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빈과 함께 한 낯선 조우

누구도 김옥빈이 다음 작품에서 어떤 캐릭터가 되어 어떤 연기를 할지 예상하지 못했다. 영화의 재료로서 기능하는 것을 배우라고 한다면, 최상급 재료라서 가질 수 있는 의외성이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스릴러 영화 <열한시>에서 우리는 또 다른김옥빈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포켓 장식의 실크 셔츠는 허환 시뮬레이션(Heohwan Simulation at D,Nue), 크리스털 장식초커는 샤넬(Chanel), 펌프스는 디올(Dior). 알루미늄 소재 의자는 까레(Kare).

김옥빈은 매혹적인 블랙홀 같은 존재다. 어떤 사건이나 시간도 그녀 안으로 들어가면 김옥빈의 색을 띠고 그녀의 것이 되어버린다. 독보적이고 독특한 그녀의 세계 안에서 배우로서의 자신을 자유롭게 방목하던 김옥빈은 자유롭고 즐겁게 요동치는 에너지 그 자체였다. 그래서 김옥빈의 영화에서는 언제나 날것의 에너지를 목격할 수 있었다. <다세포 소녀>의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1724 기방난동사건>의 설지는, 그리고 <박쥐>의 태주와 <시체가 돌아왔다>의 동화는 각기 다른 옷을 입고도 하나같이 재미있어죽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풍성한 표현을 담은 표정, 기민한 몸짓, 그리고 그로 인해 생성되는 압도적이고 비범한 공기는 어떤 기대를 품게 했다. 그 원시적인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 후의 그녀가 더욱 매혹적인 배우로 한 번 더 성장하리라는. 마침내김옥빈의 시간이 흘렀다. 그녀에게 변화는 점진적이지 않다. 급진적인 탈바꿈이다. 어느새 블랙홀의 중력을 견디고, 사상의 지평선을 돌파해, 어디에서고 자유자재로 그 힘을 조종하게 된 김옥빈이 여기에 있다. 자신을 멋대로 이끌던 펄떡대는 에너지를 원하는 대로 부리는 절제는 배우로서의 더 큰 욕망에서 비롯됐다. 11월 28일 개봉하는,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스릴러 영화 <열한시>부터는 김옥빈은 더 많이 욕심내고 더 많이 매혹하는 배우가 될 것이다.

시간 여행은 매력적인 소재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반복된 낡은 소재이기도 하다.
<열한시>의 타임머신은 오로지 24시간 미래로만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그 점이 신선했다. 보통 시간 여행을 다룬 영화들은 아주 먼 미래나 과거로 가지 않나. 24시간의 시간 여행은 마치 나를 복제한 쌍둥이를 만나는 것과 같은 경험이다. 같은 공간 안에 나와 똑같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다. 거기서 생기는 인물의 혼동도 재미있는 포인트를 만들어낸다.


하이넥 가죽 톱은 구찌(Gucci), 페플럼 장식의 실크 시가렛 팬츠는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 at Mue), 화이트 펌프스는 지미 추(Jimmy Choo), 오른손 뱅글은 누이(Neu), 반지는 CK 주얼리(Ck Jewelry), 왼손의 실버 팔찌는 아가타(Agatha). 테이블은 까레(Kare).

<열한시>는 비밀이 많다. 시사회 전까지 영화는 물론, 시나리오도 극비로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경우는 보통 반전이 엄청나던데.
내 해석으로는 반전은 없다. 반전 대신 답이 정해진 퍼즐을 맞춰나가는 재미다. 영화 속 인물들은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스스로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지 못한다. 관객 입장에서도 똑같이, 다음 장면이 어떤 행동이 될지 예상할 수 없게 한다. 하나씩 제시되는 실마리를 캐치하며 이해해나가야 하는 영화다. 그래서 설사 결말을 알고 본다 해도 흥미로울 것이다.

