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이>의 김윤석과 여진구 1

소년 여진구는 좀더 자랐고, 중년 김윤석은 여전히 스크린을 압도하는 기운을 풍긴다. 그들이 아들과 아버지로 대립한다. 장준환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는 스릴러 영화, <화이>는 악의 끝까지 치닫는 비극이다.

가죽 재킷은 자라 맨(Zara Man), 흰색 셔츠는 길 옴므(Gil Homme), 반지는 구찌(Gucci),


5명의 범죄자가 있다. 그들은 돈을 목적으로 아이를 유괴했다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엉뚱하게도 그 아이를 키우게 된다. 5명의 아버지를 둔 소년, 그리고 14년이라는 시간. 소년이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영화 <화이> 줄거리다. 이 어두운 영화의 존재는 그동안 충무로에 잠복해 있었다. 영화 개봉 훨씬 전에도 최소한의 스틸컷이나 현장 사진이 발 빠르게 도는 세상이건만, <화이>는 스틸컷 한 장과 ‘한 발의 총성 이후, 모든 것이 뒤바뀌어버린 소년의 복수극’이란 한 줄 정도만이 떠돌았다. 기대감을 끌어올린 요인은 우선 감독 이름이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 이후엔 배우 문소리와 결혼한다는 소식으로 이름이 오르내린 장준환 감독. 그의 문제적 데뷔작은 극장에서 사라진 뒤에야 ‘비운의 명작’으로 불리며 영화계에서 습관처럼 회자됐다. 그러니 감독의 ‘그 다음’이 충분히 궁금할 수밖에. 당신이 10년 만에 현장으로 돌아온 감독이라면, ‘아버지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소년’과 ‘무시무시한 범죄자 집단의 리더’로 누구를 캐스팅할 것인가?

여진구는 극중 화이의 나이와 같은 17세다. 그가 드라마 <해를 품은 달>로 누나들의 레이더망에 들어왔을 땐 막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갔을 무렵이다. 30대 여자들이 한 해를 넘길 때마다 느끼듯, 사춘기 학생에게도 중3과 고1은 하늘과 땅 차이다. 반팔 티셔츠를 입고 스튜디오에 들어온 여진구에게서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벌어진 어깨였고(누군가 그 어깨를 두고 ‘세상 넓은 줄 아는 어깨’라고 표현했다), 그가 “연우야!”라고 소리 높여 부를 일 없이 낮고 굵은 음성으로만 얘기할 때면 주변이 함께 진동하는 기분이었다. “화이는 자기 가족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사회에 나가질 못해요. 학교도 안 다니고. 삼촌들과 사는 기분이 아니라, 정말 아버지가 5명 있다는 기분으로 살아요. 처음 시놉시스를 봤을 때 그 점이 흥미로웠어요.” 여진구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자기 또래 소년이 처한 상황에 몹시 안타까움을 느꼈다. 평범한 일상 속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대신, 자기만의 위장 방법으로 교복을 입고 다니는 아이. 가장 다정한 성격의 아버지 옆에선 평범한 17세로 돌아오기도 하는 소년이다. 그는 범죄와 살인에 능한 아버지들에게서 각각의 특기를 물려받는다. 각자의 캐릭터가 분명한 아버지들 역은 조진웅, 장현성 등이 맡았다.

가죽 블루종은 아이러니 포르노(Irony Porno).


김윤석은 이 집단의 리더이자, 화이가 가장 무서워하면서도 존경하는 아버지다. 그와 ‘리더’는 썩 잘 어울린다. <도둑들>의 큰 판을 쥐고 있던 마카오 박, “4885, 너 맞지?”로 시작해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매섭게 몰아붙이던 <추격자>의 전직 형사에게서 받은 인상 때문일까?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영화의 키워드는 복수이기도 하면서, 한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온다는 필연의 법칙을 담고 있습니다. 세대가 교체될 땐 큰 고난이 따르겠죠. 하지만 어찌됐든 다음 세대에는 좀더 나은 세상이 오길 우리 모두가 소망합니다. 저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아주 클래식한 연극이 떠올랐어요. 셰익스피어 극이나 그리스 비극들을 보면 왕과 후계자의 갈등과 그 교차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죠. 그 밑에 복수라는 것이 깔려 있고요.” 그는 장준환 감독이 아주 개성 강한 사람이고, 신뢰 가는 감독이라고 했다. “10년 만에 영화를 찍는데도 이를 악문다는 느낌이나 강박이 없어요. 자연스럽고, 자기 페이스를 유지합니다. 그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굉장히 정적인 가운데에서도 동적일 수 있는 사람이에요.”

