런 낭만적인 해변이겠죠?” 소설이나 뮤지컬 대본에서 묘사되는 그곳의 실제 분위기가 궁금해 호들갑을 떨며 그에게 물었다. “그렇진 않습니다. 지금은 21세기니까요.” 그 소설이 쓰여진 건 1938년이었다. 하지만 얼마든지 상상은 할 수 있다. 유준상은 ‘좋은 연기를 위해 항상 좋은 상상 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고 말해왔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첫 책 <행복의 발명>에서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보여줬다면, 요즘은 전시를 위해 그 그림들에 색을 칠하고 있다. 열 손가락이 알록달록해지도록 파스텔을 손으로 문질러 가며 작업하는 중이다. 12월 12일부터 열리는 아시아 아트페어에 작가로 초대받은 그는 그림 외에 애니메이션 설치 작품도 하나 준비했다. “보여드릴게요.” 휴대폰에 담긴 사랑스럽고 깜찍한 4분짜리 영상 작품의 제목은 ‘Making Room’, 부제는 ‘Memories of Happiness’. 마시멜로처럼 새하얀 주인공이 놀이동산을 만들어가는 동안 잔잔하게 흐르는 귀여운 음악도 직접 작곡했다. 전시장엔 오토바이 헬멧을 개조한 헤드폰이 함께 설치돼 파란 헬멧을 눌러쓰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역시 그의 아이디어다. “전시가 끝나면 집으로 가져가 보관하려고요. 아이들이 좋아할 거예요.” 드라마 <각시탈>에 빠져 한동안 각시탈을 쓰고 돌아다녔던 둘째 아들 ‘시탈이’는 요즘 자기 몸에 파란색을 칠해달라고 야단이란다. 이번엔 ‘헐크’다. 두 아들을 위해 애니메이션 <잠베지아>의 더빙에 참여한 아빠 역시 만만치 않다, “아빠 새와 제가 한 인물이 돼 0.01초까지 입을 맞춰야 하니까, 하늘을 나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양손이 막 이렇게 올라가는 거예요. 그게 또 너무 재미있었어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그는 두 팔을 벌려 날개처럼 펄럭거렸다. 아이들은 동요 대신 〈삼총사>의 ‘All for Love’를 참새처럼 합창한다고 했다. 부전자전이다.

오만석에겐 열한 살짜리 딸이 있다. “유치원 때부터 5년째 발레를 하고 있는데, 제 딸이지만 얼굴도 예쁘고, 어릴 때부터 발레를 해서 그런지 신체 비율도 좋고, 몸의 움직임도 뛰어나요. 오늘도 발레 콩쿠르에 나간다고 연습을 하고 왔어요.” ‘딸바보’ 오만석 역시 현대 무용가 안애순의 추천으로 평양에서 가극을 하고, 독일의 무용 축제에도 참여한 바 있다. 한때는 일본 파파 타라후마라 무용단에서도 활동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180도 다리 찢기를 선보이는 ‘불혹의 손연재’ 유준상만큼의 다재다능함은 아닐지라도 오만석 역시 여느 배우들과는 다르다. <헤드윅>의 음악감독이자 기타리스트 이준과 <즐거운 인생>을 작업할 때는 직접 작사를 했고, 연출가로서 꾸준히 작품 수도 쌓아가고 있다. 월요일엔 뮤지컬 배우들의 축구 클럽 ‘마스트’의 선수로, 주말엔 연예인 야구단 ‘플레이보이즈’의 우익수로 종횡무진하며, 올 초엔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함께 출연했던 정선희는 “오만석의 끼는 방송에서 아직 1%도 드러나지 않았다” 는 말로 그의 예능감을 높이 샀다.

물론 두 사람의 가장 큰 공통점은 뮤지컬에 대한 열정이다. “힘 닿는 데까지 뮤지컬을 할 겁니다. 뮤지컬에서도 섬세한 연기가 가능하단 걸 보여주고 싶거든요.” 엉뚱한 몽상가와 젠틀맨의 두 얼굴을 오가는 유준상이 이번엔 진지한 배우의 자세로 말했다. 그는 스스로 자기 삶의 연출자가 되어 한 편의 뮤지컬 같은 일상을 만들어간다. 그 속에서 우러나온 연기는 담백하고 산뜻하다. 반면, 오만석은 아주 진하고 뜨겁다. 그는 캐릭터에 완벽히 몰입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린다.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 같은 역할은 연륜이 쌓일수록 훨씬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죠. 그래서 기회가 와도 꾹 참고 있어요. 더 깊어지는 나이가 되길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런 그가 이번 작품을 택한 이유는 막심이 부르는 한 곡의 노래 때문이다. 스케줄상의 적절한 타이밍이나 탄탄한 원작, 연출자가 <엘자자벳〉,<황태자 루돌프> 등으로 유명한 로버트 요한슨이란 사실은 그 이후의 문제다. 유준상 역시 이 노래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2막에서 6분 가까이 이어지는 솔로 곡을 통해 막심은 맨덜리 저택의 비밀과 레베카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고백한다. <레베카>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그 장면 하나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극의 성패가 갈린다. “욕을 먹든 칭찬을 받든 둘 중 하나일 거예요. 중간은 없어요.” 오만석이 말했다. 그 노래의 제목은 ‘칼날처럼 찬 웃음’ 이다. 바로 그순간,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칼아아아알~!” 그러고는 정적. “자, 여기까지만 들려드릴게요. 흐흐.” 역시 에이스 유준상이다. 딱 한 단어 ‘칼’을 제외한 나머지가 궁금하다면, 공연장을 찾는 수밖에. 수수께끼로 가득한 맨덜리 저택의 문은 오는 1월 12일에 열릴 예정이다. 막심은 벌써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