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로 만나는 수혁과 성준

수혁과 성준은 공포영화는 신인 여배우들의 스타 등용문이라는 공식을 깨는 첫 주인공이 될 것이다. 깎아지른 절벽, 생사의 기로에서 가까스로 현실로 돌아온 두 사람을 다시 어두운 빈 집으로 불러냈다.

성준의 검정 카디건은 릭 오웬스(Rick Owens),바지는 장광효 카루소(ChangkwanghyoCaruso). 이수혁의 하얀 후드 아우터는릭 오웬스, 바지는 뮈글러(Mugler at Mue).

검정 시스루 원피스는릭 오웬스(Rick Owens), 바지는 장광효카루소(Changkwanghyo Caruso),신발은 레페토(Repetto).

하얀 시스루 톱은 릭 오웬스,바지는 뮈글러(Mugler at Mue).

공포영화의 주인공은 언제나 그 해 가장 촉망받는 신인 여배우의 몫이었다. 한국 영화 시장에 공포영화 붐을 일으킨 <여고괴담> 시리즈부터 하지원을 21세기 호러퀸으로 등극시킨 <가위>, 임수정과 문근영이라는 걸출한 국민 여배우들을 발굴한 <장화, 홍련>까지 매년 여름이면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 20대 시절 윤여정의 영화데뷔작도 故 김기영 감독의 <화녀>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수혁과 성준은 기존 공포영화의 공식을 깨는 첫 주인공이 될 것이다. 옴니버스라는 새로운 형식과 실험적인 소재로 호평을 받은 <무서운 이야기>의 두 번째 시리즈에서 두 사람은 조난 사고로 죽음의 위기에 처한 두 친구를 연기한다. <절벽>은 민규동 감독이 브릿지 에피소드를 맡은 이번 영화 속 네편의 공포괴담 중 하나로 <거울 속으로>의 김성호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생사의 기로에서 가까스로 현실로 돌아온 이수혁과 성준을 다시 어두운 빈 집으로 불러냈다.

오랜 시간 주인 없이 방치되었던 통의동의 낡은 주택은 고장 난 관절 인형처럼 여기저기가 삐걱거렸다. 비까지 쏟아져 한낮인데도 사방이 깜깜했다. 마당의 목련은 이미 시들었고 공기는 축축했다. 날씨마저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던 그때, 길쭉한 그림자가 집 안으로 불쑥 들어섰다. 성준이었다. 큼직한 가죽 점퍼를 입었지만, 그는 전보다 더 말라 보였다. “<절벽> 들어가면서 얼굴 살을 뺀다고 하루에 한 끼만 먹었거든요. 게임 덕분에 가능했죠. 미친놈처럼 ‘LOL(리그오브레전드)’에 집중하다 보면 배고픈 줄도 몰라요.” 장난스러운 말투로 딱 스물 셋 ‘어른아이’다운 다이어트 비법을 털어놓는 성준은 금세 무거운 분위기를 박살 내버렸다. 싱겁게 큰 키와 툭툭 내뱉는 솔직함이 그의 공격력이다. 지난해 그에게 단막극상을 안겨준 드라마 스페셜 <습지생태보고서>에서도 그랬다. 최규석의 동명의 만화를 빌려온 드라마 속에서 성준은 영락없는 88만원 세대였다. 유행과는 거리가 먼 헐렁한 티셔츠 차림으로 먼지뿐인 주머니 속에서 꺼낸 초라한 마음을 들여다보던 성준은 연애 감정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모순투성이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솔직한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세상 안에 성큼 발을 들여놓지도 빼지도 못하고 있는 지금, 그래도 조금 자라고 있는 것일까?” 거기엔 화려한 패션쇼 무대 위 모델 성준의 모습은 없었다. jtbc <우리 결혼할 수 있을까?>의 김윤철 PD는 그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성준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이수혁이 도착한 건 성준이 먼저 촬영을 시작하고 난 후였다. 릭 오웬스 청 재킷에 스키니한 바지를 멋지게 소화한 수혁은 여전히 독보적인 ‘패션왕’이다. 수혁을 모델로 웹툰 <패션왕>의 윤혁수 캐릭터가 탄생했을 만큼 현실의 그는 만화보다 더 만화 같다. 새하얀 피부에 붉고 선명한 입술, 가느다란 턱 선, 날씬한 몸과 특유의 낮은 목소리. 가끔 그는 서울 하늘 아래 이 땅에 발 붙이고 사는 누군가의 이웃이 아니라,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요정처럼 느껴진다. 덕분에 지금껏 그가 맡은 캐릭터들은 남해 바다를 유영하며 해파리 유령과 소통하는 그림 같은 서핑맨(영화 <이파네마 소년>)이거나 파란 얼굴의 ‘구석 귀신’에 시달리는 몽환적인 소년(드라마 <화이트 크리스마스>), 혹은 우주에서 온 뱀파이어(시트콤 <뱀파이어 아이돌>)처럼 현실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그냥 그렇게라도 믿어야 ‘세상은 공평하다’고 위로받을 수 있을 것만 같으니까.

