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박해일의 망중한

2016.03.17

by VOGUE

    박해일의 망중한

    순박한 청년의 절절한 순애보부터 욕망에 휩싸인 노시인까지, 그 어떤 역할도 백지처럼 완벽하게 흡수하는 명배우 박해일이 송해성 감독과 함께한 영화 <고령화 가족>의 일원으로 돌아왔다. 변함 없이 힘을 뺀 가벼운 몸으로, 건들거리는 소년 같은 정신으로.

    체크무늬 면 파자마는 엠포리오 아르마니언더웨어, 턱시도 재킷과 스터드 장식슬립온은 구찌.

    보그 일흔의 노시인 이적요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였어요.
    박해일 제가 어디까지 갈지 가늠하지 않고 가봤지요. 몸이 무한히 열렸고, 그만큼 무모했고, 해볼 만큼 해봤습니다.

    보그 <은교>의 원작자인 박범신 선생과는 교분을 나눴나요?
    박해일 벚꽃이 필 즈음,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와서 문자를 드렸지요. “좋은 봄입니다.” 얼마 전엔 선생님께서 논산에서 약주 하시고 문자를 주셨어요. “좋은 밤이다.”

    보그 <은교>의 정지우 감독과는 생애 먼 곳까지 여행을 다녀온 셈이네요.
    박해일 정지우 감독과는 얼마 전에 오키나와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아무 정보도 없이 떠나서, 이코노미 좌석에 다닥다닥 앉아 렌터카를 빌려 타고 3박 4일을 다녀왔어요. 밤에는 캡슐처럼 작은 게스트하우스에 혼자 누워 잠을 잤죠. 꼭 관 속에 들어간 기분이었습니다.

    보그 <고령화 가족>의 송해성 감독은 좋은 가장이었습니까?
    박해일 섬세한 분이지만 그걸 드러내지 않는 강한 마스크를 지녔죠. 영화 <파이란>을 만드셨던 분답게 남성적이면서도 여린 사람이었어요. 그 분을 생각하면 호기심과 즐거움이 커졌습니다. 3개월 반 동안 영화 동료들과 괜찮은 여행을 다녀온 기분입니다.

    보그 어떤 상상을 했나요?
    박해일 따뜻한 유랑극단이 될 것 같았습니다.

    보그 필름에 흡수가 잘 될 뿐 아니라, 다른 배우의 감정도 잘 번져오는 좋은 신체, 좋은 성품을 지녔어요. 축복이라고 생각하시죠?
    박해일 아시다시피 영화는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늘 단체 여행객의 좋은 일원이려고 노력합니다.

    보그 <고령화 가족>의 문제적 식구 중에 실패한 중년 영화감독 역은 박해일과 꽤 잘 어울려 보였어요.
    박해일 나라는 사람의 자연 환경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특히 저는 가족이라는 틀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한 프레임 안에 가족들이 모여, 각자의 날이 선 캐릭터를 수위를 맞춰 조절해 나가는 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매우 예민한 작업이지요.

    보그 이해합니다. 영화는 주말 가족드라마가 아니니까요. 이번 <보그> 촬영은 박해일이 <로열 테넌바움>의 벤 스틸러처럼 보이길 바랐지요. 클래식한 액자 속에 갇힌 루저랄까요. 그것 또한 당신 입장에서는 간을 맞추기가 쉽지는 않았겠지만요. 일종의 가족영화인 <괴물>은 어땠습니까?
    박해일 우울하진 않지만, 화목하다고는 볼 수 없었죠. 한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고, 조카가 있었죠. 그들과 카메라 앞에 서 있으면 많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묻어가거나 뭔가 더 보여주거나.

    흰색 점프수트, 반바지, 남색 코트는장광효 카루소.

    보그 어쨌든 <괴물>에서 당신의 분출력은 알맞으면서도 걸출했어요. 모두가 억압된 듯한 심리 상황에서 당신만 장례식장에서 허공에 발길질을 하고, 괴물을 향해 화염병을 던졌지요.
    박해일 그때나 지금이나 가족의 일원으로 제가 맡은 역할이 흥미롭길 바랄 뿐입니다. 즐거움을 주는 관계의 요소는 늘 제가 찾는 주제입니다.

    보그 자신을 잊기 위해 연기하나요? 찾기 위해 연기하나요?
    박해일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연기합니다. 영화는 과정이나 결과 모두 내게 대화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을 듣고 말을 내뱉는 즐거움이랄까요. 굳이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는 건 부담스러워요. 그저 툭툭 내뱉으면서 좋은 기운을 실어 보내는 거죠.

