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디셈버>의 장진, 박건형, 김슬기

우리가 저마다 찬란히 빛나는 ‘개인’일 때, 비로소 김광석의 노래와 접속된다. 다재다능한 영화예술가 장진이 김광석 탄생 50주년 기념 뮤지컬 〈디셈버〉의 지휘자가 됐다. 박건형과 김슬기가 그 무대에 함께한다.

왼쪽부터 장진이 입은 블랙 오버사이즈코트는 쟈뎅 드 슈에뜨(Jardin de Chouette),티셔츠는 엠포리오 아르마니(EmporioArmani), 울 팬츠와 레이스업 워커는구찌(Gucci), 앙고라 머플러는 생로랑(SaintLaurent). 박건형의 앙고라 소재 스트라이프니트는 생로랑. 가죽 팬츠는 쟈뎅 드슈에뜨, 워커 부츠는 앤 드멀미스터(AnnDemeulemeester). 김슬기가 입은 타탄체크카디건과 금박 장식 미니 드레스, 비즈 장식망사 스타킹은 생로랑, 브라운 컬러 버클 장식롱부츠는 쟈뎅 드 슈에뜨.스타일 에디터 / 김미진헤어 / 김승원메이크업 / 오미영

후드 티에 청바지, 회색 코트를 입고 청년 사업가처럼 등장한 장진은 자신을 훌륭한 중산층이라고 소개한다. 영화예술계에는 장진 같은 ‘존경받는’ 중산층들이 있다. 박찬욱, 이준익, 강우석처럼 제작과 연출을 겸하고 있는 사람들. 산전수전 다 겪은 영화예술계의 대부들은 예술 비즈니스 세계에서 ‘대박’을 터뜨렸다고 해서 손 털고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하고, 돈을 끌어들이고, 판을 벌여 후배 예술가들을 고용한다. “제 에너지의 동력이 뭐냐고요? 채무예요. 금융권과 끝없이 밀고 당기는 일이죠. 50억으로 100억의 빚을 내서 일을 하고 이자를 갚습니다. 이자는 금융 산업을 일으키고 이야기는 예술 산업을 일으킵니다.” 장진은 호방하게 웃는다. 재작년 장진 사단(그는 공연 창작 회사 ‘필름있수다’의 대표다)을 데리고 〈SNL 코리아〉를 성공적으로 론칭했던 그가, 영화계의 위력가인NEW의 김우택 대표와 손잡고 김광석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지금 첫 뮤지컬 공연을 앞두고 약간 들떠 있다. 박건형, 김준수 같은 톱 뮤지컬 스타와 김슬기, 조원희 같은 장진 사단까지 합세한 〈디셈버: 끝나지 않은 노래〉는 김광석 탄생 50주년 기념작으로, 그의 모든 곡을 사용하는(미발표곡을 포함해) 최초의공연이 될 것이다.

“김광석은 시인이자 저항가였고 모더니스트였어요. 한 시절 우리가 시대와 불화해서 거리에서 시위 중이었을 때, 그는 ‘거리에서’를 부르며 함께 있었죠. 안치환처럼 민중 가수도 아니었고, 조용필처럼 철저한 음악인도 아니었어요. 김광석은 그냥 김광석이었지요. 기타를 메고 노래하던 볼품없는 사내였다가, 세대를 넘어서 그냥 우리에게 공유되어버린 거죠.” 장진의 뮤지컬 대본은 김광석의 노래가 울려 퍼졌던 1992년과 현재 2013년, 두 개의 시간을 오가며 첫사랑의 숨 가쁜 떨림을 전달할 것이다. “아주 통속적이고 신파적인 극을 만들 거예요. 김광석의 노래로 모던한 이야기 구조를 만들 순 없죠.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불현듯 찾아온 첫사랑의 기억 같은 뮤지컬….”

