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만과 이인혜의 두번째 라운드

자연과 맞닿아 있는 1층 비스트로,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지하 포토 갤러리. 분당에 마련한 사진가 김중만과 톱 모델 출신의 이인혜 부부는 이곳에서 각자의 두 번째 라운드를 시작한다.



진회색 카레라 4S를 타고 청담동 벨벳언더그라운드 스튜디오에서 분당 서현동까지 달려온 사진가 김중만이 차에서 내리자 니코틴과 알코올이 혼합된 냄새가 살짝 났다. 그는 자신의 상징이었던 풍성한 레게 머리를 싹둑 자른 채 더없이 산뜻하고 젊어 보였다. 독특하게 블렌딩된 향마저 바이레도 혹은 프레데릭 말 향기처럼 여겨질 만큼 그의 카리스마는 초강력이다. 하지만 첫마디는 꽤 소박하고 인간미 넘치며 전형적인 한국 남편이다. ”네오 엄마의 한결같은 내조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함께 지낸 지난 25년에 대한 선물이에요.” 그가 진심을 담아 전한 선물이란 분당 서현동 145-8번지의 이탤리언 레스토랑이다. “레스토랑보다 좀더 캐주얼한 분위기라 ‘비스트로’라고 지칭하기로 했어요.” ‘선물’을 받은 아내 이인혜가 곁에서 거들었다.

이곳은 사진가 김중만이 톱 모델 출신의 아내를 향한 선물인 ‘inéné’다. 안주인의 이름을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이네네’. “꽤 오래전 남편이 지은 이름이에요. 간판을 비롯해 BI에 쓰인 서체 역시 남편의 친필이죠.” (김중만이 연필로 자기 작품 오른쪽 아래에 휘갈기는 서체야말로 그의 또다른 상징이다). 그녀는 서울 전농동 집에서 차를 타고 오전 8시에 분당 서현동으로 40분 만에 출근해 밤 11시에 퇴근한다. “덕분에 제가 요즘 독거노인 신세지 뭡니까, 하하!” 김중만이 털털하게 웃으며 아내가 요리를 아주 잘한다고 으쓱해한다. 그러자 “평소엔 한식을 좋아해요”라며 이인혜가 눈을 찡긋하며 덧붙인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가볍게 먹을 수 있는 파스타, 피자 등의 퓨전 요리가 적절하다고 판단했죠.” 음식 솜씨가 훌륭하고 미각이 탁월하다고 소문난 그녀지만, 이 사업을 위해 여러 나라 전통 음식과 사찰 음식 만드는 법까지 배우러 다닐 만큼 철저히 준비했다.

김중만은 아내가 하는 일에 자신의 존재가 철저히 가려지길 원했다. “<보그> 취재가 끝입니다. 정말이에요! 전혀 관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하.” 물론 지하의 ‘김중만 포토그래피 갤러리’는 그가 철저히 관여한다며 역시 모델 출신인 노미성이 슬그머니 웃는다. 그녀는 이인혜의 후배로 <보그 코리아> 창간 초기에도 등장한 톱 모델이자 동덕여대 모델학과 교수를 지냈다. “작품은 물론, 책꽂이 하나도 김중만 작가의 허락 없이 들여놓을 수 없어요. 참, 이 의자들 역시 그가 직접 디자인을 의뢰해 제작한 겁니다.” 조형적 형태로 컷아웃된 철제 프레임과 시멘트 삼각뿔로 된 받침대가 예술품 못지않은 이 의자는 생각보다 편했다. 수익이 발생하면 자선사업도 기획 중이라고 노미성이 설명했다. “이곳 포토 갤러리는 3~6개월 단위로 김중만 작가의 사진이 교체될 예정입니다. 알게 모르게 블로그를 통해 입소문이 퍼져 수원이나 통영에서도 작품을 감상하러 일부러 찾아올 정도죠.” 모델에서 교수, 다시 포토 큐레이터로 변신한 노미성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주말에는 30여 명의 관람객이 찾습니다. 이곳에선 구매도 이뤄집니다. 월요일은 휴관이고요.”