디렉션을 내리기보다 대화를 하며 실마리를 풀어 갔던 감독은 여진구에게도 똑같이 대했다. 17세 배우가 성인 남자들에게 복수를 감행하는 역을 맡을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아무리 눈빛이 좋은 아역 배우가 있다 해도, 피와 눈물이 섞일 스릴러 영화에서 함부로 큰 짐을 지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 경력 9년 차의 준비된 10대 여진구가 있었다. 첫 영화 <새드무비>의 오디션장에서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해보라’는 조감독의 말에 대성통곡을 했던 여진구다. 이제 그는 절절한 연기를 위해 부모가 하늘나라로 가는 상상 따윈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대본을 보며 감정을 추스른다.

김윤석이 입은 검정 송치 재킷, 화이트 셔츠, 터틀넥 티셔츠, 팬츠는 씨와이초이(Cy Choi), 베스트는 길 옴므(Gil Homme), 롱 부츠는 장광효(Chang Kwang Hyo Caruso), 여진구가 입은 검정 수트와 흰색 셔츠는 디올 옴므(Dior Homme), 롱부츠는 아이러니 포르노(Irony Porno).


“이번 작품은 감정선을 잡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악의 무리 속에서 자라는 아이인데 악에 섞이진 않고, 그렇다고 선하지도 않아요. 한마디로 복잡한 아이죠. 대본을 읽을수록, 얘기를 할수록 바뀌는 부분이 많았고, 현장에서도 바뀌는 것들이 있었어요. 오죽하면 마지막 촬영 날 감독님과 서로 ‘우리 정말 수고한 것 같다’고 했다니까요.” 여진구는 드라마 <해를 품은 달> <보고싶다> <자이언트>에서도 감정의 파고를 겪는, 즉 어린 나이지만 한 작품 안에서 톤을 바꿔야 하는 연기를 했다. ‘단언컨대’ 천진함이 남아 있는 소년에서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 뒤 돌이키기엔 늦어버린 상황을 감당해가는 설정은 여진구에게 굉장한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많은 소년들의 ‘상상계’에나 존재하는 총도 잡아봤다. “남자다 보니까 총 잡는 일이 기대됐죠. 화약이 든 총을 쏴 봤는데 생각보다 소리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랐어요. 가벼운 마음으로 쐈다가 귀에서 계속 ‘삐’ 소리가 나더라고요, 흐흐.”

김윤석은 의젓하고 다부진 여진구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진구가 꽃미남과가 아니라서 굉장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 계보를 잇게 하려고… 하하.” 여기서 ‘우리’가 누구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선이 고운 남자들이 21세기 얼굴인 것처럼 쏟아져 나올 때, 잊고 있었던 ‘남성’을 문득 일깨워준 몇몇 배우들이 있다. 여진구의 희망찬 미래야 차차 기다리면 될 것. 김윤석은 잘생긴 중년이고, 얼굴의 기운만으로 스크린을 압도할 수 있는 남자 배우 중 하나다. 그는 영화 속 하나의 강렬한 캐릭터가 수많은 매체들을 타고 눈덩이처럼 불어나, 작품 외엔 미디어에 노출될 일 없는 자신에 대한 인상을 만든 것 같다고 했다. “배우는 간택 당하는 존재입니다. 배우로서의 목표를 정해도 간택되지 않으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요. 경직된 목표를 세워두기보단 매 순간 유혹에 빠지지 않고 좋은 작품, 가치 있는 작품을 해야겠다는 정도를 생각해요.” 안경을 끼고 수염이 적당한 김윤석이 ‘생활 멜로물’ 속의 지식인을 연기하면 어떨까? 그는 <완득이>의 동주 선생 상태에서 공부를 더한 교수 역할을 말하는 거냐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