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디올’로 변신한 전지현 2

CF 퀸이자 스타일 아이콘이었던 그녀가 여배우로서 그리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줄 누가 짐작했을까? 명실공히 대한민국 톱 여배우 서열 맨 위칸에 오른 그녀가 〈보그 코리아〉카메라 앞에 섰다. 새롭게 해석된 ‘뉴 룩’과 새롭게 평가되는 여배우 전지현 사이엔 분명 닮은 점이 있다.

더스트 핑크색 뷔스티에 위에 언밸런스한 새틴 케이프를 두르고 검정 러플 스커트를 입었다.

더스트 핑크색 뷔스티에 위에 언밸런스한 새틴 케이프를 두르고 검정 러플 스커트를 입었다.

데님 소재로 모던하게 변신한 무슈 디올의 위대한 유산 1호, 바 재킷과 팬츠.

데님 소재로 모던하게 변신한 무슈 디올의 위대한 유산 1호, 바 재킷과 팬츠.

심플함은 그녀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열쇠다. 그건 고등학생 때부터 연예 활동을 시작한 16년 차 여배우가 경험으로 체득해 자연스럽게 장착한 특징이다. 창작과 표현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자의든 타의든 자신을 힘들게 몰아붙이며 괴로움 속에서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 따위는 일찍부터 버렸다. “저는 제 스스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연기를 시작했어요. 일이 없을 때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쉬운 길을 어렵게 꼬아서 돌아간 적도 있죠. 제가 얻은 결론은 몸과 마음이 편해야 현장에서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거예요. 결핍감? 그런 거 몰라요. 예민해지거나 징크스에 시달리면 저만 피곤해진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건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도 피곤해지는 일이고, 저는 상황을 그렇게 만들 배짱도 없어요.”

그건 그녀가 흥행이 시원치 않은 작품들을 내놨을 때, ‘이제 전지현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등장했을 때보다도 훨씬 전에 자리 잡힌 성격 같다. 이제 와 영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시절의 연기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묻자 그녀가 이렇게 대답했다. “살아 있죠. 즉흥적이고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표현할 때였거든요. 제가 웬만하면 후회하지 않는 성격인데, 어렸을 적 모습을 작품을 통해 좀더 많이 담아둘걸, 하는 아쉬움은 조금 있어요. 뭔가를 하려고 맘 먹고 하는 연기보다 순수하게 살아 있는 연기가 더 그리울 때도 있어요.” 이미지와 신비주의로 싸여 있던 10대 시절이 조금이라도 아쉽게 남아 있을 거라는 짐작을 그녀가 다른 각도로 뒤엎는 순간. 배우이자 스타로서 전무후무한 ‘물성’을 지녔던 그녀에게서 왜 어떤 아쉬움을 찾아내려고 했을까? “물론 어릴 적엔 회사의 관리를 잘 받았고,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하지만 저는 과거에 대한 답답함이 없어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기 때문이에요. 일하는 현장에선 저를 곧잘 내려놔요. 뭐든 열심히 했고, 지금도 그래요. 열심히 해야 그게 다 제 것이 되는 기분이에요.”

배우로, 광고 모델로 카메라 앞에 서는 그 어느 순간에든, 그녀는 단순명쾌하게 그저 최선을 다한다. 이번 촬영 현장은 소란스럽고 감격에 겨운 공기 없이 무난하고 담백하게 흘러갔다. 그녀에겐 “정말 예뻐요!” 같은 과장된 추임새를 넣어줄 필요도 없다. 전지현은 주변의 북돋움에 드디어 미소를 지으며 탁월한 장면을 보여주는 여배우 타입이 아니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만으로 어느 정도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스타놀이란, 적어도 그녀와는 거리가 먼 얘기다.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전지현에겐 몸을 사리지 않는다는 말과도 비슷하다. 처음 그녀를 스타로 만든 프린트기 광고나 최근에 나온 휘슬러 광고에서 인상적인 건 몸으로 표현하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외적인 분위기 자체이자 활용하기 좋은 재료로서의 몸. 여배우가 상대와 교감하는 연기로 어떤 정서를 자아내기 전에, 전지현은 남자들과 함께 서 있는 앙상블만으로도 영화적 폭발력을 자아낸다. 그녀는 매일 아침마다 2시간 가까이 헬스 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샤워를 마친 후 무언가를 시작한다. 아침형 인간에 체력까지 뒷받침되니, 촬영을 강행하고도 집에 들어가 ‘뻗는’ 일은 거의 없다.

새틴 소재 흰색 튜브 톱에 플라워 일러스트 장식 슬릿 스커트를 입고, 숄 칼라의 클래식한 회색 트위드 코트를 걸쳤다. 어빙 펜의 뮤즈, 리사 폰사그리브즈가 오버랩되는 순간!

