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피 직종별 성격 사전

패션계 햇병아리들에게 이곳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을지 모른다. 체셔 고양이와 험프티 덤프티, 하트 여왕 같은 수수께끼 캐릭터들로 가득하니까. 막 입문한 새내기와 핑크빛 세계를 꿈꾸는 어린 양들을 위해 준비한, 패피 직종별 캐릭터 분석.

패션 기자 스스로도 잘 안다. 언제 어디서 뭘 보든, 심드렁한 표정에 팔짱을 낀(가로지른 두 팔처럼 마음도 배배 꼬여 있다) ‘어디 얼마나 잘하나 한번 보자’ 식의 태도가 욕을 먹는다는 것을. 주변인들만 그런 줄 알았는데, 패션 위크 때 보니 기자들의 냉소주의는 국적 불문, 전 세계 공통이다. 누구도 대놓고 지적하진 않지만 극도로 과장된 리액션과 입에 발린 찬사가 일종의 예의인 패션계에서 달가울 리 만무하다. 예전에 인터뷰한 어느 해외 디자이너는 자신의 첫 컬렉션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이렇게 표현했다. “따분한 표정으로 프런트 로에 앉아 심지어 박수조차 잘 안치는 기자들도 그때는 휘파람을 불었다니까요. 에헴!” 굳이 변명하자면 관심 없어 보이는 반쯤 감긴 눈은 매일 10시간씩 꾸준히 모니터를 응시해 눈이 피로한 탓이다. ‘을’을 대하는 ‘갑’스러운 자세는 오직 목적 달성을 위해 업무상 온갖 부류들(그것도 쎈 사람들만)을 어르고 달래고 윽박지르다 눈치만 빤해져 허점과 약점에 지나치게 예민해진 일종의 직업병 탓. 우리도 때로 이런 자신이 싫다. 가는 식당마다 지저분하네, 간이 안 맞네, ‘지적질’하다 쫓겨나기 일쑤인 데다, 뒤돌아서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건 아닐지 소심한 마음으로 전전긍긍하니까. 그러나 기자란 늘 레이더를 높이 세우고 날카로운 식견으로 평가해야 하는 직업. 영원한 패션계의 진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홍보 담당자 이보다 상냥할 수 없다. 무뚝뚝하고 바쁜 척하는 기자 며느리들도 PR에게 특훈하면 시어머니에게 사랑받는 며느리로 개과천선할 수 있다. 행사장에서 곱게 차려입고 호스트 역할을 하는 PR들은 반달 같은 눈웃음으로 소심한 기자들을 안심시키며, 일부 삐뚤어진 기자들의 염장 지르는 멘트에도 정신줄을 놓지 않고 미스코리아 스마일로 답한다(가시 돋친 말로 응수할지언정). 그러나 앞에서는 천사의 미소를 머금던 이들도 PR계 정예 멤버들로 구성된 ‘그들만의 리그’가 시작되면 듣는 이의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신랄하게 뒷담화를 푼다는 사실! 참석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씹히고 또 씹힌다. 또한 사람들이 혹하도록 실제보다 번드르르하게 포장해 브랜드와 상품을 알리는 게 주요 업무이므로 뭐든 최소 150%쯤 뻥튀기하는 게 직업병. 본인 PR에도 열심이라 새로운 장소, 새로운 즐길 거리 등 최신 유행의 ‘낚시’에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것도 사실이다. 단지 변화의 흐름에 일일이 LTE-A급으로 반응하다 보니, 요즘 뜨는 것이라면 전부 본인의 취향으로 내재화하는 카멜레온 근성을 보인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스타일리스트 스타일리스트들은 패션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그래서 성격도 독특하다). 기자 못지않은 패션 센스를 갖춘 동시에 대중적 취향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하고, 두루두루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임팩트’ 있는 쇼맨십도 갖춰야 하는 복잡 미묘한 직업 때문이다. 그 이유는 최근 스타일리스트의 활동 분야가 급속도로 넓어진 데 기인한다. 연예인 최측근으로서 드라마, 영화, 예능 프로그램, 화보 촬영을 위해 옷을 준비하는 건 기본, 그들의 퍼스널 쇼퍼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 스타일리스트로 이름이 알려지면 TV에 출연하고 백화점에서 스타일링 강연도 하며, 자신의 편집숍을 운영하거나 홈쇼핑에서 물건을 홍보(정확하게 말해서 판매)하기도 한다. 소위 ‘잘나가는’ 스타일리스트들은 신종 방송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각종 스케줄로 인해 연예인과 유사한 성격적 특성(대표적으로 감정 기복이 심한)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를 본인이 담당하는 연예인과 동급 취급해 작아질 땐 한없이 작아지지만 막강해질 때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어느 매장 직원은 “한류 스타 A의 스타일리스트가 옷을 고를 때는 스타일리스트가 옷을 고르고 있는 게 아니다”라고 후일담을 털어놓았다. “A가 그 스타일리스트에게 빙의해 옷을 고르는 거다. A가 그 옷을 입을 거란 100% 보장이 없는데도 그 스타일리스트는 본인이 A인 듯 행동했다.” <개콘>의 ‘뿜 엔터테인먼트’에서 “보라 언니, 겨털 뽑고 가실게요!”가 웃기긴 하지만, 현실에서 먼 이야기는 아니다. 연예인의 심기가 불편하다 싶으면 진행 기자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런 스타일은 안 어울려요” “그런 색은 안 받아서요”로 원천 봉쇄하게 마련이니까. 사실상 스타일리스트의 성격을 일반화하는 건 쉽지 않다. 그들은 주변 상황과 주변 인물에 따라 달라지는 유기적 존재다.

