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명과 김민정 2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그들. 현모양처의 이면에 수상한 과거를 숨기고 있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의심하며 한바탕 소동을 치르는 남자. 천정명 과 김민정이 로맨틱 코미디 영화 <밤의 여왕>에서 흥미로운 커플 스토리를 펼친다.

김민정이 입은 짙은 남색 원 숄더 드레스는 랑방(Lanvin at Mue), 구두는 지니 킴(Jinny Kim), 반지는 벨앤누보(Bell&Nouveau).

천정명이 입은 벨벳 재킷과 흰색 셔츠, 식물 무늬 팬츠, 페이턴트 구두는 모두 구찌(Gucci).

김민정이라는 여자
김민정은 눈으로 말한다. 눈이 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눈에 많은 표정을 담게 된다. 거기에 대한민국의 그 어떤 여배우보다 살이 차 오른 입술까지 지녔으니, 김민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또박또박 자기 입장을 밝힐 때면 표정만으로도 그 속내를 알 수 있다. “우리 얘기할 때 녹음 안 할 수 있을까요? 녹음을 하면 기자님들이 얘기할 때 집중을 잘 안 하는 것 같아서요.” “지금 그 얘기 좀더 자세하게 해줄래요? 뭔가 마음에 간직하고 싶은 얘기예요”라고 분명한 표정으로 말할 때는, 김민정이 이 업계의 모두가 극진히 대하고 대중이 선망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이웃집 평범한 여자였어도 누구든 그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밤의 여왕>의 ‘밤의 여왕’은 물론 김민정이다. 음식 잘하고, 내조도 잘하며, 3개 국어를 구사하는 지성까지 갖춘 이 여자 주인공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여자이자 아내다. 그리고 ‘좀 놀았던 여자’가 과거를 청산하고 행복한 주부로 산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살면서 한 다리만 건너면 존재하는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여자가 여우는 아니에요. 여우라면 대단한 남자를 상대로 과거의 흔적들도 충실히 지웠겠죠. 극 중 천정명 씨는 평범한 보통 남자이고, 여자는 그저 과거가 상처여서 감출 생각을 했던 것뿐이에요.” 김민정에게 이런 여자는 캐릭터를 분석하고 이해해서 접근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마음이 먼저 간 대상이었다. “끌리는 데는 이유가 없어요. 배우들은 시나리오 제목만 보고도 느낌이 올 때가 있죠.”

그리고 <밤의 여왕> 예고편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제적 대사가 김민정의 입에서 나온다. 그녀는 해골 모양 병에 담긴 술을 벌컥벌컥 원 샷 하더니, 빈 해골 병을 탁 내려놓고 눈을 치켜뜨며 천정명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갈아서 이거 채운다?” 여자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그 대사를 할 때의 김민정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비록 천정명은 참하던 아내의 돌변에 기겁해서 흠칫거리지만. “하하. 감독님이 그런 대사를 아주 잘 써요. 제가 화장실에서 욕을 내뱉는 장면도 있어요. 와, 저는 한 번도 입에 담아보지 않은 말들이었어요. 그런 장면들을 처음 찍어봤더니 한편으로 속이 시원했어요.” 김민정에게 오늘 <보그> 카메라 앞에서 그 도발적인 면을 꺼내달라고 주문했다. 부엌을 어지럽힌 음식들마저 액세서리로 만들어버리는 여자. 그녀가 살림 따위는 내팽개치는 위기의 주부라고 해도, 남편을 ‘갈아’ 술병을 채워버린다고 협박하는 여자라고 해도, 김민정에겐 사랑스러운 면이 남아 있다.

천정명이 입은 연보라색 수트와 연회색 셔츠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카무플라주 타이는 자라(Zara), 김민정이 입은 검정 뷔스티에는 H&M, 감색 스커트는 디올(Dior), 쁘띠 스카프는 미우미우(Miu Miu), 팔찌는 벨앤누보(Bell&Nouveau).

