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무용수들에게 매료된 패션

2016.03.17

by VOGUE

    무용수들에게 매료된 패션

    에디 슬리먼의 무용수, 피터 코팽의 발레리나, 정구호의 춤꾼…. 디자이너들이 만든 무용복 이야기가 아니다. 패션이 모델과 여배우에 이어, 무용수들의 몸과 움직임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오페라 가수 아빠와 발레리나 엄마 사이에 태어난 리다 폭스. 이 열여덟 살짜리 모델은 한 뼘짜리 가죽 밴두 톱에 스키니 진, 그리고 플란넬 체크 셔츠를 입은 듯 만 듯 걸친 채 뉴욕 어느 건물의 휑한 공간에서 사지를 휘저으며 춤춘다. 앙증맞은 리본이 달린 납작한 플랫 슈즈를 신은 채 난이도 높은 피루엣(한 발을 들고 재빨리 회전하는 발레 동작)에 취해 있다. 캐나다 출신의 모델 그레이시 반 가스텔 역시 리틀 체크 드레스를 입고 건물 옥상에서 최면에 걸린 듯 훌라후프를 빙빙 돌리며 춤춘다. 두 편의 댄스 영상이 끝나자 화면에 각인되는 글자는, ‘Saint Laurent’과 ‘Dance’. 에디 슬리먼이 감독한 첫 흑백 필름은 보시다시피 주인공이 무용수다.

    에디 슬리먼과 무용수라! 별로 익숙하지 않은 조합이다. 사실 그가 LA의 재능 넘치고 시시껄렁하며 그토록 ‘시크’한 뮤지션들이나 다프트 펑크에게 푹 빠져 지내는 걸 모르면 패션 문외한에 가깝다. 가장 날카롭고 동시대적이며, 다가올 계절을 위한 새로운 여성상을 콕 짚어 제시하는 그가 이번엔 무용수에 꽂힌 걸까? 흑백 영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리다와 그레이시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영상은 에디 슬리먼이 생로랑을 통해 11월부터 대대적으로 밀어붙이는 발레리나 슈즈를 위한 필름이라는 것. 영상을 감상한 패피들은 “리드미컬하게 몸을 움직이는 걸 즐겨라. 지금 그게 가장 멋진 일이다”로 에디 슬리먼의 제안을 해석하며 환호하는 눈치다. 그들은 아마도 레페토나 페라가모보다 좀더 멋스러운 생로랑 발레리나 슈즈가 매장에 진열되기만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이건 리카르도 티시나 이리스 반 헤르펜 등의 잘나가는 디자이너들이 무용복을 디자인 하는 것과 다른 각도의 얘기다. 무용수들의 몸과 움직임 자체를 패션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인 현상이다. 패션에 불어닥친 춤바람은 생로랑 무대에서 멈추지 않는다. 물론 예전부터 있었던 무용복풍의 옷이나 발레리나 룩들은 이번 시즌에도 등장했다. 특히 니나 리치의 피터 코팽은 발레리나들의 연습복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는 전문 무용수를 섭외한 1분 31초짜리 패션 필름을 제작했는데, 이는 ‘발레 백’을 새로 선보이며 만든 댄스 영상 프로젝트(무용수들이 연습할 때 들고 다니는 가방에서 착안했다). 세 명의 무용수가 발레 백을 들고 각각 클래식 발레, 재즈, 현대무용을 주제로 몸을 움직이자 발레 백이 신체의 일부인 듯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발레 백을 위한 영상은 ‘I Could Never Be a Dancer’라는 집단의 솜씨다. 그들의 공식 웹사이트 ‘icouldneverbeadancer.com’을 클릭하면 패션과 무용의 신세계가 펼쳐진다. 니나 리치는 물론, 겐조, 클로에, 루이 비통, 에르메스, 샤넬, 유니클로 등이 춤이나 무용수들과 어떻게 협업하는지에 대한 기발한 결과를 감상할 수 있다. 제작자인 카린과 올리비에는 ‘난 절대 무용수가 될 수 없을 거야’란 뜻을 지닌 회사를 세워 파리에서 영상물을 작업하고 있다. 카린은 네 살 때부터 고전무용부터 현대무용까지 20년간 무용을 하며 좀 날린 무용가, 올리비에는 독학으로 춤을 배웠으며, 1996년 벨기에 솔로 댄스 콘테스트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의 실력파다. 두 사람이 만나 댄스와 패션, 현대미술, 광고 등과의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함으로써 패션과 댄스 사이의 멋진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얼마 전 끝난 파리 패션 위크에서도 격한 춤바람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칼리 클로스는 보깅 댄스를 추고, 조안 스몰스는 엉덩이와 어깨를 흔들며 룸바를 추고, 안로르는 완벽하게 탱고 리듬을 타고, 코코 로샤는 <그리스>의 존 트라볼타처럼 앞머리를 윤기 나게 넘겨 올린 채 신나는 댄스 타임을 가졌다(모델로서 코코의 결정적 순간도 고티에 무대에 아이리시 댄스를 추며 통통 튀어나왔을 때였다). 바로 파라디 라탱 댄스 클럽에서 열린 고티에 쇼! “제 쇼의 댄스 플로어는 죽여줄 거예요”라며 고티에가 선언했지만, 공교롭게도 그가 열광적으로 시청하는 프랑스판 <댄싱 위드 더 스타>의 새 시즌이 방영되는 시각. 쇼는 시드니 폴락의 69년작 <데이 쇼트 하우스>에서 영감을 얻어 댄스 퍼포먼스를 선보인 알렉산더 맥퀸의 2004년 봄 컬렉션만큼 인상적인 건 아니었지만, 무용수 이미지를 패션이 얼마나 사모하는지 알 수 있는 기회인 건 분명했다.

    게다가 무용수들은 패션 뮤즈로서도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오랜 시간 몸을 갈고닦은, 그러니까 몸을 사용한 전문 무용수들은 다양한 몸동작으로 옷이 지닌 매력을 좀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현대무용이 지닌 조형적이고 형이상학적 아름다움에 매료된 디자이너 정구호의 얘기다. “옷의 새로운 면을 무용수의 몸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죠.” 정구호는 몇 시즌 동안의 구호 광고를 무용수의 움직임을 영상으로 촬영한 뒤 어떤 찰나를 캡처해 지면 인쇄용으로 썼으며, 무용단과 협업해 현대무용 의상을 디자인하는 건 물론, 직접 기획에도 참가했다. 아무튼 결론은 뻔하다. 슈퍼모델에서 여배우, 여가수로 이어지는 패션 뮤즈의 다음 차례는 무용수들!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신광호
      기타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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