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닝 자매와의 만남

스크린 너머의 섬세하고 예민한 소녀들은 깊이와 농도를 가늠할 수 없는 아우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스크린을 걷어 올리자 싱그러운 금발과 파란 눈, 캘리포니아 햇살 같은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이토록 달콤한 패닝 가의 자매들.



신라 호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의 바로크 양식 문고리를 돌리자 입구에 무리지어 서 있는 에이전시 관계자들이 눈에 띄었다. 바로 옆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누구?’라고 묻는 듯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건 다코타와 엘르의 엄마 헤더(두 딸과 달리 까무잡잡한 피부에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의 소유자). 낯선 침입자를 경계하는 문지기 무리들이 길을 터주자, 가구를 치워 널찍하게 만든 방 한가운데 일간지기자와 인터뷰 중인 엘르 패닝이 보였다. 엄격한 기숙학교 유니폼이라 해도 좋을 남색 피나포어 드레스와 단정한 화이트 셔츠는 파열음처럼 까르르 터져 나오는 앳된 웃음소리의 매력에 비하면 지나치게 딱딱해 보였다.

다코타 패닝(Dakota Fanning)과 엘르 패닝(Elle Fanning)이 난생 처음 대한민국에 발을 디디게 된 건 제이에스티나(J.ESTINA) 2013년 봄 컬렉션 광고 덕분이다. 소녀시대, 카야 스코델라리오와 김수현 커플의 파워에 밀리지 않으면서도 사랑스러운 주얼리, 백과 어울릴 제이에스티나 뮤즈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선택. 1월 5일 새벽, 할리우드 자매들이 도착한다는 소식에 취재진과 팬들은 꼭두새벽부터 인천 공항으로 내달렸다. “깜짝 놀랐어요!” 다코타는 푸른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했다. “한국은 처음인데 그렇게 따뜻한 환영은 상상 못 했거든요. 새벽부터 와준 팬들도 고맙고, 그들을 직접 보게 돼 정말 기뻐요.” 5일 도착, 6일 광고 촬영, 7일 매체 인터뷰와 프레젠테이션 참석 후 출국이 서울 스케줄이며, 나머지 시간에는 호텔에만 머무르겠다는 것이 원래 계획. 그러나 다코타의 헬로 키티에 대한 집착은 즉흥적으로 스케줄을 뒤흔들었고, 5일 오후 내내 온라인과 SNS는 홍대에 나타난 패닝 자매 소식으로 시끌벅적했다.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헬로 키티 마니아(어느 인터뷰에서 “저와 친하게 지내려면 저만큼 헬로 키티를 좋아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제가 그토록 좋아한다는 점을 충분히 존중해줘야만 해요”라고 말할 정도)인 다코타가 홍대 근처에 있는 헬로 키티 카페에 가겠다고 한 것. 홍대 특유의 펑키한 분위기에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대던 LA 소녀들에게 혹한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눈이 쌓인 걸 보니 신나던 걸요. 서울에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던 로스앤젤레스와는 정말 천지 차이예요. 무척 추웠지만 헬로 키티 카페에 갔죠!” 서울 구경에 신이 난 패닝 자매는 신사동 가로수길과 코엑스(역시 코엑스 내 헬로 키티 매장에 들르기 위해)에도 출몰하며 하루 종일 이야깃거리를 만들었다.



사실 사소하고 아기자기한 대상에 빠지거나 길거리를 구경하는 건 14세, 18세 소녀에게는 흔한 일상이다. 그러나 영화 <나우 이즈 굿>에서 백혈병에 걸린 영국 십대 소녀 ‘테사’의 성숙하고도 풍부한 감정 선은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 다코타의 일상을 낯설게 만들었다. 게다가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진 세버그를 연상시키는 짧은 픽시컷 헤어까지. “허니 블론드 맞춤 가발 세 개와 열심히 익힌 영국 악센트만으로도 변신하기에 충분하던 걸요.” 개인적으로 그동안 맡은 역할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든다고 전하자 의젓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동안 해왔던 모든 영화와 캐릭터들 이 똑같이 특별해요. 가장 좋아하는 한 가지를 꼽는 건 불가능하죠. 전부 다르거든요.” 늘 어른스러운 그녀의 별명은 ‘올드 소울’이지만 뉴욕대에 입학한 재작년에서야 곁에서 모든 걸 챙기던 엄마를 떠나 홀로서기를 했다. 작년 가을 2학년이 된 다코타는 심리학과 문학에 관심이 많고, 소피아 코폴라가 영화화한 <처녀 자살 소동>의 원작자 제프리 유제니데스의 작품을 좋아한다. “최근에 읽은 책 역시 제프리 유제니데스의 <결혼 플롯>이에요. 요즘은 너무 바빠서 책 읽는 걸 까먹을 정도지만 독서를 아주 좋아해요.”

