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모델 아리조나 뮤즈와 <보그>의 만남

흡인력 있는 강렬한 마스크에 온화한 미소를 지닌 슈퍼모델 아리조나 뮤즈. 한 아이의 엄마로 모델계에 뒤늦게 데뷔, 슈퍼모델이 된 그녀가 〈보그〉에 밝히는 성공과 편안함의 비결.

Glittery Night미니멀한 화이트 드레스는 연말 파티 차림으로도 손색이 없다. 실크 저지 소재의 지퍼 장식 슬리브리스 드레스는 캘빈 클라인 컬렉션(Calvin Klein Collection).

“Watch This Girl.” 2010년 10월 1일, 갑자기 ‘Arizona’라는 제목과 함께 한 문장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보그 코리아> 커버 사진가 중 한 명인 라프 스타헬린. 이메일의 내용은 고작 “이 아가씨를 눈여겨보라!”는 한 문장과 인터넷 주소 링크 하나였다. 클릭한 링크는 ‘모델스닷컴’에서 신인 모델을 소개하는 페이지를 연결했다. 짙은 눈썹에 강렬한 마스크가 신인 모델치고 꽤 인상적이었지만, 설마 ‘생짜’ 신인 모델을 <보그 코리아> 커버 모델로 추천하는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에 “이 모델과 함께 표지 촬영을 하자는 건 아니겠지?”라고 회신을 보냈다. 3년이 지난 지금도 사진가는 우리에게 “그때 넌 미래의 슈퍼모델을 못 알아봤어”라고 농담을 던지곤 한다. 그 신선한 마스크의 아가씨는 이제 슈퍼 중 슈퍼 반열에 오른 아리조나 뮤즈(Arizona Muse)다.

아리조나 뮤즈의 성공기는 이전 모델과 달라도 너무 다른 또 하나의 신데렐라 스토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모델이 되기 위해 뉴멕시코에서 LA로 건너온 아리조나는 꿈 많은 10대 소녀였다. 하지만 모델의 꿈보다 먼저 다가온 건 풋사랑. 겨우 열아홉 살의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된 그녀는 ‘이제 내 모델 인생은 끝났어’라고 체념한 채 고향인 산타페로 되돌아온다. 그런 그녀가 패션계 문을 다시 두드린 건, 아들인 니코(Nikko)가 태어나고 2년 후. 2010년 7월 니코를 데리고 뉴욕 브루클린의 작은 아파트에 자리 잡은 뒤 모델로서 두 번째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뜻밖에도 패션계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뉴욕에서 마크 제이콥스 쇼에 서면서 얼굴을 알린 후, 밀라노의 프라다 쇼에서는 오프닝과 클로징을 맡았으며, 그 시즌 프라다와 이브 생로랑이 각각 그녀를 광고 모델로 ‘점’찍었다. 러시아의 꽃집 아가씨에서 단번에 만인의 슈퍼모델이 된 나탈리아 보디아노바 이후 이보다 극적인 신데렐라식 데뷔는 없었다(그 어여쁜 나탈리아에게도 영국 부동산 재벌의 젊은 아내라는 후광이 있었다).

“아리조나를 보면, 린다 에반젤리스타와 나탈리아 보디아노바의 그림자가 보인다.” 2011년 2월호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는 편집장의 글을 통해 아리조나에게 슈퍼모델의 면류관을 직접 하사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아름답고 현명하고 성숙한 여인의 흔적이 보인다. 게다가 누가 ‘아리조나 뮤즈’란 이름의 여인을 거부할 수 있겠나!” 안나 윈투어만 그녀에게 찬사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아리조나는 꽤 오랫동안 활동한 모델 같아요.” 같은 달, 아리조나를 모델로 화보를 촬영했던 사진가 피터 린드버그가 말했다. “그녀를 보자마자 ‘신인 모델이구나’란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내가 왜 저 모델을 몰랐지?’란 의문이 들었죠.”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테판 마레는 보다 감각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시적이죠. 자연스러운 ‘에지’가 느껴집니다.” 패션 대가들의 끝없는 칭찬 덕분일까? 아리조나는 케이트 모스의 뒤를 이어, 하이 주얼리 브랜드 ‘데이빗 여먼’의 모델로 캐스팅됐고, 세상 모든 모델들의 꿈인 에스티 로더의 얼굴로 발탁되었다

White Out 캐주얼한 봄버도 드레시한 와이드 팬츠와 매치하면 정중한 차림으로 변신한다. 하늘하늘한 실크 소재 봄버와 와이드 팬츠는 캘빈 클라인 컬렉션.

