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주르, 서진씨 1

완벽한 여행을 꿈꾼다면, 바로 이런 남자가 필요할 것이다. 평균 나이 76세 할아버지들의 배낭 여행기〈꽃보다 할배〉에서 이서진은 온갖 궂은 일을 수행하는 만능 짐꾼이자 친절한 가이드다. H4와 함께 파리 에펠탑과 대만 야시장을 헤매다 돌아온 ‘금잔디 서진 씨’의 피로 만발 배낭 여행기.

흰색 티셔츠는 아미(Ami), 검정 블루종 재킷과 가죽 장갑은 알레그리(Allegri), 허리에 묶은 체크무늬 셔츠와 패치워크 청바지는 디스퀘어드(Dsquared2), 어깨에 멘 백팩은 랑방(Lanvin), 초록색 캐리어는 루즈앤라운지(Rouge&Lounge).

빨간색 셔츠와 하늘색 니트, 체크무늬 바지와 구두는 모두 프라다(Prada), 오버 사이즈 코트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모델이 입은 러플 장식 원피스는 앤디앤뎁(Andy&Debb), 스트랩 슈즈와 선글라스는 프라다(Prada).

불혹의 나이에 배낭여행을 떠난 가련한 남자가 있다. 한때 그는 차가운 도시 남자이자 늠름한 영웅이며, 천하를 호령하던 조선의 왕이었다. 드라마 밖에서는 우수에 찬 눈빛의 ‘미대 형’으로 불리던 유학파 인재였다.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 시작되기 전, 평화롭던 옛 시절의 얘기다. tvN <꽃보다 할배>에서 이서진은 통역사, 관광 가이드, 요리사, 인간 내비게이터, 운전사, 회계를 담당하는 만능 짐꾼이다. ‘걸그룹과의 미술 여행’이라는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H4와 함께 파리행 비행기에 오른 그순간부터 그렇게 정해졌다. 배낭여행이라고는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그가 69세 막내 백일섭의 심기를 살피고, 박근형의 수발을 들며, 술 취한 ‘구야 형’의 뽀뽀 세례를 받고, 난생처음 경험하는 민박집에서 이순재와 동침하는 동안, 프로그램의 인기는 치솟았다. 시청자들은 ‘금잔디 서진 씨’의 가슴 아픈 사연(?)과 소탈한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평균 나이 76세 할아버지들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는 곧 인간 이서진의 탐구생활이기도 하다. 모두가 휴가를 떠나던 그 여름, 여행 대신 고행길에 올라야만 했던 그가 마침내 서울에 돌아왔다.

“무엇을 봤는지, 어디를 갔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납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매 끼니도 챙겨야 하고, 장도 봐야 하고, 호텔도 찾아야 하고, 행선지도 정해야 하고, 계속 길을 찾고, 또 찾고. 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거든요.” 무덤덤한 말투로 이서진이 말했다. 5박 6일간의 대만 여행을 끝으로 비로소 그토록 원했던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그는 모든 것을 초탈한 듯 보였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만이 녹록지 않았을 지난 시간을 짐작케 할 뿐이다. 지난해 대만을 찾았을 땐 저녁을 먹기 위해 두 차례 호텔 밖으로 나온 게 외출의 전부였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직진 순재, 호통 일섭, 시크 신구, 낭만 근형… 개성 넘치는 ‘할배’들과 함께였다. 섭씨 40도가 넘는 대만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이드 역할을 수행한그는 얼굴에 살짝 화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물론 며칠 전 오랜만에 골프를 친 탓도 있다. 그는 골프 마니아다. 아무튼 우리는 이 피로에 지친 여행자를 위해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했다. 지난 파리 건강검진에서 백일섭보다 높은 혈압 수치를 보였던 그를 위해 섹시한 간호사와 길거리표 룸서비스도 준비했다. 익숙지 않은 사진 촬영에 그는 어색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쑥스러워 하는 자신과 달리 카메라 셔터가 울릴 때마다 능숙하게 포즈를 바꾸는 모델의 낯선 모습을 그는 신기하게 바라봤다. “무서워!” 하지만 곧 적응했다. 불쑥 잔 하나를 집어들고는 ‘어서 잔을 채워달라’는 눈짓으로 모델을 재촉하는 등 한 편의 시트콤 같은 상황들이 거듭됐다. “이런 컨셉 재미있네요. 흐흐.” 영 내키지 않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서도 어떤 요구를 하든 한마디 이의 제기도 없이 척척 해내는 것이 이 무뚝뚝한 남자의 매력이다.