다코타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드디어 엘르가 ‘가톨릭 계열의 사립 학교 교복’을 벗어버렸다. 오프닝 세리머니의 화사한 꽃무늬 자카드 드레스를 입은 걸 보니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게다가 반짝반짝 빛났다. 누더기를 벗은 신데렐라처럼! “언니와 주얼리를 바꿨어요. 색색의 알사탕 같은 원석 목걸이가 제 옷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언니가 조언했거든요.”

드레스와 한 세트로 만들어진 듯 잘 어울리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엘르가 말했다. 연두색과 보라색 유색 스톤이 이어진 주얼리는 제이에스티나의 ‘네오 글램 티아라’ 라인이다. “작은 파스텔 컬러의 스톤이 정말 예뻐요. 사실 저는 특별한 날 보다 일상적인 룩에 주얼리를 매치하는 걸 좋아해요. 특히 작고 귀여운 귀고리는 제 옷장 속 어떤 아이템들과도 잘 어울릴 거예요!” 미드나이트 블루 컬러의 캐비아 엠보 가죽에 스톤이 장식된 제이에스티나 럭스 컬렉션 클러치(인보그 ‘Holding Jewel’을 참고할 것)는 손톱을 짧게 깎은(사실은 손톱을 물어 뜯은 것처럼 보였지만) 엘르의 작은 손에 쏙 들어갔다. 연한 샐먼 핑크의 프라다 페이턴트 샌들 굽에도 스톤이 박혀 있었다.

엘르는 ‘소녀스러운 것이라면 뭐든’ 좋아한다. “귀여운 미니 드레스, 머리에 헤어피스를 달거나 헤어밴드를 묶는 것, 마릴린 먼로 등등!” 의도하지 않아도 배어 나오는 순수하고 서정적인 ‘소녀다움’에 관해 가장 잘 아는 건 소피아 코폴라다. 영화 <썸웨어>에서 엘르는 꾸밈없는 소녀란 얼마나 근사하고 매력적인 존재인지 보여줬다(이 영화 이후 엘르는 패션계의 달링으로 급부상했다). “소피아는 자연스러운 걸 원했어요. 대본도 아주 짧았죠. 전체 스토리 구조만 갖고 진행하면서 즉흥적으로 느끼거나 원하는 걸 자유롭게 표현하는 식이었어요.”

다코타의 연기가 사람을 빨아들인다면, 엘르의 연기는 사람을 반하게 만든다. 지금껏 그녀와 작업한 감독들은 단 한 번도 뭔가 강요한 적 없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전체 상황을 설명해준 뒤, 각자에게서 그 역할이 나오길 기다린다고 했다. “어렵다기 보다 늘 새로운 도전처럼 느껴져요. 연기에 있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점이기도 하죠. 굳이 다른 직업을 고르라면 발레를 꾸준히 하고 있으니 발레리나 정도?” 그러나 홍대 근처에서 찍힌 엘르의 ‘스트리트 스타일’을 보면 뭔가 패션과 관련된 직업을 이야기할 거라 기대할 만하다. 핑크색 레오파드 패턴의 오버 사이즈 카디건과 은색 크리퍼 슈즈에 가죽 텍스처의 블랙 팬츠는 할리우드 영화 배우의 평상복이라기 보다 팝스타, 그것도 아이돌 쪽에 가까우니까. “크리스마스용으로 구입했어요. 카디건은 오프닝 세리머니, 두툼한 플랫폼의 은색 크리퍼는 샤넬! 맞아요, 이 드레스도 오프닝 세리머니예요. OC는 정말이지 ‘슈퍼 쿨’한 곳이에요!”