    보그 해일 씨의 영화 연기에는 연대기적 리듬이 있죠. 정화의 시대(<질투는 나의 힘> <살인의 추억>), 배설의 시대(<연애의 목적> <괴물>), 심장의 시대(<은교> <활>)를 거쳐 <고령화 가족>에 이르면 간과 허파의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박해일 맞습니다. 심장의 시기까지는 뜨거웠지요. 나이와도 연관이 있겠구요. 지푸라기를 잡는 것처럼 매사 절박한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작품도 일상도 내려놓으며 숨을 돌리는 때가 아닌가 해요.

    보그 영화를 찍는 것 외에 다른 소일거리가 있나요?
    박해일 편안하게 지내는 사람들과 목에 핏대 세우지 않고 사는 얘기 하면서 술 마시는 게 좋습니다. 망원동, 공덕동 일대를 다니면서 노가리와 생맥주를 즐겨 먹고 있어요. 술도 과하게 하지 않고, 취기가 오르거나 배가 부르면 산책을 합니다. 얕은 산이나 골목을 걷다가 허기가 지면 다시 적당한 장소를 찾아 요기를 하지요.

    보그 그거야말로 최고의 휴식이겠군요. 영화 속 인물에서 박해일로 빠져 나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인가요?
    박해일 몸의 패턴이라는 게 있는 법이지요. 오히려 <은교>의 이적요는 관록 있는 노인인데다 침전되고 격리된 느낌이 있었죠. <고령화 가족>처럼 안 풀리는 40대는 실제 내 가족들과 섞여 그들을 더 힘들게 만듭니다.

    보그 가족에게 영향을 끼치시는군요.
    박해일 그렇습니다. 가족도 늘 영화의 사정권 안에 있어요.

    보그 당신의 아내와 아이는 당신에 대해 어떻게 느낄까요?
    박해일 언제나 가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보그 네 살 된 아들을 동생으로 대한다죠?
    박해일 지금은 동료로 생각합니다. 하하.

    보그 해일 씨는 얼굴도 작지만 몸도 참 가벼워 보여요. <괴물>에서나 <활>에서나 <은교>에서나 그 몸이 주는 부력이 참 좋았어요. 허투루 완력을 쓰지 않을 것 같은, 가볍고 효율적인 몸이지요. 연기를 할 때는 몸과 마음 중 무엇이 먼저 반응하나요?
    박해일 내면부터 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점차로 몸이 변하지요.

    보그 영화라는 광산에서 박해일은 드물게 노다지 같은 인물입니다. 자신의 패를 다 내보이지 않으면서 끝없이 새 인물을 꺼내 보이는 힘이 궁금합니다. 타고난 성실성인가요? 순진성인가요?
    박해일 호기심입니다. 호기심이 저를 움직이게 만들어요.

    보그 그런 면에선 여배우 전도연 씨와 매우 닮았군요. 남자 배우들이 일반적으로 자신의 습관과 기질, 카리스마로 필름을 장악하는 파워풀한 연기를 선보이는데 비해, 전도연 씨나 박해일 씨는 무엇이든 천진난만하게 흡수하려 들죠. 두 사람이 함께 나왔던 영화 <인어 공주>는 그래서 한 편의 동화처럼 느껴졌어요.
    박해일 저는 자기 주장이 강한 편이 아닙니다. 어떤 작업을 할 때든 그 공간에 존재하는 기운과 기분을 느끼려고 하지요. 내 것을 확대재생산 시키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영화는 공동체 작업입니다. 저는 특히 감독님의 기운을 많이 탑니다. 감독의 자연적 심성과 그가 만들어 온 필모그래피로 그 사람의 기운을 느껴보려 최선을 다하죠.

    반바지 수트는 질 스튜어트 뉴욕, 흰 티셔츠는타임 옴므, 장화는 에이글.

    보그 자기 집착이 없으니 매너리즘에 빠지는 법은 없겠네요.
    박해일 하지만 저도 혼자 정처 없이 갈피를 못 잡을 때가 있어요. 내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지점에 맞닥뜨릴 때도 있지요.

    보그 그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박해일 씨는 배우로서 금기를 깨고 싶나요? 장수하고 싶나요?
    박해일 다 적당히 하고 싶어요. 무엇이든 의도적으로 해본 적은 없어요.

