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과 취향을 대변하는 향기

한 사람의 품격과 취향을 대변하는 향기.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에게 추억을 남기는 12월, 당신은 어떤 향으로 속삭일 것인가.

향수는 디올 ‘자도르’ , 왼쪽 구두는 디올, 오른쪽 스타킹은 월포드, 구두는 크리스찬 루부탱

“플로 데 로카일 비누, 시냇가의 꽃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프랭크(알파치노)는 향기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 여인의 이미지를 100% 유추해낸다. “5피트 7인치 키, 다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 마치 그의 머릿속에 향기가 그림을 그려준 듯 보였다. 이처럼 향은 주인의 품격과취향을 대변한다. “나는 자신이 사용하는 향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여자들이 불쌍해요. 향은 그 자체로 말해야 합니다. 향은 은밀하게 속삭이니까요.” 가브리엘 샤넬의 말처럼, 향기는 보이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과 주인의 이미지가 딱 맞아 떨어졌을 때 어떤 휘황찬란한 주얼리보다도 사람들에게 당신을 인상적으로 각인시킨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게스트로 나갔을 때 그녀에게 나던 향이 너무도 ‘오프라’ 같아서 기억에 남아요. 신선하고 깨끗하고 아주 풍부한 향이었는데, 입욕제와 보디크림의 향이 섞인 향이었어요. 그녀는 향수를 쓰지 않거든요. 나는 사람들이 보디, 핸드크림, 퍼퓸, 심지어 잘 맞는 데오도런트를 개성적인 방식으로 레이어링했을 때가 좋아요. 그 블렌딩은 당신만의 것이고, 향에 압도되지 않는, 온전한 스스로의 향이니까요.” 최근 세포라에 자신의 향수 브랜드 ‘리저브 글로벌’을 론칭한 아름다운 청년, 대니 서가 말했다.

배우 이민정과 해외 출장을 떠났던 한 기자도 비슷한 경험을 전했다. 의논을 하기 위해 그녀가 자기 쪽으로 고개를 숙일 때마다 달콤한 꽃 향기가 나더라는 것.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왜 그녀에게선 이렇게 좋은 향이 풍기고 난 아닐까’란 생각에 열등감까지 느꼈단다. 그 향이 너무 좋아 자꾸 그녀 주변을 기웃거리는 자신이 변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나? 셀럽 스타일리스트, 한혜연도 향에 이끌린 한 남자를 회상했다. “기 라로쉬의 ‘드라카누아’란 향수가 있어요. 당시 미국의 ‘니콜’ 같은 핫한 클럽에 가면 온 천지가 그 향이었죠. ‘윽, 이게 뭐야!’란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독한 향인데 그 향수를 뿌린 남자를 만난 거죠. 무척 동물적이고 마초적인 향 때문인지 첫인상아 아주 강렬했어요. 너무 좋아서 심지어 그 향수를 사서 집에 뿌릴 정도였죠(“내 몸에 직접 뿌릴 순 없었으니까요”). 로맨틱한 연애는 전혀 아니었어요. 딱 그 향처럼 내게 ‘남자’라는 존재감을 일깨워준 만남이었죠. 어쨌든 그 향이 그와 사랑에 빠진 이유 중 하나였던 건 분명해요. 지금도 그 향을 맡으면 그가 떠오를 정도니까요.”

향에 대한 취향을 공유하는 이들은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레흐의 임희선 실장은 무척 멋쟁이였던 어버지를 떠올렸다. “아주 영민하고 멋쟁이셨는데 돌아가실 즈음엔 말도 없어지고 아이처럼 변하셨죠. 한번은 파리 출장을 간다고 하니 모자랑 향수를 사오라고 하시더군요. 모자 숍에서 중절모를, 에르메스에서 ‘떼르 데르메스’를 사왔는데, 써보지도 못하시고 돌아가셨죠. 그런데 헤어 스타일리스트 김정한을 만났는데 바로 그 향수를 쓰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데, 그땐 정말 뭉클한 게 뭔가가 느껴지더군요. 절친한 사이가 된 걸 보면 같은 향을 공유하는 사람과는 성격도 잘 맞나 봐요.”