캐릭터적으로 배우 김옥빈을 자극한 ‘영은’의 매력은 뭐였나?
항상 나는 독특한 캐릭터에 끌렸다. 시간 여행에 도전하는 연구원은 이제껏 연기한 배역 중 가장 현재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 점이 되레 나에겐 새로웠다. 카이스트 출신의 엘리트 연구원 설정이 매력적이었다. <열한시>가 캐릭터보다는 내러티브 중심인 영화이긴 해도.

<열한시>의 시나리오를 처음 볼 때 판단 기준은 뭐였나?
시간을 다루는 시나리오는 논리적으로 잘 정돈돼 있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을 설득할 수 있고, 나 자신이 설득될 수 있다. <열한시>는 잘 쓴 시나리오였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시간 여행은 블랙홀과 웜홀을 통한 시간 여행을 전제로 한다. 그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생길 때마다 김현석 감독님을 붙들고 질문 세례를 퍼붓기도 했다. 현장에는 카이스트 학생이 자문 역의 스태프로 와 있기도 했는데, 그 학생과의 대화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감독님이 시간 여행이라는 컨셉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읽어보라며 주신 아인슈타인이나 리처드 고트 교수의 책이 재미있게 읽혔다. 과학이라는 게 너무 재미있는 것이더라. ‘아, 이래서 사람들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거구나’ 했다.


A라인 실루엣의 울 소재 재킷은 캘빈 클라인 컬렉션(Calvin Klein Collection), 목걸이는 스와로브스키(Swarovski), 반지는 누이(Neu), 화이트 펌프스는 지미 추(Jimmy Choo). 유리와 스틸 장식의 모던한 테이블은 까레(Kare).

왕성한 지적 호기심이 오히려 영화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나?
캐릭터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을 때는 연기에 방해가 되겠지만, 영은 캐릭터는 아주 명확하게 역사를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내가 신경 쓴 부분은 어쩌면 영화 외적인 것이었다. 모든 시간을 다루는 영화는 생각의 범위를 넓혀갈수록 사소한 것에 신경 쓰게되는 것 같다. 영화에 필요한 것 이상의 것까지 알고 싶어져 나중에는 평행 우주에 대해서까지 알고 싶어지더라. 그렇게까지 생각이 나가면 정말 헷갈리기 시작한다.

<열한시>의 시간 여행은 어떤 의미, 혹은 주제 의식을 제시하나?
영화를 볼 때, 그리고 선택할 때 ‘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뭐야?’ ‘주제가 뭐야?’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를 하나의 종합 문화, 그 자체로 인지하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열한시>는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남겼다. 영화 초입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마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라는 성경 구절이다.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미래를 바꾸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결정된 미래에 짜 맞춰가게 된다. 그러다가도 어느새 미래가 바뀌어 있기도 한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 나 자신이 오늘 뭘 하고 내일 뭘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내가 정해진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혹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건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건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영화 출연을 결정한 후 캐릭터 빌딩은 어떻게 하나?
지금까지는 캐릭터 빌딩이라기보다는 감성적으로 캐릭터의 느낌을 만들어가는 데에 치중했다. 이제껏 운 좋게 좋은 감독님들, 좋은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내가 느끼는 캐릭터는 이럴 거야’ 하며 편안하게 접근해갔다. 하지만 차츰 나이가 들고, 배우로 데뷔한 지 8년이 넘어가니까, 욕심이 많이 생기기 시작한다. 캐릭터 빌딩에 집중하다 보면 감성적인 것을 놓칠 때도 있겠지만, 오히려 인위적으로 설정한 틀 안에서 멋진 캐릭터가 탄생하기도 하더라.


블랙앤화이트의 터틀넥 니트 톱은 프로엔자 스쿨러(Proenza Schouler).