새틴 소재 흰색 튜브 톱에 플라워 일러스트 장식 슬릿 스커트를 입고, 숄 칼라의 클래식한 회색 트위드 코트를 걸쳤다. 어빙 펜의 뮤즈, 리사 폰사그리브즈가 오버랩되는 순간!

리본 칼라의 빨강 오버 사이즈 코트 또한 무슈 디올의 유산 중 하나. 안에는 검정 민소매 니트와 언밸런스한 디자인의 볼륨 스커트를 입었다.

리본 칼라의 빨강 오버 사이즈 코트 또한 무슈 디올의 유산 중 하나. 안에는 검정 민소매 니트와 언밸런스한 디자인의 볼륨 스커트를 입었다.

“<도둑들>로 배우 생활의 분기점을 맞았는데, 그러고 나니 결혼을 했네요.(웃음)” 어쩌면 분기점은 작품이 아니라 결혼일 수도 있겠다고 그녀가 스스로 말했다. “결혼을 하니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에요. 그만큼 편안해요. 어렸을 때부터 기본이 잘 갖춰져 있어야 뭐든 잘해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기본과 중심을 강조하는 건 운동할 때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드러낼 일 없어도 그녀는 복근 운동에 치중한다(“몸의 중심인 배가 잘 잡혀야 모든 운동에 효과가 있어요. 자세를 바르게 할 때도 허리만 펴서는 안 되고, 복근에 힘을 주고 허리를 펴야 해요”). 결혼 얘기를 하면서, 그녀는 과거 자신이 신기할 정도로 일 생각만 하고 살았다거나, 웬만해선 힘들게 생각하지 않는 자신과 달리 섬세한 성격을 가진 남편이 주로 자신에게 더 기대는 편(“전 아무렇지 않은데, 남편은 곤란하게 느끼는 일들이 있죠. 대신 꼼꼼함과 세심함을 요구하는 부분에선 제가 기대게 되고요.”)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배우의 결혼 생활에 대한 시시콜콜하고 구체적인 얘기들보다 중요한 건, 전지현이 결혼으로 인해 좀 더 현실감을 갖춘 인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이미 20대 초반에 화려한 커리어를 보여준 그녀. 여느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생활과 쉽게 매치되지 않았던 그녀는 ‘변신’에 대한 강박 없이도 자연스레 조금은 달라진 뉘앙스를 지닌 여배우가 됐다. 화보를 촬영하는 동안 그녀는 새빨간 오버 사이즈 코트와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긴 검정 코트를 입거나, 자수가 놓인 흰색 스커트 위에 클래식한 회색 코트를 걸치고 모델 같은 포즈를 취했다. 디올 하우스의 위대한 유산인 ‘뉴 룩’이 여전히 보존됐거나 혹은 조금씩 변형된 의상들이었다. 그녀가 과거와 현재가 혼용된 의상을 입고 ‘열심히’ 포즈를 취할 때, 촬영 전 상이 잡히지 않았던 추상적 이미지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하운드투스 체크 패턴의 니트 톱 위엔 꾸뛰르적 터치가 가미된 심플한 검정 트위드 재킷과 팬츠를 매치했다. 의상과 슈즈, 백, 액세서리는 모두 디올(Dior).

하운드투스 체크 패턴의 니트 톱 위엔 꾸뛰르적 터치가 가미된 심플한 검정 트위드 재킷과 팬츠를 매치했다. 의상과 슈즈, 백, 액세서리는 모두 디올(Dior).

“여배우에게 아름다움은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일 거예요. 식상한 말이지만, 내면의 아름다움과 나이대에 맞는 아름다움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어릴 땐 티셔츠 하나만 입어도 예쁜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뭘 걸치게 된다고들 하죠. 뭔가를 걸치지 않아도 아름다운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렇게 살다 보면 관객들이 원하는 아름다움과도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화보 촬영 후 화장을 말끔히 지운 전지현이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아름다움이 성형으로 가꾸는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건 분명하다.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어떻게 그 유혹에서 오롯이 비껴나 있었을까? “에이, 전혀 손 안 대고 사는 사람이 세상엔 더 많은데요, 뭘.”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선 일단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믿는 여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과거의 익숙했던 아이콘에서 새로운 존재감으로 나타난 여배우. 아직 언급하기엔 이르지만 예상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조만간 그녀를 드라마에서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1999년 <해피투게더> 이후 이제야 출연하는, 그녀의 첫 드라마 주연작이 될 것이다. 스크린보다 현실감 있는 브라운관에서 만날 전지현은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또 현실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