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사람들

자동차 공업소와 인쇄소, 가죽 공장들이 즐비했던 성수동에 변화가 감지된 지 오래다. 예술가들의 뒤를 이어 패션 디자이너들이 모여들면서, 더욱 새롭고 창조적인 기운으로 충만해진 그곳, 성수동 변화의 현장 속으로!

성수동 인쇄소 공장 건물 3층 앤디앤뎁 사무실에 모인 스태프들. 샘플을 만드는 '선생님’들과 디자이너들, 그리고 관리팀이 함께 모여 환하게 웃고 있다.

“다음은 어디일까?” 민첩한 감각을 지닌 사람들끼리 모이면 서울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90년대 청담동에 몰려 있던 패션과 예술계 사람들은 이미 서울 곳곳으로 일사분 란하게 흩어졌다. 포화 상태에 이른 신사동 가로수길, 한남동과 경리단길, 해방촌까지 펼쳐진 이태원, 합정역과 상수역과 연남동을 아우르는 홍대, 한적하고 부티 나는 도산공원 인근은 서울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동네다. 여기에 남다른 ‘촉’을 지닌 이들은 어두컴컴한 문래동 철공소 골목, 우아한 기운이 깃든 성북동 언덕길, 서촌 안에 숨은 효자동과 인동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2013년 지금, 빠질 수 없는 동네가 바로 성수동이다. 쪽으로는 한강, 북쪽으로는 중랑천, 서쪽으로는 서울숲, 동쪽으는 건대 거리를 경계로 둔 성수동 1가와 2가는 인쇄소와 가죽 공장으로 유명했다. 70년대에 건설된 붉은 벽돌의 낡은 공장 건물들과 거대한아파트형 공장들, 그리고 자동차 수리소가 늘어선 이 동네는 아직 세련된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라운지 음악보다 화물 트럭의 경적 소리가 더 울린다. 하지만 이곳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서울숲 덕분에 탁한 연기 대신 푸른 기운이 가득하고,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는가 하면, 과거 시멘트 공장이었던 뚝섬에는 무려 110층 고층 건물이 건설될 거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하지만 성수동의 진정한 변화는 번쩍이는 새 건물들 때문이 아니다. 성수동을 가로지르는 고가철도 아래 멋쟁이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10년 전부터 구두 공장을 드나들던 구두 디자이너부터 화려하게 치장한 청담동 쇼룸 대신 작업실 미싱 소리가 정겹다는 패션 디자이너, 그리고 오래된 철공소 공간을 그대로 자기 것으로 만든 아티스트들까지. 서울에서 또 하나의 흥미진진한 동네로 변신하고 있는 성수동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ANDY & DEBB

앤디앤뎁 디자이너 김석원과 윤원정이 성수동의 어느 인쇄소 건물 3층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청담동 언덕의 우아한 아틀리에 대신 이곳을 선택한 건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사실 이곳은 공장으로 운영하기 위해 구했습니다.” 2002년쯤, 늘어나는 생산량을 감당하기 힘들어 압구정동 공장 대신 널찍한 이곳을 찾은 것이 시작이었다. 지금은 디자인팀부터 관리직, 샘플을 생산하는 ‘선생님’들까지 모두 이곳에 모였다. “강남을 벗어나면서 시야가 확 트인 느낌입니다. 강남에 있으면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밖에 보지 못하잖아요. 하지만 이곳에선 다양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넓어진 시야 덕분인지 그동안 많은 것을 이루기도 했죠.” 최근 앤디앤뎁 브랜드에 어울리는 예복과 이브닝 라인을 겸한 ‘앤디앤뎁 세리머니’를 론칭한 이 부부가 말했다. “무엇보다 성수동이 좋은 건 그야말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모여 제각각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밖으로 나서면 그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거든요.” 출근과 함께 회사로 들어서면 들리는 재봉틀 소리, 다리미의 스팀 소리는 성수동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새로운 활력소다. 이곳의 ‘험블’한 분위기 때문에 따로 마련했던 2층의 세련된 쇼룸과 디자인 사무실을 닫고, 3층으로 작업실을 옮긴 것도 같은 이유다. 1998년 브랜드를 준비할 때부터 함께했던 ‘미싱 선생님’과 ‘패턴 선생님’들이 그들에겐 무한한 자극제이자 비타민이기도 하기에. “언젠가는 성수동의 역사가 그대로 담긴 벽돌 공장을 구해 앤디앤뎁의 모든 것을 한자리에 꾸며보고 싶어요.” 앤디앤뎁 성수동 스튜디오에서는 오늘도 미싱 소리와다리미 스팀 소리가 경쾌하게 리듬을 맞추고 있다.