“어쩌면 〈건축학개론〉 같은 느낌일지도 모르죠”라고 뮤지컬의 주인공 ‘지욱’ 역할을 맡은 박건형이 부연한다. “김광석의 노래는 대부분 사랑 노래예요.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첫사랑의 칩을 김광석 노래가 스위치 온(on) 하는 거죠.” 류근 시인의 시에 김광석이 곡을 붙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기억한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사랑했지만’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랑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사랑을 앓으면서 성장한다는 것을, 김광석을 잃고서야 뼈저리게 알았다. 그리고 이번 뮤지컬에서는 ‘외사랑’ ‘이등병의 편지’ ‘먼지가 되어’ ‘변해가네‘ 등 수많은 청춘의 레이블이 등장해서 가슴을 때린다.

장진 사단의 신예 김슬기는 주인공 ‘지욱’을 짝사랑하는 여자 ‘여일’ 역을 맡았다(〈웰컴 투 동막골〉에서 강혜정이 연기한 산골 소녀의 이름도 ‘여일’로 장진의 창작극에 줄기차게 등장하는 이름이다). 지금, 김슬기는 장진의 첫 뮤지컬에 출연한다는 것만으로 황송(!)해하고 있다. “배역이 크지않아서 오히려 감사하죠! 제 첫 데뷔작도 〈로미오 지구 착륙기〉라고 감독님 연극이었거든요.

”어쨌든 지금 장진은 이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공연예술가 중의 한 명이며, 힘 있는 많은 창작자들이 그의 재능을 믿고 지원한다. 내가 13년전 그와 인터뷰했을 때, 그는 자신의 수많은 아이디어를 속사포처럼 쏟아냈는데, 재미로 던진 그 말들 중 많은 것들이 이미 현실화됐다는 게 놀랍다. 영화 〈킬러들의 수다〉부터 〈웰컴 투 동막골〉과 〈굿모닝 프레지던트〉까지. 그는 컬트적인 기질을 가진 매력적인 농담꾼이며, 영화예술계에서일하는 사람들은 그의 기상천외하고 시끌벅적한 프로젝트에 함께하고싶어 한다.

앙고라 소재 하늘색 터틀넥 니트 스웨터는 구찌(Gucci).

“저에겐 다양한 유전자가 있어요. 연극적으로는 이상우, 이윤택으로부터 이야기가 어떻게 시대 안에서 꿈틀거려야 하는지를 배웠죠. 영화적으로는 스티븐 스필버그나 마틴 스콜세지의 서사적 크기를 동경해요. 기운은 우디 앨런이죠. 우디 앨런의 시니컬한 수다 리듬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어요.” 시대성, 서사성, 그리고 풍자와 농담. 장진을 구성하는 이 네 가지 성분을 놓고 볼 때, 김광석과의 싱크로율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제 청춘을 지배한 노래는 차라리 ‘들국화’였어요. 김광석이 노래하던 많은 시간 동안은, 저는 군대에 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김광석이 신비한 기운으로 사람과 시간을 연결시켰다는 건 분명합니다.”

김광석은 한 번도 ‘거대한 메시지’로서 음악을 대한 적이 없다. 김민기 나 안치환처럼 직설 화법으로 노래하는 공동체의 웅변가도 아니었고, 서태지나 조용필처럼 새로운 시대정신을 폭발시키는 대중음악계의 우상도 아니었다. 김광석은 통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 나타나 청아한 음성으로 노래 부르고 홀연히 다른 세계로 사라졌다. 극장에 있을 때나 광장에 있을 때나 김광석의 위대한 지점은 그가 홀연히 빛나는 ‘개인’이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저마다 찬란히 빛나는 ‘개인’일 때, 비로소 김광석의 노래와 접속된다. 그때 우리는 술이 취한 채 비틀거렸으리라. 조금 울었으리라. 하늘에는 별빛이 눈부셨으리라. 그러니까 사랑이 막 시작될 무렵이거나 사랑이 막 끝났을 즈음…, 청춘이 막 시작될 무렵이거나 청춘과 헤어질 무렵…, 슬픔이 더 필요하거나 희망이 더 필요할 때 우리는 김광석의 노래에 마음을 기댄다. 예컨대 이런 노래.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같은 노래에. 우리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다른 일들을 생각하며, 김광석의 노래를 합창한다. 남루한 내 삶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해하며. 그렇게 사람들은 김광석의 노래와 만나 느닷없이 사랑이 아파 오고 청춘이 아파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김광석은 젊어서 죽고, 우리는 어느 시간부터인가 김광석이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살고 있다.

