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더 카메라

이재용 감독에게 윤여정은 뮤즈일까? 그들은 영화 〈여배우들〉에 이어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라는 의미있는 ‘해프닝’ 영화도 함께했다. 독설과 우연의 쾌감이 놀라운 이 진보적 커플을 보라!

이재용 감독의 수트는스튜디오 더 슈트, 셔츠는 빈스,안경은 랑방(at 세원 I.T.C.)윤여정이 입은 하이넥드레스는 케이수 바이 김연주

영화 <정사>로 화려하게 데뷔하고,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로 명성을 얻은 이재용 감독. 미학과 장르를 잘 다루는 웰메이드 스토리텔러로 인정받던 그가 몇 년 전부터 연이어 자기 부정을 일삼고 있다. 웰메이드 스토리도 없고, 미학과 장르는 아예 뒤집어 버리는 실험작들. 예컨대 <여배우들>이라든가 최근에 개봉을 앞둔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이하 뒷담화)> 같은 영화는 기본적인 플롯과 형식만을 던져 둔 채 배우들끼리의 부딪혀 나오는 현장의 갈등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그러니까 영화의 독재자로서 감독의 현장 지휘권을 대폭 축소하는 것을 통해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캐릭터의 돌출과 운동 에너지를 증폭시킨 것. <여배우들>에서 오지 않는 ‘보석’이 촬영을 지연시키고, 공존이 불가능한 고현정과 최지우의 격돌 신(물론 설정이지만)을 만들어냈다면, 이번 영화 <뒷담화>는 아예 감독이 현장에 오지도 않은 채(할리우드 진출이라는 명목으로!), 현장에 모인 배우들을 원격 인터넷으로 조종한다. 윤여정을 중심으로 한 배우들은 좁은 촬영 공간에 갇힌 채 생전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하며 감독을 원망하고, 그럼에도 생존을 위해 각자의 캐릭터를 찾아나간다. “사실 20대부터 제 기질은 도발적인 실험영화 쪽이었어요. 서른두 살 데뷔작으로 <정사>를 한 게 오히려 이상했죠. ‘이런 것도 영화가 될까’라는 화두로 시작한 <여배우들>이나 <뒷담화> 같은 류의 실험적 상상이 제 안에서 지금도 넘쳐나요.” 이재용은 자신의 영화작업이 극장용 ‘커머셜’이라기보다는, 미술관에 어울리는 ‘현대미술’에 가깝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윤여정은 이재용 감독의 일련의 실험을 어떻게 생각할까? “<여배우들>이야 대충 알고 찍었지. 그런데 이번 영화는 난 디지털이고 원격이고 모르잖아. 단편을 찍으면서 그 과정을 메이킹으로 담는데 그게 또 장편이 돼서 나온다는데 그 말을 누가 알아듣겠어? 몹시 추운 날 ‘아사리 판’에 불려 가서 엄청 성질을 내다 왔더니 그게 영화가 됐어. 나 원 참! 배우로서 호감은 안 가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예술적으로 호기심 가는 생각인 건 분명해.” 윤여정은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얘기하지만, 이 영화의 홍보를 위해 가장 열심인, 이재용의 든든한 지지자다.

이재용은 영화 <뒷담화>의 ‘원격 디렉션’을 소통 기술의 전환으로 생각한다. 전화기의 발명처럼 기술이 진보하면 처음엔 분명 혼돈과 저항이 있지만, 그건 곧 ‘익숙함’으로 대체된다는 것. 감독과 배우 사이에 콘티만 합의되면, 감독이 설사 남극에서 화상으로 지휘한다 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 “영화근본주의자들은 동의 못하겠지만, 새로운 형태의 영화가 나온 거죠. 제 몸은 하나지만,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로케이션을 한자리에서 통제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나 문제는 남아 있다. 감독과 배우의 관계의 문제. 영화 현장에서 감독은 배우의 불안을 케어할 수 있는 유일한 부모다. 때론 배우에게 즉물적 연기를 뽑아내기 위해 고통에 직면시키지만, 배우의 개성을 스토리로 이입시켜 황홀한 결합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더욱이 요즘엔 ‘배우가 곧 영화의 전부다’라고 할 정도로 배우를 향한 탐구와 외경심이 감독의 자질로 평가 받는 시대.