데뷔한 지 8년, 나이는 스물일곱 살. 주연 필모그래피는 데뷔작 <여고괴담4-목소리>부터 <열한시>까지 아홉 편. 이상하게 김옥빈은 한 10년 넘게 한 스무 편 넘는 영화를 한 30대 여배우 같다.
그러게.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한다. 나, 알고 보면 문근영과 동갑이다. 일반적으로 나를 보는 이미지가 고분고분하고 예쁜 20대 여자가 아니라 할 말은 하는 배우 이미지가 강해서인 것 같다. 정작 나 자신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고, 매일 특별하고 재미있는 날을 기다리는 사람인데 말이다.

스물일곱 살치고는 배우로서의 존재감도 큰 것 같다. 그만큼 조숙한 책임감을 갖고 연기를 해왔다는 증거 아닐까?
처음 데뷔할 때 나는 아기였다. 현장에서 힘들면 울고 화장실에 숨었다. 매니저와 감독님에게 떼를 쓰며 “지금 못하겠어요. 이따가 찍으시면 안 돼요? 저는 너무 슬퍼서 화장실에 가서 울 거예요”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땐 열아홉 살이었으니까 귀여워해주셨던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스태프 언니 오빠들에게 큰 피해를 끼쳤다. 올해 드라마 <칼과 꽃>을 하면서 내가 변했구나 하고 느꼈다. 책임감이라는 것을 크게 의식했다. 기대한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 모두가 힘이 빠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 으쌰으쌰 하며 끝까지 성의 있게 드라마를 마쳤다. 나는 연기에 있어서는 스스로 아주 혹독한 기준을 매기는 사람이다. 그 기준을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채우기 위해 더 힘을 써야 했다. 연기를 매일 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피곤하고 힘들면 설렁설렁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분명 있다. 끝까지 그 마음에 굴복하지 않고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래서인지 애착이 크다. 드라마가 끝나고 쫑파티를 했는데 스태프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끝까지 남아 있게 되더라.

일반적으로 여배우는 예민함의 아이콘이다. 현장에서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고 잘 배려해줘야 하는. 삐치니까.
현장에서의 김옥빈은 여배우들이 가지는 신비감은 없다고 하더라. <열한시> 현장에서 나는 ‘여배우’보다는 ‘촬영부 막내’처럼 지냈다. 항상 배우들과 어울렸고, 감독님이 함께 계셨다. 술자리도 다 같이 하고, 게임도 다 같이 하고, 농담도 다 같이 하고. 김현석 감독님 현장의 특징인 것 같은데, 분위기가 좋은 나머지 배우끼리 얼굴만 마주 봐도 웃음이 나서 연기가 안 될 정도였다.


배트윙 소매의 실크 하이넥 블라우스는 캘빈 클라인 컬렉션(Calvin Klein Collection), 니렝스 스커트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스틸 목걸이는 CK 주얼리(Ck Jewelry), 실버 팔찌는 토스(Tous). 가죽 장식 알루미늄 소재 의자는 까레(Kare).

연기에 집중하는 데 필요한 분위기나 환경은 그래도 필요하지 않나?
정재영 선배는 스위치를 끄고 켜는 것처럼 놀다가 홱 돌아서면 바로 연기가 된다. 그러니까 현장에서 후배들도 챙기면서 자기 연기도 확실히 해낼 수 있다. 정말 멋진 선배다. 다니엘은 현장을 즐기면서도 연기할 때 자유롭고 새로운 시도를 서슴없이 즐긴다. 그런데 내 경우엔 집중이 필요하다. 그리고 몰입이 잘 안 되기 때문에 꼭 연기에 들어가기 전에 시간을 가져야 한다. 유쾌한 현장을 경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웃다가 집중을 놓치는 게 힘들 때도 분명 있었다. 혼자 집중하고 있으면 심심한 줄 알고 누군가 다가와 장난을 거니까, 한번 상황을 정리했다. “제가 갑자기 말도 안 하고 혼자 있으려고 하면 그건 화난 게 아니니까 알아주세요” 하고 양해를 구해 혼자 있을 시간을 확보했다.