    보그 내시나 뚱보 역할도 할 수 있겠습니까?
    박해일 물론이죠. 호기심이 생긴다면요. 자연인 박해일이 호기심을 느낀다면 보는 사람도 즐거워할 게 자명합니다.

    보그 배우로서 핸디캡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박해일 핸디캡은 극복하느냐 집중하느냐의 문제겠죠. 그것을 구멍으로 여겨서 상쇄할 거냐 대놓고 드러낼 거냐조차도 구성원들과 상의해서 갈 생각입니다.

    보그 액션 영화엔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활>에서 활과 한 몸이 되는 걸 보고 놀랐어요.
    박해일 맨몸으로 하는 액션이나 칼을 사용하는 액션이었다면 매력이 덜 했겠죠. 김한민 감독이 활과 제 육체가 어울릴 것 같다고 했어요. 시위를 당겨보니, 역시나 몸이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보그 직선보다는 곡선이 어울리는 몸이에요. <괴물>에서 던진 화염병이나 <활>에서 당겨진 활이나 모두 포물선을 그리며 상대에게 날아가죠.
    박해일 결정적으로 저는 부딪히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하.

    보그 청년과 노인을 지나 중년의 배역에 이르렀네요. 기분이 어떤가요?
    박해일 늘 내 발자국을 밟고 지나가는 기분이죠. 사실적인 감정을 끌어 내기에 영화적 시점과 인생의 시점이 잘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트레이닝복은 아디다스 오리지널스,트렌치코트는 장광효 카루소,스터드 장식의 슬립온은크리스챤 루부탱, 안경은 토즈.

    보그 나이 순으로 박해일 특별전을 해도 흥미롭겠군요.
    박해일 특별전이라니요? 그런 구상은 저와 맞지 않아요.

    보그 어떤 사람이 지혜롭다고 느끼나요?
    박해일 나 자신과 타인에게 큰 부담과 긴장을 주지 않고 적정한 감정을 나누는 사람. 기운이 좋은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죠.

    보그 혹시라도 폭식, 폭력, 폭주, 폭음을 행하던 시절이 있나요?
    박해일 저는 기질적으로 릴랙스한 상태로 있는 걸 좋아합니다.

    보그 어떤 동물을 좋아합니까?
    박해일 구관조를 키워보고 싶습니다. 초등학교 때 한의원에 가서 처음 구관조를 봤어요. 구관조가 할아버지 한의사와 함께 저를 맞이하고는 “왜 왔어? 어디 아파?”라고 묻더군요. 사람들과 대화할 때 이해관계와 목적의식으로 머리가 복잡해질 때가 있잖아요. 구관조와는 언제든 명랑하게 대화할 수 있겠지요. 동물과 말을 주고받는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 호기심도 생기고요.

    보그 아직도 어린 왕자 같은 느낌이 있네요.
    박해일 트라우마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한편으로 저는 무엇이든 세상에 정해진 정답이나 매뉴얼은 없다고 보는 경향이 있죠.

    보그 박해일 씨는 자기 인생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다고 느끼나요?
    박해일 외로워지는 위치로 가고 있어요. 앞으로 더 혼자가 될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나만의 방공호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보그 박해일로 사는 게 만족스러운가요?
    박해일 맘을 비우고 살 땐 만족스럽죠. 욕망이 일어나면 불만스러워요.

    보그 괴물 같은 재능과 노력이 있는데도 말인가요?
    박해일 아닙니다. 모든 건 그저 어울림일 뿐이었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모든 게 나라는 사람이 명확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입니다. 내가 명확한 사람이라면 연기도 캐릭터도 명확해지겠죠. 그런데 저는 명확한 사람이 아니라 감독이 감정을 주면 그걸 믿고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저는 작품을 통해서만 어떤 식으로든 명확해질 수 있는 지점이 생겨요.

    보그 이해합니다. 누구나 명확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죠. 자기 확신도 필요하구요. 그건 앎의 욕구이기도 하고, 권력의 욕구이기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선 모호함을 모호함대로 그냥 놓아두는 것, 그게 배우 박해일의 진짜 힘일지도 모르겠네요.

    에디터
    피처 에디터 / 김지수
    포토그래퍼
    HYEA W. KANG
    스탭
    스타일리스트 / 정주연, 임지혜, 헤어 / 정준(라 뷰티 코아 도산점), 메이크업 / 천혜린(라 뷰티 코아 도산점)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