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남자 이야기

세계적인 아티스트 박찬욱 박찬경 감독과 배우 송강호가 창조한 18분짜리 단편영화〈청출어람〉이 영화계와 패션계에 우아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코오롱스포츠 40주년 기념 필름 프로젝트 ‘Way to Nature’의 첫 포문을 연, 이 거친 매력의 세 남자를〈보그〉가 만났다.



처음 코오롱스포츠의 필름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을 들은 건 광고대행사 모그인터렉티브 홍보 담당자를 통해서였다. 영화계에서 오래 일했던 그녀는 패션과 영화가 만나는 이 기념비적인 모먼트를 흥분된 목소리로 전했다. “유명 감독들이 기업과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건 세계적인 트렌드잖아요.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멋진 프로젝트의 돛이 올랐어요. 코오롱 40주년 기념 필름 프로젝트의 첫 번째 스타트는 박찬욱, 박찬경 감독이에요. 이어 봉준호, 김지운 감독이 셋업돼 있어요. 감독들은 ‘Way to Nature’란 주제로 자유롭게 크리에이티브를 펼칠 거예요. 며칠 뒤 박찬욱 감독이 배우 송강호와 경주에서 촬영을 시작하는데 <보그>가 함께 동행하면 어떻겠어요?”

나는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바즈 루어만이 니콜 키드만과 관능적인 샤넬 광고를 촬영하고, 가이 리치, 왕자웨이, 토니 스콧 감독이 BMW의 단편영화를 만든 것처럼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감독과 기업의 콜라보레이션 시즌이 열린 것이다. 게다가 라인업이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이라니! 그들은 얼마 전 할리우드에 스카우트돼 영화 촬영을 마친 최고의 감독들이며, 2013년은 그들의 할리우드 데뷔작 <스토커> <라스트 스탠드> <설국열차>가 차례로 개봉되는, 그야말로 뜨거운 한 해가될 것이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촬영 신과 회차 등이 꽉 짜여진 정교한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온갖 고충을 겪은 세 감독들은 ‘한국이야말로 감독이 왕인 나라’라고 치하했다는데.

‘Way to Nature’라는 컨셉만 공유한 채 모든 것을 감독의 재량에 맡기겠다는 코오롱스포츠의 제안은 감독에게나 관객에게나 ‘청량한 틈새’를 열어줄 게 분명했다. 어쨌든 <보그>는 <청출어람>이라 명명된 코오롱의 첫 번째 필름 프로젝트 작업을 마친 세 남자, 박찬욱 박찬경 송강호를 인터뷰하는 것으로 취재의 윤곽을 잡았다. 박찬욱, 박찬경, 송강호. 이 세 사람의 조합만으로 스펙터클한 에너지가 육박해온다. 박찬욱은 니콜 키드먼과 함께한 영화 <스토커>로, 박찬경은 최근 에르메스에서 전시한 무속을 소재로 한 미디어 아트 <KW. 콤플렉스>로, 송강호는 영화 <설국열차>와 <관상>으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으니.

더욱이 감독인 박찬욱과 미디어 아티스트인 박찬경 형제는 이미 ‘Parking Chance’라는 프로젝트 듀오로 활동하고 있으며, <청출어람>은 그들의 세 번째 공동 연출작이다.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그들의 첫 번째 영화 <파란만장>은 베를린 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에 진출했고, 두 번째 공동 연출작인 <씨네21> 디지털 매거진 홍보 영상인 <오달슬로우>는 기상천외한 유머로 장안의 화제가 됐다. 그리고 배우로서 이 프로젝트의 ‘밝은 점’이 된 송강호는 박찬욱과의 첫 번째 작업 <공동경비 구역 JSA> 이후 최근작 <박쥐>까지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는 예술적 동지였다.



말하자면 <청출어람>은 영화계와 패션계의 신뢰를 바탕으로 형제애와 동지애가 시너지를 이룬 최고의 하모니라 할 수 있다. 과묵함과 유머를 동시에 구사하는 영화계의 젠틀맨 박찬욱은 “동생과 같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언제든 하고 싶다”고 말문을 열었다. “나는 항상 영화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는 것을 좋아했어요. 공포영화의 놀람도 있지만, <올드보이>나 <박쥐>처럼 반전으로 포장해서 순간순간 작은 놀라움으로 연속된 영화를 만들고 싶었죠. 관습대로 가는 건 게으름이라고 생각해요. 배우의 감정도, 상황도 예상밖으로 흘러갈 때 예술가로서 쾌감을 느껴요. 코오롱스포츠의 ‘Way to Nature’는 폭넓은 개념인데, 저는 자연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죽음’이라고 생각했어요.”

