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의 새로운 키워드, 식탐

샴페인과 줄담배로 연명하는 입맛 잃은 패션 피플? 요즘 패피들은 달콤하고 기름진 군것질거리와 푸짐한 요리에 열광한다는 사실! 패션계에 새롭게 떠오른 키워드, 식탐.

크로넛을 든 리 르작, 백스테이지에서 맥도날드를 배달시킨 카라 델레바인과 조단 던의 인스타그램 사진.

패션 위크가 다가오고 각 도시를 담당할 패션 팀 기자가 정해지면 호텔 예약, 쇼 티켓 신청과 함께 ‘거기서 꼭 먹어야 할 것’들에 대한 정보가 오간다. <보그> 편집부의 경우 매 시즌 새롭게 뜨는 장소를 찾아다니기보다는 입맛에 맞는 곳을 꾸준히 찾는 편. 예를 들어 밀라노 팀은 랍스터 파스타로 유명한 해산물 레스토랑 ‘알쿠오코 디 보르도’와 까발리 쇼가 열리는 아르코 델라 파체 앞의 녹색 천막 ‘피자 오케이’, 파리 팀은 우동집 ‘쿠니토라야’와 장어덮밥으로 유명한 ‘노다이와’를 꼬박꼬박 들르는 식이다. 한때는 패션 위크 기간의 맛집 순회에 대해 부적절하다고 느낀 적도 있었지만, 요즘 패션계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트렌드는 반갑게도 식탐!

먼저 변화와 유행에 가장 민감한 뉴욕의 풍경을 보자. 움베르토와 캐롤은 오프닝 세레모니의 첫 런웨이 쇼를 보러 온 이들을 위해 크로넛을 준비했다. 크로넛은 크루아상 페이스트리를 도넛 모양으로 튀긴 것으로, 지난여름부터 뉴욕 전역을 크로넛 열풍에 빠뜨린 주인공이다. 8시에 문을 여는 소호의 도미니크 안셀 베이커리 문 앞에는 아침 7시부터 크로넛을 사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 한 번 사 먹으려면 평균 4시간을 기다려야 할 정도다. 예전 같으면 기름에 찌든 탄수화물 덩어리라며 눈살을 찌푸렸겠지만, 요즘 패피들은 이 ‘귀한’ 먹거리를 깜짝 제공한 둘에게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있다. “최고의 아이디어” – 리 르작. “‘진짜’를 먹게 해준 오프닝 세레모니에게 영원한 감사를!” – 토미 톤.

누가 뭐래도 인기의 정점은 유사품의 등장. 이미 뉴욕 일대 빵집과 카페에는 프렌치 도넛, 뉴욕 파이 도넛, 도와상 등 온갖 이름의 가짜 크로넛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리고 최근 가짜 크로넛에 속은 패션계의 가장 큰 피해자는 빅토리아 베컴이다. 컬렉션을 마친 후 금색 상자에 담긴 크로넛 사진과 함께 “아침 식사! 크로넛×VB”라는 트윗을 올리자, 이를 전해 들은 크로넛의 창시자 도미니크 안셀이 곧 그녀의 크로넛이 가짜라는 트윗을 올린 것. “누가 빅토리아 베컴에게 이 가짜를 진짜 크로넛이라고 믿게 했나? 늦잠을 자서 미처 줄을 서지 못한 인턴?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가 하면 파리 패션계는 뒤늦게 분홍색 돼지 젤리에 홀릭 중. 막스앤스펜서의 돼지 얼굴 모양 과일 맛 젤리 퍼시피그는 2008년 영국 <보그>에서 선정한 피플&트렌드 톱 40 중 11위를 차지할 정도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 아이템. 톰 포드가 뒤늦게 그 맛에 중독되어 요즘 퍼시피그와 콜라만으로 연명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퍼시피그 전도사를 자청한 그는 CR북 화보 촬영 때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의 입에 퍼시피그를 물려주면서 카린 로이펠트까지 퍼시피그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생전 처음 먹어봤는데, 한번 먹기 시작하니 도저히 멈출 수가 없더군요!”