반면, 이미지와는 상반된 반전 향수로 매력 지수를 높이는 경우도 있다. 스타일리스트 정윤기와 배우 고소영의 만남이 그랬다. “94년 스타일리스트 일을 시작하면서 꼭 같이 일해보고 싶었던 그녀를 사석에서 처음 만났죠. 화장기 하나 없는 완벽한 미모에 방긋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는데, 방금 샤워하고 나온 듯한 상쾌한 향기에 반해 버렸어요. 덕분에 절친이 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만약 그녀가 당시 유행하던 강한 향수를 사용했다면 그녀의 도도한 이미지와 겹쳐 쉽게 다가가지 못했을 것 같아요.” 물론, 향 때문에 비호감 지수가 치솟는 경우도 있다. <보그> 피처팀 기자는 나무를 태운 듯한 스모크 향에 의문을 제기했다. “담배 냄새 같아요. 왜 그걸 굳이 향수로 뿌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내게는 아쿠아 계열의 향수가 그렇다. 오이와 물미역을 섞은 듯 짙은 아쿠아 향을 10시간이 넘게 비행기 옆자리 사람에게서 맡은 이후 비슷한 향만 맡아도 역한 기분이 꾸역꾸역 올라온다. 조향사 임원철은 향에 따라 이렇듯 호불호가 갈리는 캐릭터 강한 향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혈액형으로 따지면 B형 같은 향들이 있어요. 까칠하고, 섞어놔도 잘 튀어 오르고, 쓰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심한, 가령 파촐리, 스모크 같은 우디 계열의 향들이죠. 반면 어디 섞어도 잘 어울리는, 바이올렛 잎에서 나는 그린 플로럴, 제비꽃, 사과 향은 서글서글한 O형을 연상시키죠. A형은 화이트 머스크와 아이리스. 잔잔하게 바닥에 깔리면서 잘 드러나지 않고 다른 향이 부각될 수 있게 도와주는, 그렇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매력을 발산하는 향이죠. 그리고 AB형은 네롤리와 오렌지 블러섬. 이들은 남성적이고 스파이시하다가 꽃 향기와 나무의 자극적인 향기도 동시에 풍기는, 종잡을 수 없이 특이한 향이죠. 그러고 보면, 자신이 원하는 이성의 캐릭터에 맞춰 향기를 고를 수도 있겠네요.”

<뉴욕 타임스>는 남자들에게 향수는 화려한 실크 넥타이보다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전했다. 랑콤의 남경희 홍보팀장도 경험담을 전한다. “오후 미팅에 여자를 만난다면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를 뿌리죠. 노곤하고 지쳐 있을 때라 상대방에게 기분 전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요. 실제로 “와, 좋은 향이네요. 무슨 향수 뿌리셨어요?”란 인사를 받거나 미팅 분위기가 좋아지는 경우가 많아요. 남자와 미팅하게 될 경우엔 플로럴 부케 향을 뿌립니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진한 향수는 싫은데, 플로럴 계열 향수를 뿌린 사람과 미팅을 하면 말이 예쁘게 나간다나요? 반면 브랜드의 공식적인 행사에선 꼭 오드퍼퓸을 뿌려요. 사람이 많은 곳에선 오드트왈렛으론 약하더라고요. 제대로 갖춘 느낌이 들거든요. 뭔가 당당해진달까요.”

그녀의 말은 옳다. 향수의 라틴어 어원은 ‘연기로 통한다’. 고대인들은 종교의식에서 신과 인간이 교감하는 매개체로 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향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이 이뤄지는 건 당연지사. 12월,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에게 기억될 일이 많아지는 한 달, 당신은 그 누군가에게 어떤 향으로 속삭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