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주르, 서진씨 2

완벽한 여행을 꿈꾼다면, 바로 이런 남자가 필요할 것이다. 평균 나이 76세 할아버지들의 배낭 여행기〈꽃보다 할배〉에서 이서진은 온갖 궂은 일을 수행하는 만능 짐꾼이자 친절한 가이드다. H4와 함께 파리 에펠탑과 대만 야시장을 헤매다 돌아온 ‘금잔디 서진 씨’의 피로 만발 배낭 여행기.

패치워크 코트는 준야 와타나베(Junya Watanabe), 터틀넥 티셔츠는 우영미 옴므(Wooyoungmi Homme), 배낭은 코오롱스포츠(Kolon Sports), 담요는 엔지니어드 가먼트(Engineered Garments at Sanfrancisco Market).

이서진의 이러한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사람은 이순재의 매니저였다. 드라마 <이산>을 촬영하는 내내 변함없는 태도로 어른을 대하는 모습에 감탄해 이번 프로젝트에 적극 추천했다. “이순재 선생님 아들이 저랑 동갑이에요. 제 친구들이랑 다 동창이고, 딸은 옛날에 저랑 미국에서 같이 공부했고요.” 이순재를 보면 그는 박학다식하고 현대적이었던 친할아버지가 떠오른다고 했다. 원로 금융인으로 유명한 할아버지는 유난히 막내 손주를 예뻐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둘이서 함께 여행도 자주 다녔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땐 미국에 오실 때마다 저랑 여행을 했어요. 전 한국에만 오면 할아버지랑 꼭 둘이서 점심을 먹었고요. 아버지랑은 못 하는 얘기도 할아버지에겐 털어놓을 수 있었어요.” 돌아가신 아버지와 가장 비슷한 사람은 백일섭이다. 술 좋아하고 무뚝뚝한 편이었던 아버지는 앞에서는 아들의 배우 생활을 반대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언제나 응원해주었다. 3대가 함께 여행을 떠난 적도 제법 있다 “그런 경험이 지금까지 제 인생에 도움을 주었다면, 이번 여행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어요. 저도 모르게 몸에 밴 부분이 있겠죠.”

박근형과는 드라마 <불새>와 <그 여자네 집>을 함께했다. 신인 시절에 만난 박근형은 무섭고 엄격한 스승이었다. “선생님이 작품이 잘된다 싶으면 더 욕심을 내는 편이세요. 모든 연기자들이 다 연기를 잘하게끔 만들고 싶어 하시죠.” 연기에 대한 열정은 4인방 모두 대단하다. <꽃보다 할배>의 카메라는 종종 스트라스부르의 비좁은 침대 위에서, 혹은 달리는 차안에서 돋보기를 쓰고 대본을 들여다보는 할배들의 모습을 비춘다. “대단한 분들이세요. 그 많은 배우들 중에서 살아남은 거니까. 저도 그런 열정이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오래 가는 배우가 되겠죠.” <꽃보다 할배>의 젊은 짐꾼 역시 어느덧 40대다. 2011년 <계백> 이후, 그는 한동안 작품 활동을 쉬고 있다. 연기자로서의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대본을 기다리는 중이다. 케이블과 종편까지 가세해 시청률 경쟁이 치열해진 요즘, 드라마는 양적으로 증가했지만 그에 비해 오랜 시간 치밀한 공을 들여야 하는 전문 드라마의 수는 줄었다

남색 수트와 셔츠는 플레이 바이 그레이하운드(Play at Greyhound), 버건디 색상의 구두는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모델의 흰 캐시미어 재킷은 발망(Balmain), 슬립 톱은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레이스 슬립은 돌체앤가바나, 선글라스는 미우미우(Miu Miu), 싸이하이 부츠는 구찌(Gucci).

“요즘은 크게 남 의식하지 않고 자기 일 열심히 하면서 살려고 해요. 어른을 만드는 건 시간인 것 같아요.” 법 질서 잘 지키고, 도덕 중시하고, 부모 얼굴에 먹칠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창피하지 않도록 사는 것. 이서진이 생각하는 바른 삶의 기본이다. 물론 그 기본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지난해 초 그는 일본 아오모리 현의 미술관에서 도예전을 열었다. 우연한 기회에 백제 시대 도자기 기술이 일본에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마음먹고 도자기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마침 일본에서는 드라마 <이산>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2006년부터 시작한 해비타트 봉사 활동도 계속하는 중이다. 연기자라는 직업인으로서 그는 멋지게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만약 이서진이 아니었다면 <꽃보다 할배>의 짐꾼 역할을 대체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저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모르겠더군요. 제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이 일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희망은 시련의 언덕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던가? 무릎이 아픈 ‘푸우 일섭’을 모시고 몽마르트 언덕을 올랐던 이서진의 인기는 요즘 뜨겁다. <꽃보다 할배>는 화제의 중심이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기구한 운명을 받아들인 그가 묵묵히 현실을 견디며 할배들의 쾌적한 여행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때마다 이 가련한 짐꾼을 향한 응원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는 효도 관광에 나선 착한 아들딸을 대표했다. 프로그램이 큰 반향을 일으키자 타 방송국에서도 중견 여성 연기자들의 여행기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들린다. “할머니든 할아버지든 저로선 굳이 그런 걸 상상하고 싶지가 않네요. 할아버지 네 분만으로도 이미 충분해요.” 영광의 피로를 남긴 대만 편은 9월 말까지 방송된다. 그 다음은? 이서진은 자신이 다시 이 여행에 참여할 일은 없을 거라 장담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예측불허 ‘꽃할배’ 4인방의 마음속과도 같은 것. 다음 번에 만난 서진 씨에겐 씨에겐 ‘봉주르’ 대신 어떤 인사를 건네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