성수동 ‘먹자골목’에 꾸민 사무실에서의 레이크넨 디자이너 윤홍미.

Reike Nen

내셔널 브랜드의 액세서리 디자이너였던 윤홍미는 3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구두를 직접 만들기 위해 성수동 구두 공장들을 찾았다. “아마 여기 있는 공장 100곳은 넘게 가봤을 거예요. 그 가운데 제 디자인을 만들어주겠다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죠.” 폭설이 내린 겨울, 성수동을 정처 없이 헤매야 했던 ‘초짜’ 구두 디자이너에게 성수동의 첫인상은 ‘낯섦’ 그 자체였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울 시내에 이런 곳이 있구나 싶었죠.” 하지만 현재는 뉴욕과 런던, 도쿄의 오프닝 세리머니, 홍콩의 오프더월, 도쿄의 카나비스 등 잘 나가는 멀티숍에서 만날 수 있는 ‘레이크넨’ 구두가 성수동의 구두 공장에서 제작되고 있다. “그래서 사무실도 성수동에 마련했어요. 공장과 가깝고 강남과도 가까워 여러 면에서 효율적이었죠.” 구두 공장이 모인 성수동에 있다 보니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회식을 위해 찾은 고깃집 옆 테이블에서 구두 이야기가 들려온 것. “매끈한 구두와 거리가 먼 듯한 아저씨들이 ‘이 구두는 어떻고, 저 구두는 어떻다’라고 토론하는 모습이 재밌더라구요.” 헬무트 랭 구두에 반해 구두 디자이너가 된 그녀는 올가을 새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가로수길에 레이넨 쇼룸 겸 다양한 브랜드 제품들을 모은 멀티숍을 오픈할 계획이다. “구두뿐 아니라 가방과 선글라스 등 소품들도 함께 선보일 예정이에요. 레이크넨 라벨까지 달지는 않지만, 제 취향과 생각이 그대로 담길 겁니다.”

직접 그린 유화 앞에서 포즈를 취한 송지오.

송지오

2000년대 초만 해도 디자이너 송지오를 만나기 위한 간단한 방법은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 위치한 그의 매장을 들르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그는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매장 앞을 쓸곤 했으니까. “그즈음 매장과 사무실 외에 창고형 공간이 필요해 성수동을 찾았습니다. 지금 이곳은 제가 직접 빗질을 하기엔 너무 넓지만요!” 지난 10년간 성수동을 지켜본 그는 최근 이곳의 변화를 몸소 체감하고 있다. “그때만 해도 아주 으스스한 동네였어요. 밤이나 휴일이 되면 거리가 텅 비었는데, 이젠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어요.” 깔끔한 아파트형 공장 건물에 자리한 송지오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 그는 촬영 중이었다. 6월 29일 파리에서 선보일 내년 봄 컬렉션에 사용될 직접 그린 유화를 디지털로 촬영하고 있었다. “직접 그림을 그려 나만의 프린트를 완성합니다. 제게 이곳은 디자인 스튜디오인 동시에 화실이죠.” 네모난 공장 건물에서 탄생되는 창조적인 에너지! 지금 성수동을 전진시키는 동력은 바로 이런 에너지일 것이다.

이사 가는 날. 전기 배선 공사와 페인트 칠이 한창인 공간. 유즈드 퓨처의 디자이너 이동인.

USED FUTURE

“오늘 페인트 칠을 할 거예요!” 최근 성수동의 공업사 건물 2층에 새로 아지트를 마련한 ‘유즈드 퓨처’의 디자이너 이동인에게 전화를 걸자 이렇게 외쳤다. 연립주택과 저층 아파트 사이에 있는 이 오래된 건물이 유즈드 퓨처의 새로운 미래가 쓰여지게 될 공간이다. 하얀 타일로 둘러싸인 건물 2층으로 향하자 전기 배선 공사가 한창이었다. “쇼룸과 작업실을 겸할 공간을 찾았는데 마땅한 곳이 없더군요.” 장충동 작업실을 벗어나 새 공간을 찾기 위해 서울의 이곳 저곳을 이잡듯 뒤졌던 이동인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건물의 독특한 형태와 넓은 공간 때문이다.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자연광도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5월한 달간 신세계 백화점 본점에서 ‘팝업숍’을 열고 이사 준비까지 겹쳐 정신없이 바빴지만, 새 아지트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유아인과 강동원 등 서울 멋쟁이들이 좋아하는 유즈드 퓨처의 옷이 새하얀 공간에서 또 어떻게 성장하고 진화할까?