분당의 어느 자그마한 언덕에마련된 비스트로 ‘이네네’. 내부에는김중만 작품이 테이블로 활용되는 중.또 그가 수집한 하트 모양의 돌은냅킨 위에 놓여 있다. ‘이네네’입구에서 왼쪽 나무 계단으로내려가면 포토 갤러리가 나온다.

비스트로와 포토 갤러리 빌딩은 지난 8월 초에 오픈했다. 하지만 이제야 <보그>를 비롯, 몇몇 리빙 매거진에 나오게 된 이유는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일을 진행하려는 부부의 ‘전략’ 때문이다. “작년 12월부터 이곳을 준비해왔어요.” 대한민국 패션사에 길이 기록될 몇 안 되는 슈퍼 커플인 김중만과 이인혜는 이 공간을 마련하며 거창한 오프닝 파티나 떠들썩한 홍보는 전혀 하지 않았다. “진솔하게 진행하고 싶었습니다. 지금껏 아내의 내조에서 제가 도움을 얻었듯, 이젠 아내 곁에서 묵묵히 돕고 싶습니다.” 김중만이 허세나 가식이 없는 겸손하고 진실된 말투로 전했다. 사실 그는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침착하며 기름기가 쏙 빠진 담백한 모습이다. 그건 헤어스타일의 변신 때문만은 아니다. 카메라를 든 지 40여 년 만에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려는 결정적 순간과 맞닥뜨렸기에 호흡을 고르는 중이다. 얼마 전, 상하이에서 가장 큰 갤러리와 독점 계약을 맺은 데 이어, 1년 동안 정부 허가 아래 헤집고 다니며 촬영한 독도 사진전을 12월에 연다. 그리고 파리와 뉴욕에서 세기에 기록될 대대적인 전시와 출판이 2~3년 후까지 예약된 상태다.

‘이네네’와 ‘김중만 포토그래피 갤러리’의 결합은 아주 동시대적인 발상이자 결과다. 밀라노 만조니 거리의 아르마니 빌딩에는 아르마니 매장과 일식집 노부가 함께 있고, 파리 멀티숍 꼴레트는 지하에 그 유명한 워터 바를 운영 중이다. 또 서울 곳곳에서도 꽃집과 카페가 함께 마련되고 부티크와 바가 같은 공간에서 영업하는 게 요즘 경향 아닌가. “솔직히 말하자면 지하 포토 갤러리가 없었다면 1층 역시 주목받긴 힘들어요. 요즘은 문화적 콘텐츠 없이 고객을 만족시키기 힘들지 않나요?” 이인혜가 늘 그렇듯 딱 부러진 말투로 돌직구를 날렸다. “이곳은 포토 갤러리와 비스트로는 물론, 사계절을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는 천혜의 자연이 일품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네네의 테라스 바로 앞엔 아담한 저수지가 펼쳐져 있다. 저수지의 둑은 산책로로 제격이며, 테라스 주위엔 코스모스를 비롯, 들꽃과 온갖 들풀이 병풍을 대신하고 있다. “저는 손님들에게 테라스를 추천합니다.” 이인혜가 바깥으로 안내하며 얘기했다.