코듀로이 소재 남색 상의는 솔리드 옴므(Solid Homme), 가죽 모자는 알레그리(Allegri).

<1박 2일>을 통해 알게 된 나영석 PD의 ‘사기력’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소속사의 합동 자작극이 아니었다면, 이서진이 <꽃보다 할배>에 합류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 그는 ‘걸그룹과의 미술 여행’도 거절했다.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익숙하지 않았다. 잠자리가 불편한 것도 질색이었다. 두 달에 한 번씩은 외국에 나갈 만큼 여행을 좋아하지만 모험가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약 처음부터 사실을 알았다면 누가 따라 갔을까요?” 마음 편히 쉬고 오라는 양측의 설득에 못 이겨 떠난 6월의 프랑스 낭만 여행은 9박 10일간의 혹독한 ‘체험 삶의 현장’으로 돌변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대만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작발표회가 열리던 날, 나영석 PD가 끝나고 둘이서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하더군요.” 뜻밖에도 식당에는 네 분의 선생님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 PD는 그 자리에서 대만 여행 계획을 꺼냈다. 이서진을 제외한 모두가 선뜻 응했다. 당황한 그가 망설이던 순간 대뜸 나 PD가 말했다. “형! 소속사랑 이미 통화했는데, 스케줄 아무것도 없다는데?!” 끝난 게임이었다.

술에 취하지 않고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금잔디 서진 씨’의 나날이 이어졌다. 소주 열 팩을 배낭에 싸 짊어지고 온 할배들이 기분 좋게 취해 방으로 들어간 후에도 그는 혼자 남아 술을 마셨다. “선생님이랑 방을 같이 썼잖아요. 취한 채로 엎어져 잠들어야지 그렇지 않고 자꾸 의식하면 잠을 못 자요. 선생님 주무시는 데 방해가 될까 봐. 숨 소리조차 조심스럽죠.” 낮 동안에는 이국의 멋진 풍경 대신 정보 검색을 위해 스마트폰만 들여다봤다. 뉴욕대 경영학과 출신의 학력과 모 자산운용사의 상무로 일한 경력이 할배들과의 여행 경비를 정산하는 데 활용될 줄은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돈을 많이 못 남겼지만, 대만에서는 꽤 남았어요. 그래서 제작진에게 돌려줬죠.” 내심 그는 빠듯한 예산에도 제법 살림을 잘 꾸렸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그 어떤 업무보다 어려운 건 요리였다. 머나먼 타국에서 한국식 안주까지 준비하느라 그는 혼이 쏙 빠졌다. “집에서는 시켜 먹든가 사 먹죠. 요리를 해본 적이 없어요. 사실 전 맛도 잘 몰라요.” 투덜거려도 할 건 다한다. 다행히 그의 찌개 국물은 할배들의 입맛은 물론,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여성 시청자들의 로망도 충족시켰다. 물론 그가 두 번 다시 그 로망의 주인공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만은 그런 면에서는 프랑스보다 훨씬 편했다. 할배들은 중국 음식을 좋아했다. 게다가 이번엔 싹싹하고 명랑한 ‘소녀시대’의 써니가 옆에 있었다. 써니는 ‘서지니’를 대신해 요리사로 나섰다. 나 PD에 대한 원망도 그와 동시에 사라졌다. “진짜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구나 싶더군요. 흐흐.” 이서진이 써니의 삼촌 팬이라면, 신구는 이서진의 할배 팬이다. 파리 여행 중에 한창 흥이 난 신구는 속 깊은 그의 마음 씀씀이가 기특한 나머지 볼에 뽀뽀를 했다. 정작 이서진은 방송을 보고 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전 그때도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신구 선생님과는 대만 여행에서 비로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어요. 네 분이 함께하시는 동안엔 전 끼어들 수가 없잖아요. 어디까지나 선생님들을 보필하는 역할이니까.” 아무리 부정해도 그는 타고난 가이드다.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알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안다. 책임감도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