23년 전부터 카메라 앞에 선 김민정에게 ‘흑역사’란 남의 사정이다. 그녀는 적지 않은 여배우들이 겪는 ‘충격, 졸업 앨범(혹은 성형 전) 사진 공개’ 같은 일 때문에 진땀 흘릴 일 없이 우리가 기억하는 어릴 적 모습 그대로 성숙하게만 자랐다. 김민정 곁엔 늘 어머니가 있었고, 연예인 생활이 또래 사이에서 튄다고 생각한 어릴 적 김민정은 교복 밑에 신은 양말 길이나 땋은 머리 스타일까지 준수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카메라 앞에는 좀 서본 여자, 그러나 90년대에 유행하던 날라리 힙합 스타일 차림으로 놀 일은 없었던 여자는 여주인공이 지닌 비밀의 과거를 재현하기 위해 춤과 액션을 따로 익혀야 했다.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치고는 여주인공이 해야 할 일들이 꽤 많았다. “춤을 좋아하긴 하는데, 이번엔 정확한 장르와 스타일에 맞게 춰야 했어요. 귀여운 춤, 섹시한 춤, 힙합 스타일 춤을 배웠죠. 혼자서 몇 명과 싸우는 장면을 위해 액션 연기도 해봤고요. 연기하면서 이렇게 몸을 써본 건 처음이에요. 세상에 호락호락한 일이 없다는 걸 느꼈다니까요?”

지난해 말 <보그>와 인터뷰를 할 때, 김민정은 또래 배우들이 짊어지기 힘든 고민에 대해 털어놨다. 연기를 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준다는 이 완벽주의자는 자신만큼 주변이 따라오지 않는 듯한 느낌에 지쳐서 일을 관두고 싶은 적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중년 배우나 털어놓을 법한 그 고민 뒤에는, 또래 여배우들이 예뻐 보이는 일이나 이미지 관리에 치중할 때 나이가 무색한 연기를 주로 한 그녀의 지난 경력들이 있다. 김민정에게서 딱히 떠오르는 하나의 캐릭터가 있던가? 영화 <음란서생>과 드라마 <아일랜드>는 물론 여전히 기억에 남지만, 그녀는 대중에게 각인될 만한 캐릭터를 맡기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연기를 충실히 해내는 쪽이었다. 그녀에게 들어오는 대본의 90%는 늘 슬픔과 아픔이 있는, 그래서 실력이 부족하면 금방 티가 나는 역할들이었다. “저를 대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크게 두 가지 감정을 느껴요. 어떤 분들은 제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저에게 친근함을 표하죠. 대부분 어머님 세대들이에요. 반면에 오래 연기 활동을 했는데도 어떤 분들은 저를 아주 멀게 느끼는 것 같아요. 네, 저는 사실 시청자나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없어요.”

그녀는 서른을 갓 넘기고 나서야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작품들을 택했다. tvN 드라마 <제 3병원>, 지난해 말 개봉한 영화 <가문의 귀환>도 그런 맥락이었다. 여기에 <밤의 여왕>을 거쳐 그녀가 자신의 연기적 재능보다 주변에 있을 법한 젊은 여자의 매력을 좀더 드러내 보인다면, 김민정의 존재감은 점점 커질 것이다. 사실 그녀는 사적인 모습이 더 흥미로운 여자다. “누군가를 웃기는 재주는 별로 없는데, 하는 짓이 엉뚱하다는 소릴 많이 들어요. 친구들은 저에게 백치미가 있다고 하죠.(웃음) 엉뚱하기만 하면 절대로 매력적일 수 없어요. 야무질 것 같은 사람에게 의외로 엉뚱한 면이 있으면 그게 매력적이지 않아요?” 말했듯이, 김민정이 큰 눈을 깜빡이며 뭐라고 말하면 그 말이 다 정답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