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다재다능한 디자이너, 톰 포드

2016.03.17

by VOGUE

    다재다능한 디자이너, 톰 포드

    포드는 스스로를 “어떤 것에도 뛰어나지 않지만, 어떤 것이든 그럭저럭 잘해내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패션계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디자이너라고 부른다.

    톰 포드(Tom Ford)는 지난밤 2시간을 잤고,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시달리고 있다. “토할 것 같아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아주 근사해 보인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말끔한 검정 수트와 금색 커프 링크스로 포인트를 준 풀먹인 흰 셔츠(단추를 채우지 않은 채)를 입고 있다(이 수트는 똑같은 5~6벌의 옷 중 한 벌이다. 세탁하거나 다림질하는 동안 이 수트들을 돌아가며 입는다. 그리고 계속 새걸로 교체한다. 그는 하루에 두 번 옷을 갈아입는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다른 옷이 준비돼 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더럽고, 역겹고, 기진맥진한 상태이고, 피곤하고, 짜증 나고, 너덜너덜한 기분이에요.”

    그는 여전히 불안할 정도로 정중하고 지독하게 잘생겼다. 쉰한 살이라는 나이에 비해서가 아니라, 어떤 나이와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 살짝 그을린 피부에 반짝이는 눈, 멋진 근육, 말끔하게 손질한 손톱, 이 남자는 서른다섯 살 때도 상당히 미남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때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진 않는다. 그가 이렇게 피곤한 건 LA와 런던 집 사이의 시차 때문만은 아니다. LA에서 보낸 5일은 아들 잭과 떨어져 보낸 가장 긴 시간이었다. 그는 아들이 그리웠다. 이 10개월 된 ‘기쁨 덩어리’는 그동안 그가 운동을 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빠 노릇과 제국의 운영자라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느라 짬을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먹는 음식도 더 나아지진 않았다.

    “퍼시 피그스(Percy Pigs, 일종의 젤리)와 코카콜라만 먹는답니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캔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캔을 땄다. “이 안에 140칼로리가 들어 있다는 건 잘 알아요. 강한 자극이 필요한 날엔 하루에 두 캔도 마십니다. 매일 체중을 재는데 지금 2kg 정도 늘었어요.” 나는 아무도 모를 거라고 말했다. “수트 덕분이죠.” 우리는 빅토리아에 있는 경매 회사 필립스 드 퓨리 위층에 위치한, 천장이 높고 널찍한 그의 반짝이는 본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곳은 모든 것이 인상적일 정도로 크다. 커다란 이중문을 비롯해-방문객은 이 문을 통해 안내 데스크로 가게 된다. 데스크가 너무 커서 뒤에 앉아 있는 예쁜 금발 아가씨가 작아 보인다-멋지게 활짝 핀 난초에 이르기까지. 은쟁반에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는 둥글고 반짝이는 사과들은 너무 파래서 뭔가를 첨가한 듯 보인다. 톰 포드 인터내셔널 본사에선 모든 물건과 모든 사람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나는 직원 중 누군가가 말끔하지 않은 모습으로 출근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제 사무실 직원이 찢어진 청바지와 지저분한 트레이너를 입는다면, 그런데 그게 근사해 보인다면 괜찮아요. 하지만 제대로 해내는 것과 부적절해 보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생각만 해도 입맛이 쓴 것처럼 말했다. 포드는 디테일한 것에 절로 눈이 가기 때문에 당신은 그를 만난 지 5분 만에 그가 이미 당신을 훑어보고 더 멋진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 10가지를 계산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묻고 싶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을 그대로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데 있어 너무 예민하기 때문에 위치가 잘못된 주머니, 모호한 칼라나 소매는 그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가끔 실수를 하고 그 실수를 통해 배웁니다. 그들은 자신이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소매가 세 개 달린 셔츠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러면 저는 말합니다. ‘도대체 그게 뭡니까? 다시는 그 옷을 입지 말아요!’ 저는 아주 직설적이에요. 웃으며 말하지만 아주 진지합니다.” 본인은 옷과 관련해 실수한 적이 없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있지요! 그래서 5년에 한 번씩 재평가할 필요가 있어요.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울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좋아, 너는 저울의 어디쯤 있지? 바보처럼 보이진 않나? 내가 포기하거나, 혹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있나? 검정 셔츠와 검정 수트를 입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리고 언젠가 그것을 다시 입으면 근사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라는 생각만 듭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척하며 몸을 움츠렸다.

    포드는 몇몇 유령을 잠재워야 했다. 파티, 음주, 그리고 검정 수트를 포함해서 말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가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던 구찌 시절의 마지막 나날은 쾌락만 좇던 향락주의의 어지러움과 싸우는 데 소진되었다. 끊임없이 파티가 이어지다 어느 날부턴가 멈췄다. 사이가 틀어진 후 PPR-구찌를 소유한 패션 재벌. 현재는 케어링(Kering)으로 이름을 바꿨다-은 포드와 그의 CEO인 도메니코 데 솔레와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2004년에 그들은 쫓겨났다.

    다음 해에 그는 톰 포드 인터내셔널을 론칭했고, 데 솔레가 CEO로 이사진에 합류했다. 처음엔 향수와 화장품(제작은 에스티 로더가 맡았다)으로 시작했다. 그 후 안경테와 선글라스, 남성복(자신이 입고 싶은 수트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5년 후엔 여성복을 연이어 출시했다. “저는 그것을 놓쳤어요. 완벽하게 마무리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다니 저답지 않게 느껴졌어요.”