장진 감독의 도전은 관객들에게 이렇게 익숙한 김광석과 새로운 김광석을 체험시키는 일이다. “김광석의 노래를 과감하게 편곡했어요. 김광석을 아는 세대도 모르는 세대도 공감할 수 있도록. 어떤 노래는 완전히 새것처럼 들리지요.” 그런 면에서 쉰이 된 김광석을 CG로 재현해서 무대에 불러들이는 건, 대단한 모험이다. 부활한 김광석은 주인공과 함께 듀엣도 부를 예정이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가 우리와 똑같이 늙어서 어딘가에서 살아간다고 가정한거예요. ‘안녕하세요? 김광석입니다. 여기도 좋아졌네요…. 저도 많이 늙었죠? …저는 항상 여러분 곁에 있었어요. 곧 뵙죠.’ 그 장면은 직 기술적으로 어떻게 완성될지 모르겠어요.” 장진은 언제나 실패 위험이 도사리는 도전을 즐긴다. 간첩을 ‘순진한 인간’으로 그렸던 〈간첩 리철진〉이나 한국식 성인 코미디의 시조가 된 〈SNL 코리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게 과연 될까? 라는 의심이 있을 때 행복합니다. 그래야 진보할 수 있거든요.” 축복 같은 선물도 기다리고 다. 김광석의 미발표곡인 ‘다시 돌아온 그대’와 ‘12월’이 최초로 공개된다는 것. 악보로만 남은 김광석의 유작을 부를 수 있다는 이유로 김준수가 기쁘게 〈디셈버〉에 조인했다. “준수와 건형(박건형)은 품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완전히 다르지요. 준수는 노래로, 건형이는 연기로 대해요. 준수는 시작부터 노래로 맥시멈을 해내지요. 형이는 서서히 달궈지는 편이에요. 리허설과 무대가 완전히 다르죠. 저는 아직도 건형이의 맥시멈을 보지 못했어요. 다만 이건 말할 수 있어요. 연기를 많이 드러내지 않아도 좋은 모습이 묻어나는 배우가 됐다는 것.”〈디셈버〉의 배우로 오늘 〈보그〉 촬영에 함께한 박건형과 김슬기는 장진을 각 ‘괜찮은 사람’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불만은 장진이 너무 쁘다는 것이다. “동시에 몇 개의 프로젝트를 하고 계시죠.”

플레이보이 같은 외모와는 달리, 뮤지컬 배우 박건형은 굉장히 진지하고 사려 깊은 남자다. 춤을 추고 노래하며 ‘헐떡거리는’ 삶, 무대위 에서 번 폭죽을 터뜨리다가, 언제부턴가 가슴속에서 터지는 폭탄 냄새에 코 이 예민해지곤 한다는 그다. “제가 견딜 수 없는 게 뭔지 아세요? 저 자신에게 식상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전 거의 발악을 하지요. 꿈조차 작품에 도움이 되는 걸 꾸려고 해요. 남들에겐 고통처럼 보이지만, 제겐 그게 복이에요. 작품을 할 때마다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입니다. 〈헤드윅〉에서 트랜스젠더로 노래할 때와 김광석의 노래는 분명히 다르죠. 〈헤드윅〉 때는 전 사람들이 마음 안에 지닌 ‘소수자 의식’을 대변한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다수 안에 묻어서 살지만, 드러낼 수 없는 ‘소수자 의식’이 있는 거잖아요. 전 작품에 따라 얼굴과 몸이 변하는데, <디셈버>에서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이 돼가는 느낌이에요. 소년의 감성으로 잊지 못하는 소녀를 부르고 있다고 할까요.”