그녀는 런웨이에 서는 모델들의 이름도 전부 다 꿰고 있다. 지금껏 가장 신났던 순간은 칼 라거펠트가 샤넬 오뜨 꾸뛰르쇼에 참석해 달라고 직접 부탁했을 때다. 샤넬 드레스를 입고 프런트 로에 앉은 그녀는 모델들이 걸어나올 때마다 속으로 ‘이럴 수가’ ‘세상에’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그들의 이름을 차례로 중얼거렸을 정도다.

“스타일닷컴에서 이름을 찾아봐요. 요즘 제가 좋아하는 모델은 칼리 클로스예요. 실제로도 만난 적 있는데, 키가 정말, 너무, 아주, 엄청나게 큰 거 있죠. 게다가 또 얼마나 상냥한지!”



과시용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자기만의 색깔과 분위기를 지닌 패닝 가의 여자들은 패션에 관해 나름의 식견이 있다. 패션 머천다이징을 전공한 엄마의 영향으로 패닝 자매의 패션에 대한 식견은 일반적인 십대 소녀들을 웃도는 수준이다. 또 다코타조차 패션 감각과 열정에 있어 엘르가 자기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인정한다. “언젠간 제가 동생에게 어떤 옷을 입을지 물어볼 날이 오고 말 거에요!” 그렇다면 패닝 가의 패셔니스타 엘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60~70년대 빈티지 스타일이요. 60년대는 모즈 룩의 베이비돌 드레스와 두꺼운 아이라인, 70년대는 히피 룩! 하이웨이스트 데님과 페전트 블라우스, 꽃무늬 맥시 드레스는 제 금발머리와 멋지게 어울린답니다.” 빈티지 마니아인 엘르는 영화 <진저 앤 로사>를 촬영하는 동안 런던 곳곳의 빈티지 전문 매장과 시장을 구경하느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패션 감각을 뽐낼 기회는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학교에선 교복을 입기 때문이다. “아래는 플레이드 스커트, 위에는 칼라 달린 하얀 셔츠를 입어야 해요. 하지만 액세서리를 달거나 교복 위에 어떤 스타일의 재킷을 걸쳐도 상관없어서 다들 각자 스타일대로 교복에 멋 부리고 다닌답니다.”

사실 정석대로 교복을 얌전히 빼입는 여고생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여자 아이들이 짧은 스커트 때문에 불편해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길이가 조금 더 긴 플레이드 스커트를 골라(교복에 옵션이 있다) 귀엽게 스타일링하는 걸 택했어요. 길이가 긴 스커트 때문에 전형적인 학교 유니폼을 입은 것처럼 보이는 게 마음에 들었거든요.” 다코타 보다 월등히 큰 키(170cm)에 팔다리는 운동 선수처럼 쭉쭉 뻗었지만, 작은 새처럼 생글거리며 조잘거리는 엘르를 보니 세상의 어두운 면을 모르는 천진함에 푼수 같은 구석까지 고루 갖춘 듯했다.

사실 그 정도의 연기 경력이면 세상의 어두운 면을 벌써 알고도 남겠지만(만약 그렇다면 철저하게 속은 거다). “안젤리나 졸리와 찍은 <멀레퍼선트>가 곧 개봉 예정이에요. 안젤리나가 마녀, 제가 공주죠. 다음 계획은 영화를 찍으러 남아프리카로 떠나는 거예요. 물론, 알아요. 남아프리카라니, 정말 멋지죠!” 상냥한 엘르 양, <보그 코리아>에 한마디 해줄래요? “제가 <보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요? 방 한쪽 벽면에 패션지에서 뜯어낸 사진들을 잔뜩 붙여놨는데, 그 가운데 <보그>가 가장 많을 걸요!” 그런 뒤 “촬영 다 끝난 건가요? 고마웠어요. 안녕!”이라고 손 흔들며 이보다 더 달콤할 수 없는 그녀가 문 밖으로 총총 사라졌다.

