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류승룡

마력의 카사노바와 묵직한 킹 메이커를 거쳐, 이번엔 여섯 살 지능을 가진 아버지다. 배우로서의 재능을 새삼 환기할 수 있는 영화〈7번 방의 선물〉이 세상에 나오면, 2013년엔 꽁꽁 숨어 촬영장에서만 살 거라는 류승룡을 만났다.

버건디 코트는 에르메스(Hermès),레드 패턴 팬츠는 구찌(Gucci), 머플러는마시모 두띠(Massimo Dutti), 브라운 부츠는토즈(Tod’s), 행커치프에 연출한 안경은올리버 골드 스미스(Oliver Goldsmith).

브라운 카디건은 마시모 두띠(MassimoDutti), 레이어드한 프린트 카디건은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스카프는구찌(Gucci).

‘2012년의 한국 배우’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어김없이 류승룡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킹 메이커 허균과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카사노바 장성기, 단 두 역할로(11월 말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가디언즈>의 목소리 출연을 제외하고) 류승룡은 한국 영화계에 또렷한 인장을 새겼다. <보그> 2012년 8월호 남자 배우 특집에 등장한 그를 몇 개월 만에 다시 찾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화계 안팎의 사람들 모두가 체감하는 배우로서의 그 뜨거운 온도에 대해 감탄하자, 류승룡이 화답했다. “얼마나 뜨거운지 한번 만져봐요!”

지금 그는 자연인 류승룡의 유쾌 통쾌함과 신작 <7번 방의 선물>의 용구에서 막 빠져 나온 뒤의 여운을 머금은 상태다. 마력의 카사노바와 묵직한 킹 메이커를 거쳐 그가 만난 인물은 여섯 살 지능을 가진 ‘딸 바보’.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 순박한 류승룡을 상상하다 보면, 역으로 테스토스테론과 페로몬 넘쳤던 스크린의 류승룡이 떠오른다. <최종병기 활>의 청나라 장수 쥬신타와 <시크릿>의 건달 재칼이 보여준 ‘쎈’얼굴은 깊게 각인되어 잊혀지지도 않는다. “그런 연기는 사실 배우가 하기 쉬운 겁니다. 외형적으로 만들면 되는 역이잖아요. 강수연, 조민수, 진희경, 박지영 선배는 <최종병기 활>을 보고 나서 글쎄, 저와 멜로를 하고 싶다고 그러더군요.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쥬신타는 전쟁만 아니었으면 아주 가정적이고 와이프한테 잘해주는 남자일 거라고 저도 상상했어요. 연륜 있는 여자들은 그런 연상을 할 줄 알죠.” 류승룡은 <내 아내의 모든 것> 이전까지 작품을 선택할 수 있다기보다 선택 받는 입장이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선한 주연에 반하는 안타고니스트, 카리스마있는 악역을 기대하는 웬만한 시나리오가 다 그에게 들어왔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을 할 때 사람들을 깜짝 놀래키고 싶어서 이를 악물었어요. 작정하고 임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 카드 하나를 쓴 거죠, 못 보여준게 많았으니까. 그렇게 높아진 관객들의 기대치를 <광해>에선 확실히 낮춰주고 싶었습니다. 미션은 오직 하나였어요, 정중동. 이병헌의 영화에서 나는 그저 공기만을 조성하는 것. 그 다음으로 배우 류승룡을 환기할 수 있는 선택이 <7번 방의 선물>이에요.”

류승룡의 최근 필모그래피를 짚어보면 그가 얼마나 신이 났을지 짐작할 수 있다. 방사형으로 넘나들며 역량을 뽐낼 수 있는 캐릭터들, 그건 준비된 배우에게 하나하나 깔린 레드 카펫이었다. 모든 준비된 배우가 자기 뜻대로 정교하게 필모그래피를 꾸려갈 수 없는 현실에서 류승룡은 드디어 운이 트인 셈이다. 그 궤적이 없었다면, 성인의 육체로 여섯 살 지능에 멈춰버린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쉽게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7번 방의 선물>에서 그는 자신의 정신 연령만큼 자란 어린 딸과 한시도 떨어져 살 수 없는 아빠, 용구다. 용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된다면? ‘신입’을 맞은 교도소 7번 방의 동료들은 이 골치 아픈 인물을 두고 그의 딸아이를 사수하기 위해 사상 초유의 합동 작전을 벌인다. 감옥에서 매일 등교하는 어린아이와 ‘상태가 좋지 않은’ 아빠, 교도소 패밀리가 그려가는 휴먼 코미디. 7번 방의 주변으로 오달수, 김정태, 박원상, 정진영 등이 합세했다.