<보그 코리아>가 아리조나를 최근에 만난 건 9월 중순, 뉴욕의 어느 스튜디오에서였다. “헬로!”를 외치며 스튜디오로 들어서는 그녀는 줄리아 로버츠처럼 치아가 거의 다 드러날 만큼 화사하게 웃으며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2011년 9월, 2012년 9월에 이어 세 번째 만남이었다. 제이 브랜드의 스키니 진에 매튜 윌리암슨의 푸른색 재킷, 지미 추의 스틸레토 차림의 그녀는 ‘애쓰지 않지만 쿨한’ 모습 그 자체였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톰 페슈가 ‘기적의 눈썹’이라 칭했던 눈썹은 여전히 완벽한 각도의 아치 모양이었고, 트레이드마크인 목을 살짝 덮는 밝은 갈색 단발머리는 막 침대에서 일어난 듯 헝클어져 있었다. 스튜디오를 환히 밝히는 미소와 정중한 매너는 여전했다. 아이폰으로 유모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후에는 에스티 로더와 관련해 전화 통화를 하는 듯했다. 바쁜 스케줄이 분명했지만, 촬영을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머리에 향나무 가지를 꽂거나 크리스마스 전구와 전선을 마구 휘감을 때도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깡마르고 신경질적인 모델들과 반대되는 온화한 미소의 평화로운 모델이 아리조나 뮤즈였다.

“오히려 엄마 모델이라는 사실이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 듯해요. 첫 시즌부터 엄마라는 사실에 사람들이 더 긍정적이었거든요. 제게 뭔가 물어볼 때는 육아에 대해 다시 질문을 하곤 했죠. 진정한 삶에 대해 얘기를 나눴거든요. 좋았어요!” 3년 전 모델이 되기 위해 니코를 안고 뉴욕을 찾던 시절에 대해 아리조나가 담담하게 추억담을 들려줬다. 허리케인에 휩쓸려 ‘오즈의 나라’로 날아간 도로시처럼, 패션계의 핵 속으로 순식간에 휩쓸려간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엄마라는 현실감각 덕분에 그 시절을 견뎌냈다. 1년 전 뉴욕에서 런던으로 이사를 감행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런던에 살고 있는 외할머니, 이모와 삼촌들, 친구들은 그녀를 잠시나마 슈퍼모델 아리조나에서 스물다섯 살짜리 평범한 젊은 여자 아리조나로 만들어준다. “세 살 때까지 노스 런던에서 살았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죠. 영국식 교육은 물론, 니코가 할머니와 가까이 지내는 것도 좋아요. 게다가 사람들은 친절하고 정중한 매너를 지니고 있죠.”

하지만 침착한 매너와 부드러운 미소만으로 살아남기에 패션계는 너무 거친 곳이다. “물론 저 역시 경쟁심은 강한 편이에요.” 다른 모델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거나 몰래 음료수에 설사약을 넣는 만화 같은 풍경도 그녀를 둘러싸고 벌어질까? “글쎄요. 저는 그런 일을 본 적 없지만, 저 스스로에게 엄격하긴 했어요. 이겨야만 했으니까요.” 사실 그녀에게 모델로서의 성공은 단순히 어린 시절의 꿈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당시 스물두 살의 싱글맘에게 모델 일은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홀로 브루클린 아파트에서 니코를 바라보며 불안감에 떨던 시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10대 소녀들 사이에서 아기를 품고 캐스팅해달라고 다니는 건 보통의 용기가 없었다면 시도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운이 좋았지만, 결코 남들에게 추천하고 싶지도 않아요. 모델로 성공하고 싶다면 반드시 경력을 쌓은 뒤 아기를 가지세요!”