잠시 후, 다코타가 <보그> 촬영을 위해 드레스(제이에스티나의 프레젠테이션 때 입었던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타났다(둘은 최근 서로 다른 에이전시에 소속되면서 공식 인터뷰와 촬영을 절대 함께 진행하지 않고 있다). 흰 레이스로 된 니나 리치 드레스는 쾌청한 날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 같았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올 법한 큼지막한 리본 장식의 은색 로퍼는 미우미우, 파베 세팅된 화이트 스톤 사이에 꽃봉오리가 입체적으로 장식된 왼쪽 손목 뱅글과 오른쪽 장미 모티브 반지들은 다코타가 직접 고른 제이에스티나의 ‘글로리아 로사’ 라인 주얼리다. 또 제이에스티나 럭스 컬렉션의 핑크색 파이톤 엠보 가죽 클러치가 새하얀 룩에 포인트 역할을 했다.

홍조가 도는 다코타의 뽀얀 피부와 커다란 푸른 눈, 금실로 짠 듯한 머리카락이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아담한 키(163cm)에 얼굴도 엘르보다 조금 큰 편이지만, 늘씬한 모델보다 더 매혹적인, 손으로 만든 도자기 인형 같은 느낌이랄까. 광고에도 여러 번 등장했던 마크 제이콥스 옷의 둥그스름한 라인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코타의 최근 사진들을 보면 그녀가 요즘 패션계의 젊은 유망주에게 빠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프로엔자 스쿨러의 디자이너 잭과 라자로는 친한 친구들이에요. 그들이 만든옷, 정말 근사하지 않아요? 물론 잊지 않고 저를 챙겨주는 마크 제이콥스도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죠.” 마크 제이콥스 광고에 처음 등장했을 때 다코타는 열두 살이었다. 제이콥스는 그 시즌 런웨이 룩을 전부 그녀의 작은 몸에 맞춰 다시 제작할 정도(광고 촬영 후 그는 제작한 옷을 전부 다코타에게 선물했다). “한 벌도 빼놓지 않고 전부 갖고 있어요!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죠. 더 이상 입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지만.”



그녀는 미래를 예견하는 초능력자 ‘캐시’ 역을 맡았던 영화 <푸시>에서도 의상을 직접 골랐다. 포멀한 재킷, 미니 스커트와 롱 부츠, 레오파드 프린트백의 쿨한 스타일에 매치한 낡은 티셔츠는 다코타 자신의 것. “제가 요즘 열광하는 잇 아이템을 꼽자면, 핑크색 세퀸이 가득 달린 제이에스티나 백팩이에요. 공항에서 들었던 바로 그 가방! 반짝이는 데다 핑크색이라서 맘에 들어요. 최근에 산 패션 아이템이요? 서울에 온 첫날, 거리에서 구입한 페일 블루 컬러 스웨터!” 이렇듯 패션에 관심 많지만 여전히 그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영화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좋아요. 이런 직업을 가질 수 있어 행운이죠.” <나우 이즈 굿>에 이어 엘리자베스 올슨과 주연으로 출연한 하이틴 드라마 <베리 굿 걸스>가 개봉 예정이고, 시대극 <에피>는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에 들어갔다. 지금은 제시 아이젠버그, 피터 사스가드와 함께 환경 운동가의 테러에 관한 스릴러 <나이트 무브스>를 촬영 중이다(이 영화가 끝난 뒤 다음 스케줄까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나저나 뉴욕대에 다닌다고 하니, 어쩌면 싸이와 케이팝을 알지 모르겠다. “음, 케이팝이 정확히 뭔지 모르지만, 싸이는 잘 알아요. 뉴요커라면 싸이를 좋아하지 않을수 없죠! 그러니까, 저는 케이팝을 좋아하는 거겠죠? 하하.”

다코타는 미리 위치를 잡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녀의 무릎 위에 아침 일찍 준비한 꽃다발을 흐트러뜨리자, 대화를 나눌 때 생기발랄하게 반짝이던 눈빛을 거두고 어느새 인형처럼 깊고 고요한 눈동자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다코타는 구도, 색감, 의상, 컨셉,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전문 화가의 초상화 속 인물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 엘르는 형식에서 자유롭고 뭔가 하나쯤 빠졌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아름다운 어느 천재의 습작 같다. 둘 가운데 우열을 가릴 순 없다. 둘은 닮은 듯 서로 너무 다르니까.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할리우드 황금 자매가 한국에서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 그들의 마무리 멘트는 똑같았으니까.

“이번이 처음이지만 한국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다음에 또 오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