<청출어람>은 소리꾼 노인과 어린 제자의 하루 낮 동안의 여행을 담은 스토리다. 카메라는 경주의 대자연을 훑고 백발 노인 송강호와 신인 전효정은 판소리로 대화를 이어간다. 이야기만 들으면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의 한 장면이 떠오르겠지만, 영화는 소녀가 소리 연습을 위해 절벽 위에서 꺼내는 티타늄 소재의 휴대용 북만큼이나 엉뚱하고 유머러스하다. ‘명창’ 송강호가 북을 치며 뻐꾸기 소리를 내자 산에 사는 뻐꾸기가 화답을 하고, 마침내 호흡의 기운을 다한 노인이 북 위에 엎드리자 소녀는 자신이 입은 다운 점퍼를 덮어주고 떠난다. 카메라는 천공의 새를 유유히 비추다 불현듯 마이크로 뷰로 노인을 덮은 옷의 깃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소녀는 새가 되어 날아가고 마치 자기 깃털로 스승을 덮어준 것 같은 의미죠. 다운 점퍼가 노인의 몸을 따스하게 보호하는 자연의 수의가 되길 바랐어요.” 박찬욱은 철학자다운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이 프로젝트에서 박찬욱과 박찬경과 송강호의 역할 분담은 매우 분명했다. 박찬경이 영화에 예술적인 밑그림을 그리고, 박찬욱은 그것에 전류가 흐르게 했으며, 송강호가 심장을 달아 펄떡거리게 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정말 ‘찬스’였어요. 예산에 구애 받지 않고 작업했고, 작가들의 독립성도 철저히 보장됐습니다.” 대중의 반응을 생생하게 접할 수 없는 미술계와는 달리 인터넷을 통해 대대적으로 공개되는 ‘커머셜 아트’는 미디어 아티스트 박찬경에게 그 자체로 소통의 매력이 있다. 박찬경은 새 소리로 자연과 대화했다던 판소리 명창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이 스토리를 만들었다. “스포츠웨어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리, 그리고 매우 포에틱한 반전… 억압과 금기를 싫어하는 저희 형제의 유머 감각이 그렇게 완성됐어요.”

한편, ‘노인’ 역에 송강호가 캐스팅되면서 대자연의 위엄을 담은 영화는 낄낄거리는 웃음까지 담게 됐다. 탐 크루즈가 절벽에 매달린 아슬아슬한 <미션 임파서블>이나 최민식이 노인으로 방랑하던 구도자적인 <취화선>과는 다른, 대자연과 공생하는 ‘생경한’ 캐릭터의 돌출. 카리스마 넘치는 송강호가 백발 노인으로 분해 경주의 남산을 걷는 모습은 ‘Parking Chance’의 절묘한 ‘Back Parking’이라고 할 수 있다.

“<JSA>로 박찬욱 감독과 만나 <박쥐>까지 작업을 했어요. 박 감독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제게 있어요. 그런데 영화 <관상> 촬영 중에 그가 코오롱스포츠와 단편 작업을 한다는 말을 듣고 구미가 당겼죠. 그런 작업은 15초 스팟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근사한 프로젝트가 될 수 있죠. 그래서 프로듀서한테 말을 흘렸어요. 무슨 얘기를 그릴지 모르고, 젊은 모델을 쓰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나를 한번 써라(웃음).” 조인성, 원빈 같은 젊고 잘생긴 배우들이 핫한 아웃도어 룩의 모델이란 사실도 송강호를 자극했다. 패션과 협력하는 것을 민망하게 생각하는 원칙주의자 남자 배우를 많이 봤기 때문에, 송강호의 이런 유연한 반응은 매우 흥미로웠다. 박찬욱은 송강호에게 말했다. “노인이 나오는 건데 괜찮겠냐? 나중에 나를 원망할까 두렵다. 그래도 하겠다면 나야 좋지.”

이렇게 세 남자는 3일 동안 경주 남산으로 떠났고, 짧은 겨울 해가 떠 있는 낮 동안 촬영했으며, 마치 함께 캠핑을 떠난 남자들처럼 서로를 믿고 서로의 능력에 감탄했다. 아트와 커머셜의 경계에서 예술가의 품위를 지키며 기능적 메시지도 놓치지 않으려는 세 남자의 야심은 아름다웠다. ‘어디든 올라간다, 땀도 잘 흡수한다, 덮으면 따뜻하다’는 아웃도어 룩의 존재 이유가 필름 안에 이토록 고요하게 스며들다니. 나는 그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독창적인 영화 예술가의 자질이라든가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지닌 아름답고 비정한 이치에 대해. 몸집이 크고 선비의 애티튜드를 지닌 박찬경은 모든 이야기를 겸손하고 진지한 자세로 전했고, 송강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업다운이 급한 목소리로 고조된 분위기를 주도했으며, 박찬욱은 클래식 수트에 어울리는 여유있는 미소와 모든 상황을 지휘하는 총사령관다운 권위로 조용하고 섹시한 매력을 풍겼다.