패션 디자이너 디자이너들이 패션계의 대표적인 ‘자뻑’이라는 사실은 흉이 아니다. 어차피 반 예술가인 그들은 본인의 감각에 대한 무한 신뢰와 자신감 없인 일할 수 없다. 겸손함보다 자기만의 확고한 세계를 구축하는 편이 남 보기에도 그럴듯하고, 일시적 유행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보다 고유한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동하게 할 때 비로소 진짜 디자이너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감이 너무 멀리 갔을 때, 자기 자신을 레이블의 패션 아이콘으로 설정한다는 데 있다. 모든 면에서 감각 있어 보이도록 자신의 외모뿐 아니라 주변까지 완벽하게 꾸미다보니, 간혹 “본인이 입는 것만큼이라도 디자인하면 훨씬 나을 텐데”라는 조롱 섞인 평가를 받을 때도 있다. 이 자아도취가 발전하면 ‘컨셉추얼’한 설정의 패션 화보 속 모델인 양 현실감각을 완벽히 상실하기도 한다. 그러나 뒷담화에서 가장 많이 지적하는 문제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고 나면 주변의 말에 완전히 귀를 닫는다는 것. 누군가는 냉정한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했다. “실장님에서 선생님이 되더니 사리 분별을 못하더라고!” 디자이너들이 가장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며, 자기 관점만 옳다는 아집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채 자신만의 것을 구축하는 것. 결코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니 비난만 할 수도 없다.

바이어 일단 옷을 좋아하고, 자신을 꾸미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봤을 때 가장 ‘쎈’ 집단. 혹자는 실제 성격보다 더 ‘쎄게’ 보이려고 “아이라이너 한 줄을 그려도 더 두껍게, 더 길게 그린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본인의 소속 매장이나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할 뿐 아니라 서로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 구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6개월 후 어떤 것이 유행할지를 난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뿌듯함을 느끼며 주변인들이 쇼핑을 할 때 훈수 두기를 즐긴다(“다음 시즌에는 꽃바지가 유행이야! 꽃바지를 사라고!”). 바이어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판매할 매장의 컨셉과 소비자층, 본인의 취향을 적절히 조절해 시즌이 끝나기 전에 제품이 ‘완판’되지도 않고 재고가 많이 남지도 않도록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는 것. 그러나 일부 바이어들은 자기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100% 본인 취향에 충실하게 사놓고 나 몰라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매장 판매 쪽에서 본다면 민폐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엄청나게 쌓인 재고를 보고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마음을 다잡지만, 막상 다음 시즌이 되면 또다시 내 옷장 채우는 기분으로 이성을 잃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사실.

패션 모델 ‘악마의 편집’의 희생양이라고 하지만, 아주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고양이들이 서로 비비대며 갸르릉대다가도, 금세 털을 곧추세우고 할퀴며 싸우는 모양새를 닮은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짝>에 버금가는 극단적 경쟁 상황을 연출한 탓에 ‘여인천하’ 저리 가라 싶은 시기와 경쟁과 질투가 부각된 건 사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평균 연령대가 낮고 외모로 경쟁하는 분야다보니, 자기애가 강하고 “내가 ‘센터’여야 한다”는 욕심도 상당하다. 모든 게 평균을 웃도는 조건임에도 다른 모델들과 비교당하는 경우가 많아(“A는 살집이 있어” “B는 다리가 좀 짧아”) 남보다 못하다 싶은 부위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한 편. 패션 화보에서 보이는, 뭔가 사연 있어 보이거나 비뚤어진 아웃사이더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 만나면 대체로 발랄하고 친화력이 강하다. 해외 모델들에게는 젊을 때 잠깐 하는 용돈 벌이 아르바이트지만, 한국 모델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모델을 발판으로 방송인으로 진출하고 싶어하는 경향도 최근 보인다. 연예인급 팬덤이 형성되고 있어 팬 관리에도 열심(이 역시 경쟁적!)이며, 최근에는 친한 모델 무리가 형성돼 새로운 트렌드를 이끄는 패피 집단처럼 활동하기도 한다.

패션 사진가 촬영장에서 뜨겁게 예술혼을 불태운다. 고집도 세고 심심치 않게 마초 성향을 보이기 때문에 웬만큼 경력 쌓인 강심장 기자가 아니면 컨트롤이 어려운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기자와 사진가의 기 싸움은 둘이 함께하는 한 영원하겠지만, 워낙 캐릭터가 뚜렷한 ‘종’이라 기자들이 사진가를 선택할 때 결과물보다 성격을 보고 결정하는 경우도 많다(“그냥 사진가 A로 할래, A가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니까.”). 기자가 리터칭을 요구할 때도 본인 의도와 맞지 않으면 얼렁뚱땅 “리터칭이 안 된다더라”라며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담당 기자의 나이가 어리고 만만하다 싶으면 편집장으로 빙의하여 직접 의상과 헤어&메이크업까지 결정하는 리더십과 위엄을 부리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사진가도 시류를 타는 편이라, 소위 ‘뜬다’ 하는 사진가는 정점을 찍을 때까지 하루 스케줄을 아침-점심-저녁-새벽으로 나눠 카메라를 들고 다닐 정도다. 말 그대로 손에서 카메라가 ‘마를’ 날이 없다. 그와 동시에 이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예전에는 밀착(촬영한 사진들을 인화한 것)을 들고 편집부로 찾아오거나 사소한 일에도 일일이 직접 전화해서 확인을 했다. 그러나 뜨고 난 후에는? 목소리 듣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비서 역할을 하는 어시스턴트를 따로 두고 어떠한 용건에도 “어시스턴트와 이야기하세요”로 대답하거나 자신의 전화기를 아예 어시스턴트에게 맡겨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