성준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형은 고등학교 때부터 워낙 유명했어요. 단대부고 축제에서 실제로 처음 봤는데 진짜 멋있었죠. 비주얼 쇼크 였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모델 이미지를 빨리 지워버리고 싶었다던 수혁은 이젠 좀더 유연해졌다. 2013 F/W 런던 컬렉션의 J.W. 앤더슨 쇼에도 등장했다. 프릴 달린 장화에 치마처럼 팔랑거리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워킹하는 모델 수혁의 모습은 꽤 오랜만이었다. “파리 에이전시와 계약한 게 열아홉 살 때였어요. 당시만 해도 한국 모델은 쇼에 서기 힘들었고, 이후 연기를 시작하면서 그런 채로 끝내버렸죠. 늘 그 부분이 아쉬웠어요.” 이번엔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캐스팅 오디션 조차 없었다. 쇼 하루 전날 파리에 도착해 리허설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죠. 이런 기회가 아니면, 제가 언제 발렌시아가 하우스에 들어가 볼 거며, 그런 디자이너들과 어떻게 함께 식사를 하고 생각을 공유하겠어요?”

성준의 검정 재킷은 라프 시몬스(RafSimons at Mue), 바지는 장광효카루소(Changkwanghyo Caruso).수혁의 흰 셔츠는 문영희(Moon Young Hee),바지는 뮈글러(Mugler at Mue).

반면 패션에 대한 성준의 열정은 시들해졌다. <구가의 서>에서 여울아씨(수지)의 호위무사로 출연 중인 성준은 20여 일 만에 처음으로 드라마 촬영장을 벗어나 한복에서 해방되었다. 수혁 역시 <뿌리 깊은 나무>를 통해 그보다 먼저 호위무사를 연기한 경험이 있다. 잘생긴 신인 배우들의 통과의례다. <모래시계>의 이정재도 그랬다. 사극이 유행하는 요즘은 호휘무사가 보디가드를 대신할뿐이다. “우리끼린 그런 농담을 해요. 한복 입고 한번 싸워보자고. 윤휼VS. 곤!” 다스베이더 VS. 오비완의 광선검 대결에 맞먹는 조선판 진검승부다. 수혁과 성준의 진짜 결투는 스크린 속에서 펼쳐진다.

지난 한 달간, 두 사람은 아차산 중턱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절벽에 고립된 상태에서 고작 초코바 하나 때문에 뒹굴고, 동물적인 생존본능과 인간으로서의 죄책감과 공포를 경험했다. 성준은 진짜 3m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매트를 깔아두긴 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주마등처럼 지난 시간이 떠올랐어요. 처음엔 아파서 다리도 못 폈거든요. ‘아, 큰일났다’ 하고 병원에 갔는데… 생각보다 제 몸은 강철이더라고요. 흐흐.” 수혁은 조난당한 주인공과 그의 동생까지 1인 2역을 연기했다. “헤어 스타일이나 말투가 조금 다르긴 한데, 의도대로 잘 표현됐는지는 모르겠어요. 저희도 아직 완성된 영화를 보진 못했어요.” 반드시 누군가가 죽는 여름 공포영화처럼 한 작품에 출연하는 신인 배우들의 운명도 이와 비슷할 때가 있다. 주목받는 건 단 한 사람이다. 물론 쿨한 두 친구에겐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다. “성준이 먼저 잘 되면? 난 밥 얻어 먹는 거죠, 뭐.” “콜이에요! 빨리 수혁이 형이 잘되면 나는 좋은 차 얻어 타는 거고. 흐흐.”