“어릴 때 형과 저는 작은 방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저는 미술을, 형은 영상을 했는데, 제가 미디어 아트 쪽을 하면서 기회가 되면 함께하자는 약속을 했어요. 제 취향도 형처럼 하드보일드 아이러니입니다. 어두운 것을 좋아하고 감상적인 것을 경계하죠. 금기와 억압을 싫어한다는 점에서도 우린 닮았어요. <JSA>도 분단의 억압을 깨는 유머로 영화산업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잖아요. 예술가에겐 금기가 곧 어마어마한 금광이지요.” 박찬경은 형이 지닌 바로크적이고 화려한 스케일 때문에 <올드보이>와 <박쥐>를 가장 좋아한다. 박찬욱은 동생이 지닌 무속과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을 앞으로도 계속 흡수하고 싶어 한다. 언제나 ‘죄와 구원’이라는 가톨릭적 세계관으로부터 영화를 착상했던 박찬욱은 동생과의 첫 번째 협업인 <파란만장>을 통해 한국의 무속신앙과 조우한 경험이 있다. 나는 그것이 박찬욱의 예술가적인 호기심인지, 핏줄을 나눈 형제애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전통 문화가 ‘Parking Chance’의 나침반이 될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피터 그리너웨이나 데이비드 린치, 그리고 차이밍량과 아핏차퐁 위라세타쿤도 그런 시어터와 뮤지엄, 혹은 사진과 영화의 경계를 딱히 가를 수 없는 작업들을 해왔으니까.

송강호는 박찬욱 감독에 대한 존경심을 과장 없는 어조로 이야기한다. “<박쥐> 같은 작품을 할 때는 정말 배우로서 신이 나요. 일상에서 접할 수 없는 주제와 이미지를 만나면 배우는 신이 안 날 수가 없어요.” 일련의 ‘참사’를 다룬 합작 중 어린아이의 유괴와 사적인 복수를 그린 <복수는 나의 것>은 박찬욱과 송강호가 작업했던 영화 중 가장 하드보일드한 작품으로, 그들은 종종 그것을 저주 받은 걸작이라고 불렀다. 박찬욱이 확립한 영화의 윤리학은 ‘분노와 모호함을 처리하는 지적인 능력’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해 송강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동의했다. “이 양반이 만든 영화는 무정하지만 이 양반의 세계관은 대단히 낙천적이에요. 난 집착하고 화를 내고 연연해 하고 폭발하는데… 이 분은 늘 침착하죠. 정말 경이로워요.” “나는 둔감한 편이에요. 내 낙천성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천성적으로 안달복달하지 않아요.”

박찬욱의 태도는 언제나 초연하다. 송강호는 날선 면도날 같은 감수성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그런 치열함이 때론 공허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무기력하다는 것과는 다른 좀 무감각해지는 지점으로 가고 싶달까요. 이게 박찬욱의 경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득음의 경지 같은 거죠. 하하.”

그렇다면 ‘청출어람’은 어떨까? 박찬욱과 송강호는 현재 영화계에서 그 누구도 추월이 불가능해 보이는 ‘최강 레이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영화 예술가를 스포츠와 같은 이치로 보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 “나에게 기회가 줄어든다면 그건 내가 감각을 잃었거나체력이 떨어져서지 자라나는 후배들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술가는 다들 독특한 자기만의 색깔이 있어요. 후배들의 상승이 나의 퇴보라는 건 말이 안 돼죠.” 박찬욱과 송강호는 언젠가는 작품 편수가 줄어들 수 있겠지만, 그 자연의 이치에 조바심 내지 않겠다고 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박찬욱, 박찬경, 송강호를 함께 카메라 앞에 세워 놓고서, 사진 작가에겐 리차드 아베돈 스타일의 차가운 감정으로 그들을 다뤄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감상적이고 신파적인 터치가 어울리지 않는 참으로 의연한 단독자들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이 모든 하모니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채근했다. 패션과 영화, 기업과 예술가, 형과 동생, 자연과 인간… 어떻게 대립된 다른 세계가 만나는데 아무런 갈등이 없을 수 있나. 그들이 산전수전 다 겪은 고수이기 때문일까. 박찬욱이 웃으며 말했다.

“워쇼스키 감독이 형제이던 시절에 의견 대립으로 싸우다 지치면 엄마에게 전화한다고 하더군요. ‘Parking Chance’는… 제가 양보하죠. 단편은 장편보다 자유로우니까요. 저는 앞으로도 동생과 더 오래많은 작업을 하고 싶거든요.”

경지에 이른 예술가들은 ‘공존의 기술’이 몸에 배어 있는 듯하다. 앞으로 필름 프로젝트를 이어갈 김지운과 봉준호 감독은 이들의 협연과는 다른 또 어떤 놀라움으로 ‘Way to Nature’를 표현할까. 철학과 상상력과 대중적인 화법을 두루 갖춘 그들의 시야로 보는 한국의 대자연은 또 얼마나 우아한 ‘신천지’를 열어 보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