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 없는 남자

만약 엘비스 프레슬리가 21세기에 태어났다면 셔츠를 풀어헤치고 다리를 흔들기 전에, 가슴팍의 털부터 제거했을 것이다. 아마존의 밀림처럼 무성했던 남자들의 털이 멸종 위기에 놓였다.

남자들의 바지가 짧아졌다. 19세기 여성 해방 운동의 영향으로 사라졌던 제모가 미니스커트와 민소매 드레스의 등장과 함께 다시 시작되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남자들의 짧은 반바지는 그들의 제모 역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만 같다. “이번 시즌 라프 시몬스 컬렉션에선 아주 짧은데다 트임까지 있는 쇼츠 룩이 쏟아져 나왔어요. 톰 브라운이나 돌체앤가바나는 물론이고, 마이클 바스티안의 여름 룩들은 더 이상 민망하거나 추하지 않죠. 오히려 건강하고 부유해 보여요.” <GQ> 패션팀 박태일 기자는 얼마 전 구입한 꽃무늬 반바지를 입고 논현동 언주로를 당당히 활보하기 위해 곧 윈드서핑과 러닝을 시작할 계획이다. 그는 엉덩이를 간신히 가릴 만큼 짧아진 반바지 패션을 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건 인위적인 제모보다 운동임을 강조한다. “매끈하게 제모한 다리는 보톡스에 물광 주사까지 맞은 볼살처럼 어색하지 않나요?” 하지만 근육 라인이나 구릿빛 피부까지는 운동을 통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 해도 한번 뿌리내린 그 방대한 털은 어쩔 수가 없다. <보그> 패션뉴스팀 손기호 기자는 노출이 가능한 털의 길이를 2cm이내로 한정했다. “그 이상이 되면 징그러워요. 제가 반바지를 포기한 이유죠.”

털북숭이 마초들은 21세기에 걸맞는 진화된 남성이 되기 위해 기꺼이 제모클리닉을 찾는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현한 ‘제국의 아이들’의 광희는 왁싱 테이프로 팔의 털을 제모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컬처 쇼크였다. 만약 엘비스 프레슬리가 21세기에 태어났다면 셔츠를 풀어헤치고 다리를 흔들기 전에, 가슴팍의 털부터 제거했을 것이다. 북슬북슬한 털이 용납되는 건 짐승남 울버린뿐이다. 그나마 늑대인간도 신세대는 털이 없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제이콥을 보라. 아이돌 스타들은 “왁싱을 하고 난 후, 다리에 자신감이 생겼다”며 각선미를 뽐내고, 요즘은 남자 아나운서까지 털에 대한 고민을 털털하게 털어놓는다. “예전엔 다리나 겨드랑이 정도였다면, 최근엔 페이스 왁싱을 많이 해요. 잦은 면도로 피부가 상할 염려도 없고 피부톤이 밝아지는 효과도 있죠.” 청담동 무무 스튜디오의 오현승 대리는 더 이상 왁싱이 모델이나 연기자를 준비하는 일부 젊은 남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했다. 레이저 제모의 메카 강남역 주변엔 남성을 위한 제모 클리닉도 생겼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검은 밀림 같은 팔다리와 우거진 가슴털이 남자다움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털은 곧 ‘권력’을 뜻했다. 삼손의 머리카락은 신이 부여한 힘의 원천이었고, 이집트에서는 오직 파라오만이 깔끔하게 정돈된 수염을 지닐 수 있었다. 유일한 여성 파라오였던 하셉수트 여왕조차 공식 석상에 나설 땐 염소 수염을 붙였다. 60년대에 털은 곧 ‘혁명’을 상징했다. 히피들의 긴 머리카락은 평화를 의미했고,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대통령은 마르크스처럼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 기존의 사회 질서를 거부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깊은 산 속에 면도기가 없었기 때문이긴 하나, “면도를 하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시간을 혁명을 구상하는 데 유용하게 쓸 수 있다”던 카스트로의 말은 그의 수염을 진짜 사나이의 굳은 의지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반면, 미국의 우파 정치인들의 턱과 머리카락은 늘 샌님처럼 단정했다. 한 미국 정치학 교수의 말에 따르면, 1876년 이후 대선에서 수염을 기른 후보가 당선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로커들은 긴 머리카락에 저항 정신을 담았다. 정치적·문화적 혁명가들의 저항 정신이 깨끗이 면도를 당하고 난 후엔 섹슈얼한 이미지만 남았다. 한때 셔츠 사이로 비어져 나온 가슴 털과 구레나룻는 섹시한 남자의 필수 덕목이었다. 일본 공연 도중 열성팬이 뽑은 본 조비의 가슴털한 올은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20여 만원에 팔렸다고 한다. 80년대를 풍미한 이 왕년의 꽃미남 로커는 90년대 후반 들어 영화 촬영을 이유로 가슴털을 왁싱했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아주 오래전 일이다.

야만과 힘의 시대를 지나 저항의 역사를 거칠 때까지 남자다움의 유일한 증거가 되어주었던 털은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완벽히 문명화되었다. 털도 패션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2000년대 초반, 젊은 남자들 사이에선 수염을 예쁘게 기르는 게 유행이었다. 수염 동호회까지 성행했다. 압구정에서 열린 제1회 털 대회의 챔피언은 노홍철이었다. 그의 대단한 수염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까지 칭찬한 바 있다. 하지만 노홍철은 10년간 길렀던 수염을 잘랐다. 지난해 봄이었다. (지금은 다시 길렀지만)면도기 브랜드의 광고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개봉한 영화 <러브픽션>에선 겨드랑이 털을 기르는 여자와 그 털을 사랑한 나머지 “모자도 털모자만 쓰고, 만두도 털보만두만 먹고, 성격도 털털하며, TV도 디지털”만 사용한다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했다. 물론 알래스카가 아닌 한국에서 겨드랑이 털을 기르는 여자는 거의 없지만, 고대 알래스카의 얼음 속에 냉동되었던 털에 대한 고정관념이 순식간에 해동되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왁싱 스튜디오의 홍보 담당자는 남자들의 털 관리에 관한 색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거 아세요? 요즘엔 브라질리언 왁싱을 하는 남자들도 많다는 거! 외국 생활을 오래한 분들은 당연한 관리로 생각해요. 미용상의 이유나 성감을 증진시키는 목적도 있지만, 항문 쪽 털 관리가 포함되어 위생적인 측면에서도 좋거든요. 한번 받아보면 계속 찾게 돼요. 확실히 다른 걸 느끼죠.” 금전적, 시간적 여유는 둘째 치고, 체 게바라의 혁명 정신과 맞먹는 강도의 오픈 마인드가 필요할 것만 같다. 혹시 또 모른다. 20세기 초, “겨드랑이에 털이 있는 여성은 아름답지 않다”는 광고문구로 히트를 친 면도기 회사가 이번엔 그 주어의 성별과 부위를 바꿔버릴지도. 아마존의 밀림처럼 무성했던 남자들의 털이 멸종 위기에 놓인 지금, 특별히 아쉬운 마음은 없다. 다만 아직까진 일회용 팬티를 입고 관리실에 누워 온몸의 털을 한 올 한 올 정리하는 슈퍼맨을 상상하고 싶진 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