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오토바이족 전성시대

한때 거의 모든 브랜드가 트렌치코트에 손을 댄 채,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팔아치우기 바빴다. 그러나 이젠 모터사이클 재킷이 대세. 바야흐로, 브레이크 없이 캣워크에서 전력 질주하는 패션 오토바이족들의 전성시대!



“젊고 현대적인 그녀는 트렌치코트를 입을 때 사진발이 아주 잘 받는다.” 1940년, 장 콕토는 연극 <Les Monstres Sacrés>의 여주인공 중 한 명인 리안느를 향해 이렇게 품평했다. 1950년대에 마를렌 디트리히와 그레타 가르보는 트렌치코트에 하이힐을 신었다. 1968년에 이브 생로랑은 초미니 트렌치코트를 만들었고, 1970년대엔 타이트하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호리호리한 실루엣이 주류였으며, 1984년에 지아니 베르사체는 트렌치 컬렉션을 발표해 80년대 직장 여성들에게 새로운 유니폼을 제공했다. 90년대? 트렌치를 청바지 위에 시큰둥하게 묶어 입은 샬롯 갱스부르 스타일이 히트 쳤다. 그리고 2000년대.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구닥다리처럼 여겨지던 버버리 가문에 들어가 트렌치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그 후로 오랫동안, 수많은 젊은 디자이너들은 물론, 대가들마저 트렌치코트 한 벌에 자기만의 호흡을 불어넣었다. 칼 라거펠트는 샤넬을 위해 트위드를 트렌치 가장자리에 트리밍했고, 미겔 애드로버는 아예 트렌치 안팎을 뒤집어놓을 정도.

미안하게도, 우리는 지금 가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트렌치코트에 대해 박물관에 박제된 느낌의 뻔한 찬사를 나누자는 게 아니다. 솔직히 트렌치 찬양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올가을 캣워크에서는 트렌치가 몇 년 전에 비해 눈에 띄게 확 줄었으니 말이다. 그건 이번 시즌만의 현상은 아니다. 그토록 활개치던 트렌치가 2010년대 들어 패션 무대에서 서서히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으니까. 기가 한풀 꺾인 트렌치 자리를 치고 들어온 게 있으니, 바로 모터사이클 재킷! 물론 모터사이클 재킷 역시 2010년대에 들어 처음 나타난 획기적인 옷은 아니다. 트렌치가 1차 대전 때 참호 속 추운 날씨로부터 군인들을 보호하려고 만든 것과 비슷한 과거사가 있다. 모터사이클 재킷 역시 2차 대전 동안 미국 전투기 조종사의 복장에서 유래한다(밀리터리 룩이야말로 수많은 패션의 근원이다!).

하지만 모터사이클 재킷의 기원을 역추적하다 보면, ‘퍼펙토’란 이름을 발굴할 수 있다. 퍼펙토? 다들 모터사이클 재킷, 라이더 재킷, 가죽 블루종 등 자기 입맛대로 편하게 부르지 않나. 퍼펙토 재킷은 사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이름이다. 여기서 잠깐! 옛날 옛적, 1900년대 초 미국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비옷을 만들던 스콧 형제에게 할리 데이비슨 판매상이 오토바이를 타는 남자들을 위해 옷을 부탁하면서 모터사이클 재킷이 시작됐다는 전설이 있다. ‘낙마’에 대비해 질기고 거친 멋으로 충만한 옷을 의뢰한 것. 그런데 코도반 가죽으로 만든 옷이 생각보다 폼 나자 스콧 형제는 내친김에 ‘퍼펙토’라는 이름을 지어 붙였다. 자신들이 즐겨 피우던 쿠바산 시가 이름이다. 5.5달러에 할리 데이비슨 매장에서 팔릴 때만 해도 먼 훗날 퍼펙토 재킷의 인생 역전에 대해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클래식 퍼펙토 모터사이클 재킷은 현재 한국에서 플랫폼 플레이스를 통해 판매되고 있다).

스콧 형제가 할리 데이비슨 외에 머리를 조아려 감사할 인물이 있다면, 다름 아닌 배우 말론 브란도일 것이다. 거칠고 두툼한 이 옷이 53년 영화 <와일드 원>에서 브란도의 성적 매력을 두 배로 드러내면서부터 달라 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66년엔 <와일드 엔젤스>, 80년대엔 <매드 맥스>, 90년대엔 <터미네이터>에서 주인공만큼 멋지거나 카리스마 넘치는 존재감을 발휘했다. 그리고 90년대 베르사체의 본디지 컬렉션은 물론, 프랑수아즈 하디, 마리안느 페이스풀, 섹스 피스톨즈의 모터사이클 룩을 어찌 잊을까! 트렌치코트가 군복에서 비롯돼 비에 젖은 신비와 고독한 캐릭터들로부터 아낌없이 사랑받아왔다면, 모터사이클 재킷은 쿨 키즈들의 유니폼이나 마찬가지였다. 로큰롤 뮤지션과 헤비메탈의 광팬, 펑크족과 바이크족 등등. 모터사이클 재킷의 열풍 덕분인지, 발렌시아가 시절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는 라이더 재킷의 부속이나 부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라리앗 백을 디자인했고(정확한 명칭은 ‘아레나 백’이다), 겐조의 젊은 듀오 디자이너 역시 얼마 전 모터사이클 백을 새로 선보였다. 또 올세인츠(AllSaints)나 BLK DNM 같은 브랜드도 모터사이클 재킷에 철저히 몰입하고 집중하는 중이다(요즘 멋쟁이 패피들이 ‘완전’ 열광하기 시작한 BLK DNM만큼은 꼭 기억해두시길!).





