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맨

조정석은 〈건축학개론〉의 능청스런 납뜩이 탓에 두고두고 스스로와 비교될 것이다. 그럼에도 자연인이 아닌 극 중 캐릭터로만 회자되길 바라는, 결코 능청스럽지 않은 배우 조정석.

니트 후드 티셔츠는 겐조(at Koonwith a View), 메탈릭한 파란색 셔츠는 H&M,주홍색 팬츠는 구찌.

영화 <건축학개론>의 ‘납뜩이’를 음성지원 가능한 피규어로 만들어 소장할 수 있다면, 혼자 살아도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못난 고민으로 괴로워할 때면 “어뜩하지 너?”, 찌든 일상에 정신이 확 깰 만한 한마디가 필요할 때면 “아구창을 날릴까?”, 외로운 밤이면 “키스란 말이야…”라고 적재적소의 멘트를 날려줄 테니. 딱 1년 전, 조정석의 매니저는 배우의 활동 영상을 모은 자료를 들고 회사에 찾아왔다. 뮤지컬 무대에선 스타이지만 영화와 방송계에선 생경한 조정석의 이름 석 자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서로 간에 예의 바르고도 형식적인 긴 말이 오가고, 열흘 후 <건축학개론>이 개봉했다. 드라마 <더킹 투하츠>도 시작했다. 스크린에서 본 재수생 납뜩이가 엄격한 왕실 근위대장 ‘은시경’으로 TV에 나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바로 그 달(2012년 4월호) 인터뷰를 위해 만난 이용주 감독이 엄태웅에게 지나가듯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우리 영화 사전 모니터를 해보니까 사람들이 다 납뜩이 얘기만하더라?” 3년 전 드라마 <왓츠업>을 준비하던 송지나 작가는 당시 SNS에 이런 말도 올렸다.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보게 됐는데, ‘저 친구 누구야?’ 하고 찍은 배우가 조정석입니다. 이지나 연출가가 그러더군요. ‘그 친구와 작품 해보세요. 행복해질 겁니다’라고.” 배우가 지닌 가능성이 조각처럼 하나씩 맞춰지자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가 그 자리에 있었다. 반전 아닌 반전, 조정석은 ‘카이저 소제’ 같은 인물이다.

노란색 셔츠는 ck 캘빈 클라인,메탈릭한 파란색 코트는버버리 프로섬, 자기로 만든 보타이는꼬르 시네 라베 돌리(Cor SineLabe Doli at Beaker).

조정석의 새로운 커리어에 시작점이 된 <건축학개론>은 개봉 전 언론 시사회를 한 날부터 신기할 정도로 후한 감상들만 쏟아진 영화다. 감독은 조정석에게 영화에서 ‘개그의 축’을 부탁했다. 순진한 이제훈과 대비되며 싱싱하게 조화를 이룬 조정석이지만, 그가 단지 극에 양념을 더하는 소위 ‘감초’ 역할에 머문 것은 아니다. 납뜩이는 대한민국 남자 중 흔하디 흔한 친구 캐릭터로서 90년대를 소환하는 이 영화의 리얼하고 자연스러운 맥락에 이바지하는 존재였다. 영화 배경이기도 한 90년대 중반, 방화동에 살았던 중학생 조정석은 개화동에 사는 여자 친구와 함께 ‘형설 독서실’에 다니며 자전거로 여자 친구를 집까지 태워다주곤 했다. 그때 여자 친구와 이어폰을 한 짝씩 나눠 끼고 곧잘 들었던 음악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다. 그 시기에 그는 배꼽 잡고 웃었던 연극 <개팔자가 상팔자>를 보고 연기라는 행위를 처음 마음속에 담았다. 조정석이 납뜩이만큼 능청스러운 남자는 아니지만(이용주 감독과 제작자인 심재명 대표는 납뜩이가 커서 ‘보험왕’이 됐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에게 처음으로 인상을 준 연기가 재밌고 밝은 쪽이었던 셈이다. “어느 정도 각이 잡혀 있는 인물보다 납뜩이처럼 생활 연기에 가까운 캐릭터를 좀더 좋아합니다. 제 선에서 변형의 여지가 있으니까요.”