박건형이 입은 눈꽃 프린트의 셔츠와 롱 베스트는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모직 팬츠는 구찌(Gucci). 김슬기의 플라워 프린트 시폰 드레스와 크리스털 장식 테일러드 재킷은 쟈뎅 드 슈에뜨(Jardin de Chouette).

물론 박건형이 부르는 소녀가 김슬기는 아니다. 말하자면 김슬기는〈장발장〉에서 가슴 아픈 짝사랑을 하는 ‘에포닌’ 같은 역이다. “하하하. 에포닌만큼 어두운 배역은 아니에요.” 김슬기가 해사하게 웃는다. 〈SNL 코리아〉의 ‘국민 욕동생’이었다가 차분하고 고요한 ‘자연인’으로 돌아온 김슬기를 이해하기 위해선, 뛰어난 ‘관찰자’ 박건형의 도움이 필요하다. “병원 다큐멘터리를 보면 큰 병을 앓고 나서 어른이 된 아이들 있잖아요. 슬기가 그래요. 어떤 상황도 피하려 들지 않고, 그렇다고 섣불리 맞서지도 않지요.” 김슬기는 스스로를 드러내기에 게으른 사람이라고 물러서지만,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제 위치를 아는 겸손이다. 이 지구 상에 오로지 연출가가 원하는 ‘존재감’만 제 중력으로 확정하겠다는 놀라운 충성심. “저에겐 장진 감독님이 사장님이자 훌륭한 멘토시죠. 그분의 스타일을 좋아해요.”

박건형과 김슬기는 김광석의 노래를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다고 했다(그 이름이 얼마나 생경하면 김슬기는 말끝마다 ‘김광석 씨’라는 호칭을 썼는데, 목마른 사슴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스물세 살의 조숙한 여자애 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누구나, 이 거대한 세계 속에 아무것도 아닌 채로 애매해질 때, 새 외투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자신이 낡았다고느낄 때, 패잔병의 모자를 뒤로 감추고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듯 김광석의 노래를 듣는다. 한편 그렇게 우리 모두를 ‘위대한 개인’으로 불러내는김광석이라는 사람의 죽음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면, 누구든 자신에게 총알을 쏠 수 있다는 그 안타까운 진실. “김광석의 죽음에 대해선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장진은 뒤 끝을 흐렸다. “창작에 대한 고통 때문에 자살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미발표곡은 톤이 달랐죠.” 노래하는 박건형이 말했다.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았을까요? ‘12월’이란 곡의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너에게 닿지 못한 내 노래…’ 부‘ 치지 못한 편지’ 같은 노래였을 거예요. 김광석 씨에겐.” ‘먼지가 되어’조차 로이킴과 정준영의 목소리로 처음 들었다던 김슬기의 말이다. 이상하게도 뮤지컬을 앞둔 두 배우의 얼굴엔 달관의 풍모가 느껴진다.

〈보그〉 촬영장에선 김광석의 노래 대신, 영화 〈원스〉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틀어놓았다. 올 들어 처음으로 영하로 떨어진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장진과 박건형과 김슬기는 자주 몸을 움츠렸다. 장진은 히피처럼 차려입은 김슬기를 보고, 매독 주사 맞으러 나온 여자 같다고 놀리기도 하고, 사진가에게 자신의 끽연 포즈를 찍어달라고 요청한 후 ‘폐암 말기환자의 금연 권장 포스터’로 써달라며 낄낄거렸다. 연출가로서의 불안을 내비치지 않지만, 장진은 대단한 승부욕의 소유자다. 그런 점이 그를 50억 제작비로 김광석 뮤지컬을 만들 수 있는 ‘훌륭한’ 중산층으로 만들었다. “이 판에서 번 돈은 이 판으로 되돌려줘야 합니다. 그래서 전 실패해도 크게 슬퍼하지 않고 성공했다고 우쭐대지 않게 돼요. 옛날에 내가 무엇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언제나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죠.”

〈디셈버: 끝나지 않은 노래〉가 김광석의 주크박스가 될지, 장진의 러브 스토리가 될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관객의 판타지가 될지는 12월 16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