1층 안팎에서 눈에 띄는 건 테이블이다. 남편이 찍은 플라워 시리즈의 액자를 눕혀 테이블로 활용한 아이디어는 ‘inéné’라는 리빙 브랜드를 론칭하도록 부추기고 싶을 만큼 근사하고 기발했다. “여기 들르는 손님들 역시 테이블에 호기심을 보이더군요.” 슬로모션으로 살아 움직이는 듯 강렬한 꽃 사진 테이블 위엔 자그마한 돌이 놓여 있다. 그건 지하 갤러리에서 노미성이 슬쩍 귀띔한 하트형 돌이다. “남편이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 마다 하트 모양 돌을 수집했는데, 이렇게 장식품이나 냅킨 고정용으로 쓰니 꽤 그럴듯하더군요.” 이인혜가 하트형 돌들을 냅킨 위에 단정히 놓으며 얘기했다. 그리고 한쪽 벽을 꽉 채운 추상화는 핑크빛이 인상적인 30대 신인 작가의 작품으로 부부의 침실 정면에 있는 것과 같은 시리즈라고 덧붙였다.

김중만의 인상적인작품들로 전시된 지하갤러리의 풍경. 이곳에서는그의 사진집은 물론,사진들의 구매도 이뤄진다.

83년에 모델 생활을 시작해 전성기를 누린 이인혜는 비로소 30년 만에 두 번째 라운드에 돌입했다. “88년에 남편과 결혼, 90년에 아들 네오를 낳았어요. 그 후로 모델 일은 중단했죠. 7년 전쯤 티셔츠 사업을 벌였지만, 결과는 그저 그랬어요. 그런 제가 이번에 남편으로부터 의미심장한 ‘선물’을 받았군요!” 나이 쉰이 넘어서야 어른 공부를 새로 하는 기분이라고 말할 땐 그녀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차분해졌다. “소규모지만 사업을 운영하고 직원들을 관리하고 낯선 손님들을 맞고…. 모델 생활 이후, 외부 접촉을 피한 채 제가 보고 싶은 사람만 만나며 지냈어요. 하지만 이제야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금껏 미처 알지 못한 것들을 배우는 중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들러 처음 만난 사람들, 그리고 손님들이 맛있게 음식을 먹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다며, 그래서 마냥 감사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인다.

잠시 후, 아내를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 등장이라고 선언한 김중만이 지하 갤러리에서 <보그> 카메라 앞에 섰다. 늘 카메라 뒤에 있던 그가 자신이 찍은 거대한 붉은 꽃 앞에 서자 특유의 카리스마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왜소해 보였다. 그건 압도적인 작품 때문이기도 했다. 알렉산더 맥퀸의 재킷과 구두에, 요지 야마모토의 스커트 같은 팬츠는 톱 모델 출신 아내의 옷차림과 일부러 짜맞춘 듯했다. 이번엔 “꼼데가르쏭, 요지 야마모토!”라며 이인혜가 자신이 입은 상의와 하의를 차례로 가리켰다. 군 입대를 앞둔 스물네 살짜리 아들이 있는 엄마라는 사실이 전혀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는 날씬하며 매력적이다. 모델치곤 아담한 체구지만, 눈과 눈썹 사이가 멀어 동양적이면서도 현대적으로 보이는 이목구비, 그리고 짜릿한 눈짓은 여전하다. 카메라 앞에서 모델로서의 끼 역시 1980~90년대 전성기가 부럽지 않을 정도. 이 아방가르드 커플은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눈에 커플이란 사실을 들킬 것 같다. “나는 조연이에요.” 김중만이 카메라 앞에서 자꾸 몸을 뒤로 뺐다.

이인혜는 이곳이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장소가 되길 원한다. “아침 10시쯤, 해가 중천에 뜨기 전이 참 좋아요. 요즘 같은 가을엔 하루 종일 아늑하죠. 저수지가 곁에 있어 물 기운으로 인해 싸늘하긴 하지만, 그 알싸한 느낌이 또 좋죠.” 그래서 바람이 불면 문득 이네네의 테라스에 앉아 ‘와인 한잔 마시고, 또 지하에 들러 사진을 감상하고 싶어’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 되길 원한다. 자연 안에서 힐링을 원해 도시에서 탈출하고픈 사람들에게 이곳은 새 아지트로 각광받을 듯하다. 자연과 맞닿은 비스트로,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포토 갤러리로, 지금 여러분을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