신인 배우가 같은 시기에 스크린과 TV에서 극과 극의 연기를 선보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그건 축복이면서, 어떤 편견을 제공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번 드라마에서 제가 조금 코믹한 연기를 하면 납뜩이, 조금 진지한 연기를 하면 은시경과 비슷하다고 느끼시는 분도 있는 것 같아요.” 주말연속극 <최고다 이순신>에서의 이야기다. 그는 유복한 집 안에서 자란 연예기획사 대표 역할. 여주인공 아이유가 특별히 잘난 것 없지만 씩씩한 오뚝이 같은 인물 이순신으로, 차가워 보이지만 ‘허당’ 구석이 있는 조정석과 얽힐 예정이다. 조정석은 제작진이 자신을 캐스팅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고, 그 짐작대로 제작진은 ‘뻔한 인물 표현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주문했다. 드라마에 마르고 닳도록 등장하는 ‘실장님’과의 남자라면 굳이 조정석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소 복합적인 면을 보이는 조정석의 연기를 두고 사람들이 그의 이전 작품과 비교하는 건 당연하다. 지금은 시청자들이 드라마의 간을 보고, 제작진은 시청자와의 궁합을 탐색해가는 방영 초기니까.

주말연속극은 평일에 하는 미니시리즈와 또 다른 보편성을 지닌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주말연속극의 미덕을 지키면서도 따분하지 않은 최적의 지점이었고, <내 딸 서영이>는 부모의 사랑이 주어인 절절한 정서였다. KBS는 연이어 시청률 50%에 가까운 드라마를 내놓은 후, ‘엄마와 막내딸의 행복 찾기’로 다음 노선을 정했다. 고두심과 이미숙은 극의 안정감과 카리스마를 담당할 것이고, 조정석과 아이유는 젊은 유전자다. “제가 연기할 때 워낙 디테일을 좋아합니다. 주말연속극의 틀을 깨보고 싶은 마음이 커요. 사실 감독님도 ‘다 좋은데 어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연기를 해야 한다’고 충고해 주셨죠. 부모 세대가 봤을 때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하면 안 되고, ‘납득’할 만한 인물이어야 한다고.(웃음) 그 수위를 조절하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서 저도 기대돼요.”

롱 셔츠는 버버리 프로섬, 연두색윈드 브레이커 재킷은 코오롱 스포츠,카키색 재킷은 돌체앤가바나, 파란색5부 팬츠는 클럽 모나코, 스터드가박힌 샌들은 닐 바렛.

‘디테일이 살아 있는’ 조정석의 연기는 올가을 개봉하는 영화 <관상>에서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연애의 목적> <우아한 세계>의 한재림 감독이 연출하는 이 작품은 얼굴만 봐도 한 사람의 흥망성쇠를 알아채는 조선시대 관상가가 권력 다툼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다룬다. 문제의 관상가는 송강호, 수양대군과 김종서 역은 이정재와 백윤식, 치명적인 기생은 김혜수라니, 줄거리와 캐스팅만으로 흥망성쇠가 가늠되는 기대작이다. 조정석은 송강호와 콤비 앙상블을 보여준다. “송강호 선배님과 무지 가까워졌어요. 지금도 보고 싶어요. 옆에 있는 후배를 굉장히 격려해주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분이죠. 선배님이 제가 신인상을 탈 관상이라고….” 조정석은 지난해 겨울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신인상을 받을 때도 전국 8도를 돌며 영화를 찍고 있었고, 그 촬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올겨울 유난히 많이 내린 눈 때문에 촬영 기간이 길어진 탓이다.

