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히트 백의 파워

2016.03.17

by VOGUE

    히트 백의 파워

    ‘잇 백’ 시대는 지나갔지만, 히트 백의 파워는 여전하다. 덕분에 새로 하우스에 입성한 디자이너들에게 중요한 과제가 주어졌다. 전임자들의 히트 백을 잊을 만큼 성공적인 백을 디자인하라!

    “스스로 ‘잇 백 신드롬’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한 번도 잇 백을 가져본 적 없고, 원한 적도 없고, 그 현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이야기다.” 올가을을 맞으며 각자의 쇼핑 리스트를 공개한 미국 스타일닷컴의 어느 기자가 이렇게 고백했다. “지금은 생로랑 파리의 모든 핸드백을 좋아하는데, 그중 사각형이 가장 맘에 든다. 지난 3월 런웨이 쇼에서 본 후, 이 자그만 백을 계속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말하는 건 이브 생로랑의 뮤즈 중 한 명인 베티 카트루에서 이름을 따온 미니 ‘베티 백’. 사각봉투의 양끝만 살짝 접어놓은 듯한 백은 생로랑 하우스를 살려내야 할 무거운 책임을 지닌 에디 슬리먼의 새로운 병기다.

    스타일닷컴 팬이라면, 생로랑 홈페이지로 ‘마우스 쇼핑’을 떠났을 법하다. 에디먼의 무덤덤한 디자인을 기대하며 화면을 바라보고 있자니 의외의 풍경이 떠오른다. 핸드백 섹션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선명한 ‘YSL’ 로고가 새겨진 클러치들. 에디의 상륙과 함께 Y는 영원히 사라진 게 아니었나? 의아한 장면은 계속 이어진다. 에디의 야심 찬 ‘신상’들인 ‘삭 드 주르’ ‘더플’ ‘베티’ ‘루루’ 등을 지나 스크롤을 내리면 아주 익숙한 백이 눈에 띈다. Y 심벌이 당당히 자리한 ‘까바 시크’ 백은 물론, 과거 최고 잇 백이었던 ‘뮤즈’ 백이 버젓이 홈페이지에서 판매 중인 것. 모든 것을 다 바꿔놓을 듯한 기세로 하우스를 점령했지만, 아직까지 스테파노 필라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필라티는 ‘제냐’로 넘어갔지만, 뮤즈 백을 남긴 셈이다.

    스타 디자이너들이 파리 하우스의 회전문을 수없이 들락거리는 동안에도 꾸준히 바뀌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2000년대 초부터 열풍을 일으킨 ‘잇 백’들과 하우스를 일으켜 세운 전통의 클래식 백들의 존재감. 물론 유서 깊은 백 브랜드라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 해도 감히 패러다임을 바꿀 엄두조차 못 낸다. 에르메스의 크리스토프 르메르가 아무리 인정받고 있다 해도 켈리나 버킨을 버릴 순 없고, 10년이 넘도록 보테가 베네타를 이끄는 토마스 마이어 역시 하우스의 기본인 ‘위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구찌의 프리다 지아니니, 루이 비통의 마크 제이콥스 역시 매 시즌 자신만의 상상력을 더해 가방을 디자인하지만, 그들의 기본은 뱀부와 재키, 스피디와 네버풀이다. 심지어 샤넬 하우스에 자리 잡은 지 30년이 넘은 칼 라거펠트에게도 2.55의 존재는 감히 초월하지 못할 벽이다.

    야심 차게 하우스에 입성한 디자이너들에게 히트 백의 존재는 전 주인의 망령 같을지 모른다. 발렌시아가의 알렉산더 왕 역시 ‘모터 백’이라는 유령과 싸워야 할 과제가 있다. 그가 새로 디자인한 ‘르 디스’ 백은 세련되긴 했지만, 아직 고객에게는 ‘발렌시아가=모터 백’이라는 공식이 남아 있다. 그래서 홈페이지에 올라온 대부분의 제품은 여전히 니콜라스 게스키에르가 디자인한 모터 백이다. ‘잇 백’ 하우스였던 클로에 역시 디자이너는 떠나도 백은 남은 대표적인 사례다. 상큼한 컬렉션으로 클로에와 꼭 어울린다는 평을 듣는 클레어 웨이트 켈러지만, 전임자였던 한나 맥기본이 디자인한 ‘샐리’ ‘파라티’ ‘마르시’ 백은 포기할 수 없다. “지난 시즌부터 새로운 백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클로에 하우스는 새로운 가방이 곧 하우스를 대신할 거라고 설명했다. “알파벳 순서대로 한 시즌에 하나씩 새로운 백을 선보이는 거죠. 지난 시즌에 선보인 ‘앨리스’가 A, 이번 시즌의 ‘베일리’가 B를 대표하는 백입니다. 다음 시즌에는 C로 시작되는 새로운 백이 탄생할 겁니다.” 한나 맥기본의 잔재를 지우고 싶은 켈러로선 씻김굿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히트 백을 디자인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패션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핫한 디자이너들에게 전통 백들은 안전이 보장된 하우스의 축복이자, 뛰어넘을 수 없는 하우스의 저주다. 그건 갈채 속에 안정권으로 들어선 디올의 라프 시몬스에게도 마찬가지다. 과연 그가 존 갈리아노의 ‘새들 백’만큼 인상적인 히트작을 남길 수 있을까? 다행인 사실은 꼼꼼하고 침착한 이 디자이너가 지금 당장 백을 통해 자신의 족적을 남기려는 욕심은 없어 보인다는 것. 물론 앤디 워홀의 프린트를 더한 클러치로 예술적 감각을 자랑했지만(그가 디자인한 질 샌더의 플라스틱 백이나 도시락 가방처럼 패션 골수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 조짐), 굳이 ‘미스 디올’ ‘레이디 디올’ 등의 명작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대신 잘 알려지지 않은 ‘디오리시모’와 ‘바 백’ 등 새로운 클래식을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물론 모든 백의 망령에서 벗어난 유일무이한 디자이너도 존재한다. 셀린의 피비 파일로는 “셀린의 역사는 내가 쓴다”라는 말처럼 셀린의 과거를 말끔히 지워버렸다. 대신 자신만의 미학을 담은 ‘클래식 박스’ ‘러기지’ ‘까바’ 등으로 셀린의 잇 백 리스트를 하나씩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야말로 엄청난 미학과 예지력, 자신감이 따라야만 가능한 배포다. 그런가 하면 오랫동안 하우스에 머물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임자의 ‘백 망령’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누구도 리카르도 티시 이전의 지방시 백을 기억하지 못하고, 알버 엘바즈가 디자인하지 않은 랑방 백은 떠올려보려고 해도 할 수 없지 않나. 그리고 발맹의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전임자가 히트 백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아무 부담이 없는 행운아다.

    올가을 런웨이에 등장한 모든 백을 꼼꼼히 살펴본 미국 <보그>는 최고의 트렌드를 ‘포에버 백’이라 명명했다. 예전의 잇 백처럼 화려하지 않고, 기능에 충실한 백들을 지칭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는 구찌와 에르메스, 프라다의 악어가죽 백, 프로엔자 스쿨러, 셀린, 스텔라 맥카트니의 미니멀한 백 등등. 지금 막 하우스에 입성한 디자이너 중에서는 누가 맨 먼저 자신만의 ‘포에버 백’이라는 타이틀을 달 수 있을까?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손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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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 Courtesy of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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