Back to Black 폭이 넓은 스트랩 장식 블랙 드레스와 스트랩 샌들은 캘빈 클라인 컬렉션(Calvin Klein Collection). 심플한 블랙 드레스에 금색 힐 장식이 독특한 플랫폼 샌들은 좋은 포인트가 될 듯.

요즘도 아리조나는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니코를 데리고 촬영장에 나타난다. 이제 네 살 반인 니코(“하지만 직접 니코에게 물어보면 9에 4/5세라고 말할걸요!”)는 엄마의 직업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영국 브랜드 ‘넥스트’의 크리스마스 광고를 찍을 때였어요. 니코도 모델로 함께 섰죠.” 여러 차례 엄마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선 니코는 이제 전문 모델 못지 않게 태연하지만, 때로 연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힘든 눈치다. “니코는 ‘잠든 척’하는 컨셉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세 살짜리 꼬마에게 잠자는 연기를 하라는 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 뛰어놀다 보니 어느새 잠들었고, 자는 모습을 찍는 데 성공했죠. 그 천사 같은 모습이란!” 아리조나의 인스타그램(@arizona_muse)을 보면 슈퍼모델 엄마와 천사 같은 아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공개된다. 할로윈을 위해 스파이더맨으로 변신한 니코와 런던의 웨스트본 그로브(그녀가 사는 동네)를 산책하는 모자의 모습까지. “제게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엄마예요. 저의 엄마, 그리고 제가 니코의 엄마라는 사실까지요.”

거리에만 나서면 커다란 전광판에서 엄마의 모습을 찾는 것을 좋아하는 아들 니코와 달리, 아리조나는 아주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예술품 딜러인 미국인 아버지와 심리 상담가인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아리조나에서 태어나(그래서 이름도 아리조나다) 뉴멕시코 산타페에서 자랐다.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을 설계한 현조(증조할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를 둔 이 소녀는 원래 건축가를 꿈꿨다. 말하자면, 광활하고 거친 미국 남부의 사막 도시와 패션계는 지나치게 멀었던 것. 게다가 심각한 콤플렉스도 있었다. “생각해보세요. 아리조나 그레이스 뮤즈! 어린 시절엔 제 이름이 정말 싫었어요.” 한국으로 치면, 이름이 경상북도나 전라남도인 셈이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하지만 안나 윈투어도 반하게 한 매혹적인 이름에 이젠 감사하고 있다. 지난 9월 미국과 유럽에서 론칭(국내는 내년 하반기 출시 예정)한 에스티 로더의 새로운 향수 이름도 ‘모던 뮤즈(Modern Muse)’. 그 향수를 대표하는 얼굴은 바로 아리조나다. “촬영을 위해 메이크업을 받다가 그 소식을 들었어요. 향수 이름을 듣고 잠시 멍할 수밖에 없었죠!”



Mono Story내년 봄까지 이어질 블랙과 화이트의 세련된 조화. 홀터넥 스타일의 검정 에이프런 드레스와 화이트 블라우스는 캘빈 클라인 컬렉션(Calvin Klein Collection).

지난 9월 12일 뉴욕 패션 위크가 끝나던 날, <보그>는 ‘모던 뮤즈’로 변신한 아리조나와 다시 만났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에
스티 로더의 새 향수 론칭 파티. “그녀야말로 현대적인 뮤즈라 할 수 있죠.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고, 가족 중심적인 가치를 지닌 데다 품위 있고 고급스러운 외모를 지녔으니까요.” 그날 밤 에스티 로더를 이끄는 스타일&이미지 디렉터 에어린 로더는 아리조나 뮤즈를 향해 이렇게 칭찬했다. 아리조나는 여러 번 연습한 듯한 말투로 소감을 전했다. “더 이상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뮤즈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현대적인 뮤즈란 비즈니스 우먼이자 엄마, 파트너, 친구죠. 그런 아름다운 컨셉의 향수 모델로 제가 선택되었다니, 영광일 뿐입니다.”