“난 감독이라면 산전수전 다 겪었어. <화녀> 했던 김기영 감독은 현장에 난데없이 쥐도 풀어놨다구. 울며불며 내가 그 양반을 평생 안 볼라고 했는데… 지금은 왜 그랬는지 이해가 돼. 스물세 살짜리 여배우를 설득하긴 힘들지, 연기는 뽑아내야겠지…, 감독들이 잔인한 면이 있어. 그래도 그분이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미스 윤밖에 없다’ 그랬지.” “그러면 그동안 말귀가 어두워지셨나? 당대에 가장 똑똑하셨던 분이 왜 제 영화는 못 알아듣는 척 자꾸 기자들 앞에서 ‘야지’를 놓으세요? 고현정 씨라면 더 신이 나서 으쌰으쌰 했을 텐데.” “아니, 그럼 왜 고현정이를 섭외하지 그랬어?” 으르렁대는 고양이과 동물처럼 서로의 스파링 파트너로단련된 두 사람의 대화는 재치 넘치는 만담이며, 악의 없는 ‘뒷담화’다.

“여배우한테 감독은 남편과 같아. 6개월 드라마 하면 6개월 남편이지. 날 잘 표현해주면 궁합이 맞는 거고. 아니면 이혼 도장 찍기 전까지 가는 거고. 나는 영화 쪽 남편을 보면 행복한 경우지. 임상수, 홍상수, 이재용 다 색깔이 다른 사람들이니까. 그 중에서 내가 임상수한테 사랑을 좀 받았나?”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쨌든 늘그막에 남자 하나 잘 만나서(임상수 감독) 인생 폈지 뭘 그래요? 칸에도 다녀오고.”

“일리가 있는 말이니까 내가 들어준다. 난 임상수한텐 <바람난 가족><돈의 맛>으로 사랑을 받았지만, 홍상수한텐 못 받았어. 홍상수한테는 고현정이가 받았지. 그이는 남녀상열지사를 다루니까 ‘엄마’가 필요할 때만 나를 부르지. 이재용 감독을 비롯해서 감독들은 다 웃겨. 감독은 배우가 이상하다지만, 배우가 보기엔 감독들이 이상해. 그들도 만나서 간을 본다구. 나하고 몇 개월 살고 새끼(작품) 낳을 여자인데 모양이 어떤가. 난감독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일단 이혼하기 전까지는 배우는 감독의 도구라고 생각하고 일해.”

“배우는 분명 감독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예요. 또 감독은 배우의 육체와 감정을 사용해서 자기 생각을 전달해요. 그런데 간혹 내 머릿속에 생각이 분명할 땐 기술적인 요구도 하죠. 다섯 발자국 걷다가 눈물 고이고 여덟 발자국에 주르르 흘려라…, 이러면 감성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굉장히 힘들어 하는 배우들도 있어요.” “그게 어쩌면 교감의 질인 거야. 그 느낌을 못 알아듣고 다섯 하고 여덟에 집중하면 이게 수학 문제가 돼 버리는 거지. 그걸 여운의 템포로 해석해야 하는 건데.”

<여배우들>의 경우 이재용은 전적으로 윤여정과 고현정이라는 배우들의 사적인 매력에 의존해서 영화를 구상했다. 사실과 설정이 뒤섞인 그 영화는 ‘배우, 여자, 사람’이 등가가 되는 흥미진진한 패러다임으로 영화계 안팎에서 화제가 됐다. 그렇다면 영화 <뒷담화>는 관객과 배우와 감독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이재용의 재미에 배우들이 놀아난 거죠”라고 윤여정은 또 한번 농담 반의 불씨를 던지고, “바로 이런 게 이분의 한계”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재용.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이 영화는 극장에 걸린 이후까지, 끝없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대단히 역동적인 작품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돌고 도는 ‘구전 설화’가 그러하듯, 김민희, 김옥빈, 강혜정, 정은채, 이하늬, 최화정, 김남진 등 이 영화에 등장하는 14인의 배우들도 제각기 다른 입장으로 할 말이 있을 테니 말이다.