류승룡은 이번에도 작정했다. “할리우드에는 <포레스트 검프>나 <아이 엠 샘>이 있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왜 영구, 맹구, 기봉이만 남는 거죠? 정신 연령이 낮은 인물을 연기할 때 과장하고 희화화하는 일이 참 마음에 안 들었어요. 흔히 바보, 병신, 쪼다로 부를 법한 인물 묘사는 싫습니다.” 그는 이러한 자기 마음 중 일부를 사명감이라고 표현한다. 류승룡의 첫 멜로 상대는 드라마 <개인의 취향>의 이민호였다. 기존의 캐릭터 묘사에 반감을 가졌던 마음은 그때도 있었다. ‘왜 드라마에 등장하는 게이들은 우스운 제스처를 취하면서 이상한 말투를 쓰는가.’ 그는 멋진, 더 남자다운, 하지만 일부는 소녀 같은 감성을 가진 인물을 설정했다(<개인의 취향> 이후 류승룡에겐 인권 관련 단체의 감사 인사와 ‘명예 게이’ 훈장을 주고 싶다는 요청 등이 밀려왔다. 연기는 연기일 뿐이기에 다 사양했다). 재미 없는 고정관념 따위를 벗어난 묘사가 어떤 이들에게 온기 있는 영향을 미치기도 할 때, 그 사실은 배우의 사명감으로 발전한다. <7번 방의 선물>의 용구 앞에서 류승룡은 ‘바보’가 아닌, 오염되지 않은 인물을 떠올렸다. 그 인간됨이 용구 같은 가족을 가진 사람들과 관객에게 힐링 효과를 안겨주길 바라면서.

민트 컬러 재킷과 셔츠, 스카프,베이지 컬러 팬츠는 모두 구찌(Gucci), 브라운 슈즈는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

영화 제작부가 찾아낸 일산의 한 유기농 빵공장은 용구 같은 인물들이 모여 꾸려가는 곳이었다. 류승룡은 공장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런 사람들이 다 순수할 거라고 기대하는 것도 편견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정신이 멀쩡한 사람도 각양각색이듯, 마찬가지예요. 못된 아이들, 막 때리는 아이들 때문에 무서운 순간도 있었어요.” 그 중 웅이라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수영 선수로 활동한 적 있는 밝은 아이다. “용구도 딸 때문에 늘 기분이 좋은 상태거든요. 웅이를 지켜보기로 했어요.” 첫마디를 터뜨리기까진 감질 나지만, 한번 터지면 빨리 쏟아내는 말투. 문장의 순서가 뒤죽박죽인 도치법과 억양 등. 각각 여덟 살과 다섯 살인 류승룡의 두 아들도 관찰 대상이었다. 영화 속에선 딸만 바라보는 아빠지만, 실은 그 딸의 보호를 받는 어린 아빠를 연기하기 위해선 현실의 아들들이 레퍼런스가 된다. “여자 아이들은 유치원 갈 나이만 되도 새침하고 여우처럼 변하죠. 남자 아이들은 그냥 강아지 같아요. 그래도 내가 정말 때릴지 안 때릴지는 귀신같이 알지. 겁만 줄 땐 눈 부릅뜨고 날 보다가 무섭게 혼내려고 하면 으아아아앙, 헉, 헉, 헉 하고 숨 넘어간다니까요.” 류승룡의 두 아들, ‘레퍼런스’를 위해 일부러 눈물 빼내고 갑자기 간질이기도 하는 아버지를 몇 달 동안 견디느라 애 좀 썼다.

“이용구 1961년 1월 18일 태어났어요. 제왕절개. 엄마 아팠어요 내 머리 커서.” 류승룡이 극중 대사를 읊었다. 인기 많은 자신이 얼마나 뜨거운지 만져보라며 박명수 식으로 소리치던 류승룡은 촬영 중간중간 영화 속 인물의 것으로 짐작되는 말투를 흘렸다. 농담 따먹기 하다가도 슛 소리와 함께 캐릭터로 전환하는 배우와 생활 속에서 캐릭터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배우가 있다. 류승룡은 후자였다. 그래야 연기 같은 연기 대신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촬영은 두 달 전에 끝났지만, 아직 영화 개봉도 안 한 상태에서 용구와 완전한 작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촬영 기간 동안 평상시에도 용구의 언어를 잘 썼죠. 배고파, 밥줘요 밥, 콩먹어, 입벌려…. 현장에선 앉아 쉴 때도 낚시용 의자에 쪼그리고 앉았어요. 내가 연기할 인물은 다리 벌리고 편히 앉아 있는 모드와 어울리지 않거든요.” 이런 정서와 캐릭터의 천진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물론 주변의 협조가 필요하다. 오달수는 류승룡을 만나면 이렇게 인사했다. “용구 왔어? 밥 먹었어 섀끼?”