에스티 로더와의 인심 후한 계약 덕분일까? 이제 그녀는 런웨이에 서는 대신, 프런트 로에 앉아 패션쇼를 감상하는 여유를 갖게 됐다. 2014년 봄 시즌 캣워크에서도 그녀를 찾아보긴 힘들었다. “캣워크에 서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에요. 하지만 지금 제게는 니코가 최우선 순위예요.” 이제는 스스로 일을 선택하는 위치에 올랐기에 찾아 온 여유는 그녀에게 새로운 행복을 안겨줬다. 아들과 함께 런던의 켄싱턴 파크와 하이드 파크를 한가롭게 거니는가 하면, 호주인 셰프 빌그레인저가 운영하는 ‘그레인저스&Co.’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소소한 즐거움까지. 무엇보다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패션 무대를 스스로 선택하는 삶이야말로 모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삶일 것이다.

Winter Getaway겨울을 맞아 더운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면, 심플한 홀터넥 톱과 지퍼 장식 블랙 팬츠로파티 룩을 완성해도 좋을 듯. 톱과 팬츠는 캘빈 클라인 컬렉션. Beauty Note아리조나의 매끄러운 피부는 ‘더블 웨어 파운데이션’에 ‘6세대 갈색병’을 섞어 발라 완성했고, ‘퓨어 칼라 블러쉬’ 블러싱 누드 색상으로 혈색을 더했다. ‘더블 웨어 아이 펜슬’과 ‘더블 웨어 마스카라’로 눈매를 또렷하게 잡아준 다음, 눈두덩에 ‘퓨어 칼라 엔젤 라이츠 파이브 칼라 아이섀도우 팔레트’ 엔젤 피치 색상을 덧발라 깊고 그윽한 눈매를 표현했다. 입술엔 ‘퓨어 칼라 하이 인텐시티 립 락카’ 피치 글래스 색상을 부드럽게 펴 발라 완성! 제품은 모두 에스티 로더(Estée Lauder).

그렇다면 이 모든 여유를 함께 즐길 만한 ‘누군가’는 니코와 가족 외에 또 없는 걸까? “지금 제게 남자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이죠? 그건 노코멘트예요. 또 어떤 식으로 와전될지 모르니까요.” 실제로 지난 몇 달간 인터넷에는 니코의 친부를 둘러싼 소문이 돌며 그녀를 괴롭혔다. 한동안 퍼졌던 어느 톱 모델과의 염문은 꽤 진실처럼 여겨지지 않았나. “어떤 말이라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상처를 입을 수밖에요. 물론 무시하려 애쓰고 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지만요.” 그럴 때일수록 그녀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위안을 찾는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이런 자기 치유법은 연기에 도전하고 싶은 그녀에게 좋은 훈련이 될 만하다. “물론 계속해서 모델 일은 할 겁니다. 하지만 연기 수업도 곧 시작해요. 새로운 도전이 될 테니까요.” 11월 중순부터는 한국의 극장과 TV에서 아리조나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출연한 루이 비통의 영상 광고 ‘여행으로의 초대’가 극장에서 상영되니까. 데이비드 보위와 함께 베니스의 파티장을 거니는 아리조나의 모습을 보니, 여배우로 변신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게 어렵지 않다. 이제 발맹의 런웨이가 아닌,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 카펫에 서는 아리조나. 호주에서 촬영을 끝내고 런던행 비행기를 타기 전 <보그>에 보낸 메일에서 굿바이 인사를 건네던 아리조나가 다음 행보를 묻는 질문에 조심스럽게 답했다. “글쎄요, 아직까지는 희망 사항일 뿐이에요. 제 삶은 늘 움직이고 있으니, 이제 또 어떤 방향으로 향할지 누가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