Daelim Warehouse

4월 말, 봄비가 내리는 성수동 거리 한쪽에 검정 리무진이 모여들었다. 근사하게 낡은 갈색 벽돌 건물이 리무진의 목적지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발렛 직원들이 조용히 오가는 사이, 입구에 자리 잡은 샤넬의 더블 C 로고가 언뜻 눈에 띄었다. 스코틀랜드가 배경이었던 올가을 공방 컬렉션을 선보이기 위해 샤넬이 이틀간 성수동 어느 창고 건물을 에딘버러 외곽의 고성으로 탈바꿈시킨 것. 지난겨울 H&M과 마르지엘라의 협업 컬렉션 파티와 코오롱스포츠의 패션쇼, 반스의 스케이트 파티 등 패션 관련 행사가 끊임없이 열리는 이곳은 대림창고다. 2층 포토 스튜디오는 <보그>를 비롯한 패션 매거진의 단골 촬영지. 오래된 공장 겸 창고였던 이곳을 낡은 모습 그대로 살려 행사장 겸 스튜디오로 바꿔놓자, 서울에서 찾기 힘든 ‘인더스트리얼’한 분위기를 찾는 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대림창고 덕분에 성수동 특유의 매력이 완성된 셈이다. 세련된 감각의 뉴욕 아티스트들이 브루클린의 버려진 창고와 공장을 탈바꿈시킨 것처럼, 성수동의 낡은 건물들이 지닌 가능 성을 맨 먼저 일깨워준 곳이 이곳 대림창고다.

디자인, 샘플 제작, 제품 검사 등 모든 작업들이 이뤄지는 성수동 슈콤마보니 사무실.

Suecomma Bonn ie

얼마 전 10주년을 맞은 슈콤마보니의 이보현 역시 대다수 신인 구두 디자이너들이 그렇듯, 성수동 구두 공장에서 모든 것을 시작했다. 그녀가 청담동 매장 대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도 성수동 구두 공장의 한 구석이다. 슈콤마보니를 구입하는 고객들과 만나는 것도 중요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이 제대로 나오고 있는지 지켜보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지금이야 갤러리아 포레처럼 근사한 빌딩도 들어섰지만, 그때만 해도 압구정동에서 다리를 건너 성수동에 들어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70년대로 돌아온 듯 했어요.” 가죽 원단업체는 물론 실, 금속, 장식 등 거의 모든 재료 공장들이 이곳에 있었기에 그녀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신김치에 막걸리를 팔던 구멍가게들이 사라지고 숙련공들의 숫자도 하나 둘 줄어들면서, 성수동 특유의 ‘거친 맛’이 사라지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지난해 코오롱과 손잡은 이후 본격적으로 성수동에 뿌리를 내리기로 했다. “물론 좀더 나은 건물로 이사할 예정이에요. 이곳 성수동에서 말이죠. 디자인부터 제품 개발, 제작까지 모두 한 곳에서 완성될 거예요.”

(오른쪽부터)아티스트 이광호, 황형신, 서정화가 함께한 성수동 작업실 풍경.

Lee Kwang Ho & Hwang Hyung shin & Seo Jeong hwa

펜디와의 협업으로 패션계에 이름을 알린 아티스트 이광호가 2년 전 성수동에 작업실을구했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성수동의 재발견을 위한 알람 소리였다. 공장 기계음으로 가득한 그곳과 산업 디자이너 겸 아티스트는 꽤 어울리는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제일금속’이란 간판을 달고 있는 이 공간은 이광호와 황형신, 그리고 네덜란드 유학을 마치고 새로 합류한 아티스트 서정화의 작업 재료들과 완성품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여기에 대학 후배 네 명이 임시로 합류하자 유리문에 테이프로 겨우 붙여둔 ‘Work Shop’이란 이름에 걸맞는 작업실 분위기가 완성됐다. “부피가 큰 재료들이나 완성작들이 쉽게 오갈 수 있도록 1층이어야 했습니다. 입구가 넓어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조건은 필요없었죠.” 황형신이 작업 공간을 구하던 때를 추억했다. 황형신이 한쪽에서 레고 조각을 녹일 때, 이광호는 그 옆에서 컬러풀한 전기선을 꼬아 작품을 만들고, 그 사이로 서정화와 후배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공간. 금속 부품이 탄생되던 낡은 공간에서 이제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들이 샘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