모델 세자르 카시어와 유명 파티시에 겸 전직 모델인 로레인 파스칼의 요리책, 그레이스 코딩턴이 출연한 엘레트라 비더만의 요리 동영상,  로렌 부시와 쿠키를 제조 중인 칼리 클로스, 맥도날드 마니아 카라 델레바인.

몸매가 앙상해야 소위 ‘옷발’ 선다고 생각하는 패피들은 평생 입맛이라곤 느껴본 적 없을 것 같지만, 몸무게에 신경 쓰다 보니 오히려 맛있는 것만 가려 먹거나 직접 만들면서 대리 만족을 얻는 경우가 많다. 특히 먹거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패션모델들 사이에서 요리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 칼리 클로스와 모모푸쿠 밀크 바의 칼리스 쿠키(Karlie’s Kookies), 조단 던의 온라인 요리쇼 <웰 던 위드 조단 던>은 꾸준히 인기며, 내년에 MTV에서 방영될 요리 경쟁 프로그램 <스낵다운>에는 슈퍼모델 크리시 타이겐도 심사위원으로 참여한다는 소식(그녀 역시 요리 블로그를 운영할 정도로 음식에 관심 많기로 유명하다). 모델이 되기 전 유명 레스토랑에서 일했을 정도로 요리를 좋아하는 모델 로빈 로울리는 최근 랜덤하우스와 요리책 발간 계약을 맺었을 뿐 아니라 폭스텔에서 방영될 요리쇼 사전 제작에도 돌입했다는 소식이다.

이렇듯 패션모델을 중심으로 불기 시작한 요리와 먹거리 탐닉은 패션계의 최신 유행이자 고상한 취미 생활로 정착 중이다. 타쿤은 2014 S/S 컬렉션이 끝난 직후 <본 아페티> 매거진 편집장 아담 라포포트와 함께 가까운 친구, 동료들을 불러 가장 핫한 레스토랑 ‘미션 차이니즈 푸드’ 셰프 대니 보윈의 요리를 대접하는 뒤풀이를 열었다. 미국 보그닷컴은 엘레트라 로셀리니 비더만이 게스트(파멜라 러브, 칼리 클로스, 세스 마이어, 그레이스 코딩턴, 블레이크 라이블리 등)와 함께 요리하는 동영상을 시리즈로 연재 중이며, 2014 S/S 뉴욕 패션 위크 때는 팝업 레스토랑을 열기도 했다.

몇 달 전, 전직 호주 <보그> 편집장이었던 커스티 클레멘츠는 백스테이지에는 여전히 오렌지 주스에 적신 솜을 먹는 모델들이 있다고 폭로해서 한동안 잠잠했던 모델들의 다이어트 문제를 다시 이슈화했다. 그렇지만 백스테이지의 다른 한쪽에선 카라 델레바인처럼 쇼 직전 맥도날드 햄버거를 시켜 먹는 모델도 분명 있는 게 진실이다. 날씬한 이들이 보통의 여자들조차 먹기 망설여지는 기름 덩어리와 고칼로리 음식을 거침없이 먹는 모습은 얄밉기 그지없지만, 오렌지 주스에 젖은 솜을 빨아 먹는 소름 끼치는 장면을 마주하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세상을 살다 보면 기쁜 일보다는 스트레스 받는 일이 훨씬 많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을 좋게 하는 도파민이 분비돼 잠시나마 쌓인 불만과 분노를 잠재워준다. 누가 알겠나? 다이어트의 상징인 패션계가 이제 먹는 즐거움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무기력한 눈빛과 구겨진 인상 대신 방실방실 화사한 웃음꽃이 패피의 새로운 상징이 될지. 본능에 충실한 자, 기쁨을 얻을 것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