오달수를 비롯해 좋은 시나리오를 보고 모여든 천군만마를 두고 영화가 개봉할 때쯤이면 ‘명품 조연들’ 운운하는 기사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배우를 명품으로 정의하는 그 나쁘지 않은 의도가 오래전에 식상해진 만큼, ‘명품 조연’으로 호칭되는 배우들이 그 점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충분히 알 때다. 이 표현을 두고 정색하는 류승용에게 말해줬다. “그래서 대체 용어가 태어났죠, 일명 ‘신 스틸러’라던데요?” 류승용은 여전히 정색했다. “신을 왜 훔쳐요! 그건 도둑놈이지. 차라리 ‘심(心)스틸러’라고 부릅시다. 마음을 훔치는 배우, 그게 낫겠어요.” 류승룡은 5회 차 촬영이 전부인 영화 <고지전> 촬영장에서도 현장 분위기를 띄우는 인물이었다. ‘원 톱 배우’로 부상하는 자의 사명감과 상관없이 ‘하던대로 하자’가 그의 신조다. “현정화 씨가 말했어요, 찬스 볼이 들어왔을 때 실패할 확률이 90%라고. 안 그러던 사람이 뭔가 잘해보려고 애쓰면 문제가 생겨요.” 그는 최근 영화제에서 상을 많이 받아 좋겠다는 칭찬을 들을 때면, 집에 트로피 놔둘 자리가 더 없다는 식으로 상황을 넘긴다. 그런 소리 말고 다른 얘기 하자는 뜻이다. “마냥 허허실실 거리는 타입은 아닙니다. 가끔은 의도적으로 상황을 다소 심각하게 만들죠. 모두가 긴장해야 할 때도 있거든요. 제가 반장을 오래해서 민심을 잘 읽습니다.”

류승룡을 만난 날, 그는 다음 작품인 <명량-회오리 바다>를 위한 첫 움직임에 들어간 시점이었다. 아이의 마음으로 감정 노동에 시달렸던 그가 다시 카리스마 있는 왜장 역할에 발을 담글 차례다. “영화에 한번 발을 들이면 쑥 들어가는 편입니다. 용구를 하면서 예민하고 힘들었죠. 채우고 비우길 반복해야 하는 배우에겐 삶의 평범한 가치가 더욱 중요해져요. 적금 붓고, 청약 당첨돼서 아파트 입성하고, 평수 늘려가고, 휴가 맞춰서 간신히 가족들과 여행가는 그런 즐거움 말이에요. 아내가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텃밭에서 신선초, 겨자, 토마토, 부추, 쑥갓, 상추 등을 키우는 것도 남편 몫이죠.” 류승룡이 평범함과 평정심을 강조하며 지금의 시기를 자연스럽게 보내고 있을 때, 류승룡을 제외한 주변은 부산한 마음으로 그를 찾는다. 얼마 전 그의 스타일리스트는 류승룡의 집에 가 배우의 품격에 맞도록 옷장을 정리했다. 텃밭에서 일할 때 입으면 좋을 법한 옷들, 하지만 태그도 제거하지 않은 채 옷장에 몇 년을 처박아뒀던 아이템들이 드디어 의류 재활용함으로 향했다(류승룡이 벌벌 떨 때, 아내와 스타일리스트만이 후련해 했다고). 그는 친구 이병헌의 영화<레드 2> 촬영 현장에 가 할리우드 시스템의 단면도 봤고, 개그감 충만한 새 얼굴을 찾은 연예오락 프로그램들은 여전히 그에게 프러포즈 중이다. 그는 그렇게 되길 바라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다 금방 지나갈 것’이라고 했다.

2013년 한 해 동안에는 꽁꽁 숨어 촬영만 하며 보낼 생각이다. “그럼 다 잊혀지게 돼 있습니다. 나는 살던 대로 살면서, 한편으로 마음의 준비도 할 필요가 있죠.” 류승룡이 다시 촬영장으로 숨어 들어가기 전, 유난히 추운 이 겨울의 새해 선물이 되길 바라는 영화를 남겨 다행이다. 그는 이 말도 남겼다. “난리 날 거예요. ‘저 배우의 스펙트럼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다들 놀라시겠지.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