두 사람이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 호흡을 맞춘 건 2년 전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폭설로 산 속에 고립된 사립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통해 사춘기 아이들의 성장통을 다룬 이 8부작 드라마엔 요즘 연기자로 활발히 활동 중인 김영광, 김우빈 등 톱 모델들이 총출동했다. 배우라는 공통된 꿈을 갖고 비슷한 출발선에 선 그들은 금세 친구가 됐다. 특별히 약속을 잡지 않아도 틈만나면 카페에 모였다. “모델 출신의 신인 배우들끼리 ‘으쌰으쌰’ 하는 게 있어요. 우린 뭐든 다 터 놓고 얘기해요. 캐스팅이 겹치는 경우도 종종 있거든요. 함께 보고 배우며 서로의 성장을 격려하는 거죠.”

그 중에서도 둘은 특히 자주 만난다. 옷 입는 스타일부터 자동차 취향, 좋아하는 영화 속 캐릭터까지 기호도 성격도 다르지만, 그 다름을 이해할 수 있어 통한다. “수혁이 형은 감성적인 사람이지만 감정적이지는 않아요. 굉장히 이성적이죠. 자기 감정을 통제하고 능수능란하게 요리하는 데 출중한 능력이 있어요.” 글로벌 금융 위기를 목전에 둔 중학교 시절, 친구 따라 충동적으로 가입했던 펀드를 통해 이미 세상의 쓴맛을 보고, 일확천금보다는 눈앞의 현찰을, 인생 한 방 대신 수입의 80%를 저축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는 알뜰한 청년 성준은 그럼에도 만약 수혁이라면, 저금통을 탈탈 털어 믿고 맡길 생각이 있다. “제가 볼 때, 형은 사업을 해도 성공할 거예요. 확실히 수완이 있죠.” 성준은 직감적이고 즉흥적이다.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수혁은 거침없는 성준이 신기하기만 하다. “전 지용이나 성준이 가끔 부러워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예술적 자질이 뛰어나죠. 기타도 잘 치고, 노래도 잘 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일단 뭘 하겠다고 하면 망설임이 없어요. 전 과연 내가 잘 해낼수 있을지 고민이 많고 자신감도 부족한데…. 그래서 영광이 형까지 셋이 모이면 우스갯소리로 그러죠. 자! 가위, 바위, 보가 만납니다.”

모이면 우스갯소리로 그러죠. 자! 가위, 바위, 보가 만납니다.” 수혁은 5월 말에 시작되는 드라마 <상어> 촬영에 들어갔다. “좀더 사람 같은 캐릭터를 맡고 싶다”던 소원대로 이번엔 책임감 넘치는 검찰 수사관이다. 처음으로 연기하는 밝고 유쾌한 성격의 ‘평범한’ 남자다. “지금 저희 위치가 굉장히 애매한 것 같아요. 모델이라는 타이틀을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고, 20대라는 나이도 그렇고요. 계속 더 열심히 해야죠.” 배우라는 어린 시절의 확고한 꿈을 이야기하는 수혁은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그는 지금 아주 오래전부터 수없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단계별로 세워온 계획을 하나씩 마무리하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성준은 지금 이순간을 쫓는다. “아직 전 한 번도 제 나이로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시간은 느끼기도 전에 너무 빨리 흘러가잖아요. 그래서 쫓아가려고 늘 아등바등 대요. 나로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내가 좀더 살아 있는 느낌을 느끼고 싶어서요.” 테이블 위엔 성준이 끊임없이 잘게 토막 낸 일회용 종이컵의 사체가 수북이 쌓였다. 수혁은 점잖게 고개를 젓는다. “이거 보세요. 얜 물통 하나만 줘도 이렇게 혼자 잘 놀아요. 그에 비해 난 너무 애늙은이가 된 걸까요?” 설마, 그럴 리가.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마당의 벤치에 나란히 앉은 수혁과 성준은 아름다운 청춘 그 자체다. 초여름의 싱그러운 풀냄새가 풍긴다. 둘은 지금 인생에서 가장 푸른 계절을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