분명 변화무쌍한 1년을 보냈을 텐데도 조정석은 이제 막 새로운 일을 시작한 사람처럼 기대감에 찬 눈빛을 하고 있다. 예전부터 준비된 연기자라 지금 이순간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이다. 대신 그는 야망이 있다기보단, 욕심이 있다. “뭘 쟁취하려는 마음보다 하나하나 주어진 걸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에요. 서울예대에서 연극하던 시절에도 안 되면 될때까지 정말 미친 듯이 연습했어요. 그럼 어느 날, 돼요. 그런 과정을 거치며 자신감이 생겼죠. 저한테 분명 재능이 있다는 걸 확인했거든요.” 그 는 갑작스런 유명세에 대처하는 자세를 말하며 ‘연기의 세 요소 중 하나가 관객’이라고, 아주 교과서적이어서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럼에도 조정석은 고루해 보이지 않고 진실돼 보였다.

“하지만 ‘이게 뭔가’ 싶은 기분을 느낀 날들도 있어요. 제 자존심과 관련된 부분에선 약간 불편해질 때가 있었죠.” 조정석이 알려지자 과거에 편히 했던 얘기들과 인터뷰들이 인터넷상에 소환됐다. 가족사와 어려운 가정 형편 같은 얘기들이다. 꼭 감춰야 할 건 아니지만, 굳이 얘기하고 싶지도 않은 사실들이 거기에 있었다. 사람들은 스타의 힘들었던 과거를 알게 되면 그 인물에게 감상적인 터치를 더한다. ‘힘내세요!’ 같은 시선 말이다. “그런 시선을 받을 때면 ‘힘내기 싫어!’ 하고 말하고 싶죠.(웃음)” 조정석의 아버지는 공군 전투기 정비사였다. 내성적인 아버지와 외향적인 어머니는 엄청난 춤꾼이었다. “부모님이 미군부대 근처 클럽에서 춤을 추시면, 주변으로 원이 크게 생겼대요. 엄마는 아직도 그 얘길 들려주세요.” 10여 년 전, 막내 아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쏟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다시 몇 년 후, 형제처럼 지내던 조카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조정석은 ‘바닥을 쳤다.’ 친구들이 조정석을 동영상으로 찍은 적도 있었다. ‘지금 네 몰골이 어떤지 봐라’라는 뜻이었다.

첫 뮤지컬의 개런티로 맛있는 밥을 사주려고 했던 조카는 이제 없지만, 부모님의 끼는 조정석이 뮤지컬 무대에 설 수 있는 재능으로 이어졌다. 조정석은 8년 동안 <그리스> <벽을 뚫는 남자> <내 마음의 풍금> <헤드윅>등으로 승승장구했다. <헤드윅>을 하던 시절, ‘헤드헤즈’들은 그를 ‘뽀드윅’이라고 불렀다. 하얗고 뽀얀 얼굴 때문이다(조정석의 피부에선 광이 난다). 이야기의 배경이 뮤지컬 학과였던 MBN 드라마 <왓츠업>은 조정석이 활동 반경을 옮기는 데 자연스러운 다리 역할을 해줬다. 춤을 추던 뮤지컬 배우의 몸놀림은 몸이 기억한다. 조정석은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마인드를 가진 자신도 춤과 노래엔 한계가 있더라고 말했지만, 그의 유연한 몸짓은 <건축학개론>에서 납뜩이가 ‘술 먹고 여자를 불러내는 컨셉’을 강의할 때 배어 나왔다. 결국, 조정석을 두고 어떤 이야길 하더라도 납뜩이가 나오고 만다. 조정석은 납뜩이 덕에 배우로서 탄력을 받았고, 납뜩이 탓에 두고두고 스스로와 비교될 것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조정석에게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는 납뜩이를 의식하지 않는다. 한 캐릭터가 배우의 발목을 잡을 거라는 두려움도 없다. “전 그게 좋습니다. 사람들이 앞으로도 조정석은 모르고, 캐릭터만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나란 존재는 한없이 하찮아지고 극 속의 캐릭터만 부각되는 것. 그게 제 바람이에요.” 그는 오늘 사진 속의 자기 모습이 낯설어서 좋다며 신기한 듯 바라봤다. 매번 역할에 충실 하겠다는 말을 ‘저를 지우고 싶어요’라는 간절한 말로 대신하는 배우. 그의 연기가 환상적으로 탁월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납득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