이제껏 겪은 영화들과 결이 다른 영화인데, 감독님과 영화적인 호흡도 잘 맞았나?
김현석 감독님은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 그날의 촬영을 완벽하게 준비하고 촬영 현장에서는 남들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자신이 완벽하게 준비돼 있으니까 그 안에서 배우가 어떻게 놀아도 다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처음 며칠은 설렁설렁하는 것처럼 보여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매일 현장에 가장 먼저 나와서 모든 준비를 마쳐두시는 걸 보고 어떤 분인지 알게 됐다.

배우는 감독을 통해 한 번씩 벽을 넘는 경험을 하기도 하는데.
<박쥐> 때 박찬욱 감독님은 많은 예술적인 영감을 떠올리게 해줬다. 책이나 음악, 영화를 제시해주면서 영감을 불어넣는 쪽이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경험한 영화들은 이미 누군가 만들어놓은 세계에 들어가서 그곳에 동화되려 노력하고 맞춰가며 나 자신을 꺼내야 하는 느낌이었는데, 김현석 감독님은 완전히 달랐다. 감독님이 만들고자 하는 세계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경험이었다. 생각을 공유하며 서로 쿨하게 협업하는 느낌이 강했다.


독특한 주름 장식의 울 소재 원피스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가죽과 믹스된 스틸 뱅글은 누이(Neu), 펌프스는 디올(Dior).

다음 영화는 내년 상반기 개봉할 <소수의견>이다. 국가권력에 대한 대항을 다룬다. 그런 작품에 출연하는 것 자체를 배우의 정치적 선언, 혹은 정치 참여라 여기는 경우가 많다.
배우의 연기를 정치색으로 수용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배우는 시나리오가 좋아서 영화에 참여하지, 정치색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에 참여하는 게 아니다. <소수의견>에서 나는 한 아버지가 휘말린 강제 철거와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계기를 만드는 기자 역할이다. 국가권력에 대한 대항보다는 억울한 아버지의 삶을 그리는 데에 집중했다. 그 아버지의 답답한 마음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영화는 끝난다. 사실 나는 이제껏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소수의견>을 하면서 좀더 의식 있는 20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열한시>와 <소수의견>은 이제까지 선택한 영화와 확실히 다른 노선으로 가고 있다.
누군가 내가 하고 싶은 캐릭터를 써주지 않는 한, 배우는 들어오는 캐릭터 안에서 그 시대의 자신에게 맞는 연기를 해나가는 존재다. 의식적으로 노선을 변화시키려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시나리오를 볼 때 기준은 단순하고 확고하다. 책을 읽을 때처럼, ‘재미있어’ ‘재미없어’로 나뉜다. 기발하고, 독특하고, 감성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영화를 볼 때도 책 읽을 때와 똑같이 의미 없이 쓰인 신들을 보면 참을 수가 없다. 늘어지는 걸 너무 싫어한다. 그 기준대로 시나리오를 고르다 보면 남들이 하지 말라는 것을 내가 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는 때도 있는데, 이제는 남들의 조언도 들으려 한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과 내가 나를 보는 것이 시선이 다르더라. 영화라는 게, 배우라는 게, 재미있다고 다 하면 안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매니지먼트의 조언이 필요하지 싶다.

감독이 되어 당신이 좋아하는 기발하고, 독특하고, 감성적이고, 늘어지지 않고, 의미 없이 쓰인 신이 없는 세계를 창조해보고 싶진 않나?
아닌 게 아니라 요새 영화를 보면 촬영이 보인다. 영화 자체에 집중이 안 될 때도 많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찍으면 이렇게 안 찍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분명 연출이라는 게 재미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감독은 여러모로 많이 갖추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종합예술가여야 한다. 나는 뭘 시작할 때 완벽하게 알아놓지 않으면 불안감이 큰 편이니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지금, 연출에 욕심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