생로랑, 발렌시아가, 발맹, 셀린, 하이더 아커만, 아크네, 겐조, 꼼데가르쏭, 준야 와타나베, 릭 오웬스 등 <보그> 컬렉션 북에서 각 도시별 앞쪽 2페이지씩에 할애되는 인기 있고 영향력 만점의 브랜드에선 매 시즌 모터사이클 재킷이 디자이너의 취향대로 재해석되어 나온다. 심지어 리카르도 티시는 올가을 지방시를 위해 모터사이클 재킷의 일부인 듯한 두툼한 허리 장식까지 준비했다. 참, 온통 카무플라주 패치워크 옷감으로 모터사이클 재킷 흉내만 낸 크리스토퍼 케인도 있다. 설사 캣워크에 나오지 않았다 해도 매장에 가면 몇 벌씩 꼭 있는 게 모터사이클 재킷이다. 그건 서울도 다를 게 없다. 정욱준이 트렌치코트로 인기를 끌었다면, 김재현은 모터사이클 재킷으로 현재를 풍미하고 있다. 또 어나더맨, 노앙, 겅트, 프리마돈나 같은 젊은 디자이너들의 독립 브랜드에서도 좀더 합리적인 가격에 모터사이클 재킷을 살 수 있다(그들 역시 레이 카와쿠보나 랄프 로렌 같은 대가들처럼 평소 자주 입고, 인터뷰 촬영에도 반드시 대동한다). 이 가운데 몇몇은 빈티지 시장에서 진품 ‘퍼펙토’ 재킷을 사다 이리저리 해부하고 연구한 뒤 그대로 복각하거나 약간의 디자인을 가미해 자기 상표를 붙인다. 그게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걸 사 입는 사람들은 기본형에서 디자인이 많이 변형된 걸 원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제 디자이너와 브랜드는 모터사이클 재킷을 구비해놓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진 듯 취급받는다. 2000년대 중·후반 트렌치 전성기가 딱 그랬다. 멋쟁이들도 옷장에 이 묵직한 옷이 한 벌쯤 없다면 ‘동시대적 유행’을 충분히 만끽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전 세계 패션 위크는 물론 대도시 패션 번화가에 가면, 트렌치 대신 모터사이클 재킷을 걸친 사람을 한 사람 걸러 한 사람씩 마주친다. 평생 트렌치코트 소유권을 두고 버버리와 닥스, 아쿠아스큐텀이 공방전을 벌이듯, 조만간 모터사이클 재킷도 원조를 따져가며 디자이너들끼리 소유권 쟁탈전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시대 분위기에 편승해 트렌치를 포기하자니 미련이 남고, 바네사 트라이나 혹은 멜라니 휴 같은 멋쟁이 친구들이 자주 입는 통에 모터사이클 재킷도 포기할 수 없었던 조셉 알투자라는 기막힌 방식을 제안했다. 올가을 무대에서 트렌치코트 위에 모터사이클 재킷을 덧입힌 것. 그건 생각보다 기발했다. 현재 가장 각광받는 두 ‘물건’이 이렇게 혼합될 수 있다는 걸 예전엔 왜 몰랐을까, 라며 무릎을 탁 친 스타일리스트들이 꽤 많았을 듯. 알투자라 컬렉션엔 모터사이클 롱 코트도 있었다. 그야말로 아메리카노와 라테를 동시에 즐기는 셈.

트렌치코트가 기가 죽은 건 버버리의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2000년대 중·후반만큼 절대적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것과 웬만큼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트렌치가 모터사이클 재킷의 질주에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다시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버버리 가문이 ‘아트 오프 트렌치’ 캠페인을 전세계 대도시에서 대대적으로 실시하며 트렌치의 명예 회복을 이뤘을까? 그건 생각보다 쉽지 않아 보인다. 모터사이클 재킷 유행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발맹(크리스토프 데카르넹 시절부터 올리비에 루스테잉 시절인 지금까지)이 모터사이클 재킷의 수량을 슬슬 줄이면서 내년 봄 무대엔 봄버재킷을 잔뜩 내보냈으니 말이다. 아무튼 콕토가 살아 있다면 자신의 명언을 이렇게 고쳐야 할 듯하다. “젊고 현대적인 그녀는 모터사이클 재킷을 입을 때 사진발이 아주 잘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