“늙으면 인심이 좋아져요. 이재용이 똥 싸놓고 개 불러내듯 날 부른거라고 봐, 나는. 다 안 한다고 엄살을 부리니까 내가 나선 거잖아. 연말에 이틀 쉰다고 스케줄 알려준 게 죄지. 최화정이를 끌어들인 건 난데, 걔가 아주 현장에서 감독 흉을 엄청 보더라구.” “바로 그거예요. 최화정씨는 영리해서 이 영화에서 자기 몫을 찾아낸 거라고. 선생님은 그저 내 ‘뒷다마’ 깐다고 맞장구 치면서 그걸 다큐로 받은 거죠. 그분은 나름 할리우드 액션한 건데.” 나는 윤여정에게 영화에서 진심으로 화가 난 거냐고 물었고, 윤여정은 그렇다고 했다. “이분이 짜증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셨어요. 덕분에 영화가 살았죠”라고 이재용이 부연했다. 나는 이재용에게 정말 그당시에 LA로 간 거냐고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했다. “야자수 밑에서 찍은 사진도 막 보내며 배우들 염장을 지르더라니까.” 그는 미국 영화계 진출을 위해 할리우드로 갔고, (설사 거짓말이라 해도)그 설정은 ‘컨셉추얼 아트’의 출발이다.

어쨌든 <뒷담화>는 베를린 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되는 것을 통해, 일종의 예술적 면죄부를 얻었다. “이재용 감독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창의적인 연출가이며, 이 영화는 복잡한 영화계 전반에 보내는 따뜻하고 포괄적인 연애 편지와도 같다”는 <Film Business Asia>의 평이 뒷받침하듯. 신랄하게 농담을 퍼부어대지만, 윤여정은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가 더 넓어졌다는 걸 인정한다. “나는 연기에 완성이라는 게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엉겁결에 뭘 표현했어도, 관객이 공감하면 그게 이상적인 거지. 그래서 나는 늙으면 늙을수록 좋은 감독이 절실해. 이재용, 임상수, 홍상수 그 사람들을 엔조이하며 갈 수 있다는 건 축복이지. 그 셋의 앙상블이 나한테 ‘마이 플레저 앤 아너!’라고.”

이재용은 자신이 벌이는 일련의 실험이 영화의 닫힌 구조를 여는 재미를 줄 거라고 확신한다. 가령 단편을 찍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장편으로 담아 커머셜과 인디의 개념을 뒤집는다든가, 배우의 캐릭터와 퍼스낼리티를 혼성시킨다든가… “뭐든 ‘이렇다’라고 정해진 걸 회의하길 좋아했어요. 배우들도 처음엔 기댈 언덕이 있겠지, 하고 왔다가 감독도 없이 현장에 던져지니까 우왕좌왕 하는 게 당연하죠.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좁은 스튜디오 공간에 모여 와글거리면 분명 뭔가 나올 거라는 확신이 저한텐 있었어요. 만약 안 되면 ‘나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라는 자막으로 실패를 담은 영화가 나왔을 거예요.” 이재용 감독은 ‘내가 자처해서 내 무덤을 팠다’는 말로 이 아이러니한 ‘해프닝 영화’를 설명했다. 제작발표회에 참여한 김남진과 이하늬는 ‘멘붕’과 ‘아노미’라는 단어로 영화의 감정을 전달하며, 이재용의 ‘코믹한 재난영화’에 지지를 표했다.

‘시나리오’와 ‘섭외’, ‘연기’와 ‘디렉션’으로 역할이 정교하게 분담되는 메이저 필름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낯선 커뮤니케이션의 세계가 곧 펼쳐진다. “배우도 관객도 낯설어 할 거예요.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의 원형, 타당한 모양새와는 다르니까. 하지만 그게 영화계의 이면이죠.”

사실 칭찬과 존경 일색의 낯간지러운 대화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재용과 윤여정의 신랄한 교감 자체가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윤여정이 이 영화의 교훈은 “내 스케줄을 남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자”라고 하면, 이재용은 “저분은 연기보다 사생활이 낫다”로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말에 절대 상처 받지 않는다. 시시때때로 밥 먹고 공연 보며 세련된 일상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필름보다는 사생활에서 영감과 아이디어를 주고 받아 왔으니까. “이 감독은 어디 가서 뭘 봐야 한다며, 평소에 감독질을 해.” “끊임없이 배우를 다루며 디렉션의 감을 놓지 않는 거죠.” 지금 이재용은 윤여정을 탐구하며 그녀를 모티브로 한 시나리오 작업을 준비 중이다. 이재용은 윤여정과 평생 함께 일하고 싶어 하고, 윤여정은 ‘인생은 늘 배신이 기다리고 있으니 확언은 말자’고 한다. “감독이 배우에게 상상할 수 없는 디렉션을 줄 때, 배우는 전율을 느껴요. 이재용 감독은 늘 그걸 준비하죠”라고 윤여정은 마지막으로 애정을 담은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