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 그 향기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를 느꼈다고? 5년 전에는 당장 머리채를 휘어잡았겠지만, 이제는 섣불리 행동했다가 애먼 사람 잡기 딱 좋다. 그녀는 단지 내 남자와 같은 곳에서 쇼핑했을 뿐이니까. 시각, 청각, 촉각에 이어 후각까지 사로잡는 패션계의 향기 마케팅.

선반에 놓인 가방과 구두, 향초는 모두 구찌(Gucci). 오른쪽 위 ‘압델카데르’ 향초와 왼쪽 아래 ‘다다’ 룸 스프레이는 씨흐 트루동(Cire Trudon), 왼쪽 위 미스트와 오른쪽 아래 디퓨저는 모두 판퓨리(Panpuri)의 ‘시암 워터 보타니 엠비언스’ 라인 제품.

마르니의 2013년 가을 컬렉션이 열릴 밀라노 비아 알세리오 쇼장. 입구 커튼을 젖히고 들어선 순간, 알싸한 향이 밀려왔다. 병원 소독약 냄새를 닮은 독특한 향의 정체는 당시 막 론칭한 마르니의 시그니처 향수였다.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강조하고 싶었어요.” 콘수엘로 카스틸리오니는 늑대 소녀를 연상시키는 컬렉션을 위해 런웨이에 빔 프로젝터로 신비로운 숲의 이미지를 구현했다. 그러나 쇼장을 메운 사람들이 마르니 컬렉션의 신비로움에 푹 빠질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공간을 완전히 장악한 스파이시 우디 향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매장에서 보내는 시간과 한 사람이 구입하는 양은 정확히 비례합니다. 냄새는 사람들이 매장에 더 오래 머물고 더 오래 쇼핑하며 더 많이 구입하도록 유도할 수 있죠.” 향수 재단(The Fragrance Foundation) 대표 엘리자베스 머스매노는 향의 영향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시각(디스플레이)과 청각(음악), 촉각(매장의 인테리어 제품)을 거쳐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최신’ 감각으로 각광받는 것이 바로 후각! 마르니 향이 없었다면, 고작 빔 프로젝터 하나로 밀라노 쇼장에서 그토록 비현실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이렇듯 호텔과 대형 쇼핑몰, 관광지, 장난감 가게, 식품점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새로운 마케팅의 일환으로 ‘향기’를 도입하는 게 요즘 대세다. 향기 마케팅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후각이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에 시각이나 청각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것.

지난여름 런던의 장난감 백화점 햄리에 뿌린 피나 콜라다 향이 부모들을 오래 머물게 했다던가, 주유소에 커피 향을 풍기는 커피숍을 설치하자 매출이 300% 늘었다는 일화, 브루클린의 식품점에서 갓 구운 빵과 오븐에서 막 꺼낸 쿠키 냄새를 인공적으로 제조해 고객을 끌어모은(엄마가 구워주던 과자에 대한 향수와 함께 집의 푸근함을 불러일으켜 부동산 판매에도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피소드는 영화 <향수>에 나오는 도시 전설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향의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실례다. 오히려 최근 향기 마케팅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패션계가 후발 주자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현재 40% 성장세를 기록 중이며, 그 40%가 모두 패션 업체입니다. 2년 전만 해도 패션 업체의 비율은 겨우 5%뿐이었죠.” 센트에어(ScentAir)의 매니징 디렉터 크리스토퍼 프랫은 최근 몇 년 사이 향기 마케팅을 의뢰하는 패션 업체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고 전한다. 센트에어 고객 리스트에는 블루밍데일스, 휴고 보스, 지미 추, 쥬시 꾸뛰르와 망고 등 세계적인 패션 기업이 포진해 있다(전 세계 매장 공통 사항은 아니지만). 휴고 보스 매장 문을 열면 미니멀하고 우아한 인테리어에 잘 어울리는 잔잔한 나무 향이 콧속으로 밀려들어온다. 블루밍데일스 백화점은 아이템에 따라 구역별로 각기 다른 향을 풍기는 게 특징이다. 유아용품 층에서는 베이비파우더 냄새, 속옷용품 매장에서는 사랑스러운 라일락 향, 수영복 매장에서는 코코넛 향이 향긋하게 감돈다.

흥미로운 점은 패션 브랜드를 위한 향은 다른 분야와 달리 직접적인 판매 증가나 사람들을 매장에 오랫동안 잡아두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 “패션 업체를 위해 디자인한 향은 철저하게 브랜드 정체성에 기반합니다. 추구하는 미학, 소리, 형태, 타깃층까지 모든 단서를 창의적으로 받아들이고 해부한 뒤 그걸 냄새 형태로 번역하는 거죠.” 니치향 제조사 12.29의 던과 사만사 골드웜 자매는 로다테 쇼, 디자인 마이애미 전시 등 감각적인 공간에 어울리는 향을 잘 만들기로 유명하다. 이들은 지난해 코르토 몰테도 매장에 뿌릴 용도로 젊은 뉴요커 감성과 질 좋은 이탈리아 제품력이 결합된 컨셉을 부드러운 가죽 노트의 현대적인 오 드 콜로뉴로 완성했다. 남성용 셔츠 전문점 ‘파이’를 위해서는 플로럴 향과 머스크를 섞어 화이트 셔츠 같은 향을 제조했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샤넬 매장에 가면 샤넬 향수 냄새가 나고, 버버리 매장에 가면 버버리 향수 냄새가 나는 것과 동일한 효과, 즉 공간에서 브랜드 정체성을 다각도로 경험하게 하는 것! 실제로 갤러리아 백화점의 톰 포드 매장에서는 톰 포드 향수 컬렉션 제품을 번갈아 뿌리는데, 특히 지난여름에는 상쾌한 네롤리 포르토피노를 뿌렸을 때 고객들로부터 문의가 많았단다. 브랜드 이미지와 향의 관계에 대한 상징적 일화는 스테파노 필라티가 YSL을 이끌던 시절에도 있었다. 당시 전 세계 YSL 매장에는 스위스의 미장시르 향초가 켜져 있었다. 에디 슬리먼으로 교체됨과 동시에 미장시르 역시 딥티크의 ‘우드 파이어’로 일제히 교체했지만 말이다. 한국을 포함, 전 세계 본사 건물과 쇼룸, 브랜드 행사장에서 동일하게 쓰도록 지정된 이 향초는 파리 본사를 통해 일괄 주문이 가능하다(이번 시즌부터는 다른 향으로 바뀔 예정). 한국 패션계에서도 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전문 향초 브랜드와 니치향수 레이블 제품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공간이나 브랜드 컨셉을 강화하기 위해 향기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브랜드는 소비자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감성적인 기반 위에서 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기능이나 가격, 편리함에 근거한 합리적인 제안만으론 충분치 않죠.” 대표적인 향기 마케팅 회사 아로마 컴퍼니(The Aroma Company)의 설립자 사이먼 해롭은 매장뿐 아니라 쇼핑백이나 포장 용기까지 다각도로 브랜드와 향이 연계되고 있다고 덧붙인다.

누군가는 오감을 공격하는 동시다발적 신호가 소비를 조장한다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한편으론 업그레이드된 소비 방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브랜드가 눈과 귀, 코를 통해 총체적 이미지를 전달함으로써, 우리는 그저 싸거나 비싸거나, 예쁘거나 질 좋은 제품을 사는 게 아니라 취향과 스타일을 소비하게 되었으니까. 이것이야말로 21세기적 소비 방식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