    “제게 남자 수트를 갖고 싶다고 말하는 여성들이 있었어요. 제가 아는 모든 여성이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었지만 아무도 사지 않았어요.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섹시한 옷을 원했던 겁니다! 여성들은 여기 아래까지, 그리고 저기 위까지 트임이 들어간 옷을 사기 위해 제게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지 않았어요. 이제 저는 쉰한 살입니다. 구찌에서 그런 옷을 만들 때는 서른세 살이었어요. 저는 균형을 찾아야 했고 그러려면 몇 시즌이 걸립니다. 그런 균형에 다가가고 있지만 거기에 도달했는 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 그런 생각이 그를 괴롭히는 게 분명하다. “이 정도 위치에 오른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는 손을 허공에 높이 들어 올렸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건 상당히 힘듭니다. 여기에 있는 게 좋고, 여기에 익숙하고, 저기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오, 그런 생각을 하면 미칠 것 같아요. 사람들의 기대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새로운 브랜드이고, 10년 동안 무대에서 멀어져 있다가 다시 그곳으로 뛰어들려 한다면 학습 과정을 경험해야 해요. 그런데 저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스타일 시대정신이 포드의 맥시멀리즘 미학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건 아니지만(“패션은 아주 이상한 국면에 접어들었어요. 너무 줄이고 또 줄여서 이제 갈 곳이 없습니다”라고 그는 절망적으로 말했다), 그의 사업은 성장하고 있다. 그것도 빠른 속도로. 제품 카테고리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매장도 전 세계적으로 수백 개다. 가장 최근에 런던 슬론 스트리트에도 문을 열었다(그는 메이페어의 인기 있는 마운트 스트리트는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슬론 스트리트만큼 교통이 편하지 않고, 매장들이 너무 작아 그의 방대한 컬렉션을 다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 평생 일한 것보다 지금 더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그리고 압박감이 그 어느 때보다 큽니다. 무엇보다 이 회사에 제 돈을 엄청나게 투자했고, 제 이름을 내건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맞아요. 여기에 제 자존심이 걸려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요. 1~2년 후엔 모든 것이 안정됐으면 좋겠어요.” 그는 예전엔 더 젊었고, 시차에도 덜 민감했다는 걸 인정했다. 당시 그는 구찌를 파산 직전의 병든 하우스에서 엄청난 이윤과 메가와트급 쇼를 가진 세계적인 브랜드로 환골탈태시켰다.

    구찌와 이브 생로랑을 책임지는 동안, 1년에 16번의 남성복과 여성복 컬렉션을 디자인했고, 광고를 주도했으며, 부쉐론, 보테가 베네타, 그리고 발렌시아가 같은 브랜드들을 인수하는 기념비적인 결정들을 진두지휘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알렉산더 맥퀸과 스텔라 맥카트니의 지분을 사들였다. 브랜드 인수에 대해선 지금도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

    “저는 디자이너들이 대기업에 뽑혀가는 걸 보면 행복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전화해서 ‘제가 당신 계약서를 꼼꼼히 봐드릴까요?’라고 묻고 싶습니다. 무일푼일 때는 몇백만 달러라는 돈이 엄청나게 많아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의 재능이 뛰어나다면 세월이 흐르면서 아주 적은 액수처럼 느껴질 겁니다. 그리고 저는 아주 많은 사람이 비교적 적은 돈에 자신의 이름을 파는 것을 봤습니다.”

    다른 디자이너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항상 보다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능력과 적응력, 말하자면 자신의 역할을 수석 디자이너에서 아트 디렉터로, 그리고 브랜드 이사로, 똑똑한 비즈니스 브레인으로, 뛰어난 마케터로 탈바꿈시킨 능력이었다. 잘 못하는 일도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겸손하게 말했다. “저는 어떤 것에도 아주 뛰어나지 못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대부분은 꽤 잘하는 편입니다. 저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그게 다른 점이겠죠.”

    그 ‘할 수 있다’ 리스트에 하나가 더 추가됐다. 아버지라는 역할 말이다. 최근 포드의 세계는 행복하게 엉망진창이 되었다. 알렉산더 존 버클리 포드(줄여서 ‘잭’)가 예정일을 2주 앞두고 작년 9월 23일 미국에서 대리모를 통해 태어난 것이다. 처녀자리가 끝나고 천칭자리가 시작되는 날이다(포드는 처녀자리다. 그리고 27년간 그의 파트너였던 은퇴한 패션 저널리스트 리처드 버클리(65세)도 천칭자리다).

    산후조리사 없이 포드는 잭이 태어나자마자 3개월간 육아휴직을 했고, 아기방에서 잭과 함께 잤다. 그와 리처드는 일주일 내내 돌아가며 3시간마다 한 번씩 우유를 먹였다. 그들은 매일 밤 동화책을 읽어줬다. 포드는 기저귀를 갈았고, 지금도 갈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아이 때문에 꽤 까다로운 새로운 스케줄이 생겼어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포드는 몇 시간만 자도 끄떡없는 사람이다(그의 기준에서는 4~5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는 새벽 4시 30분에서 5시 사이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아이스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7시에 잭을 깨울 준비를 한다. “잭은 아주 잘 자요. 분유를 타고 나서, 아이를 아래층으로 데리고 내려와 아침으로 오트밀을 먹입니다. 아침에 아이와 2시간을 보낸 다음 회사에 출근해 오후 6시를 넘기지 않고 퇴근합니다. 목욕 시간에 맞춰 집에 가기 위해서죠.” 그 자신이 아닌, 잭의 목욕 시간 말이다. “맞아요. 저는 지금도 하루 종일 목욕을 합니다. 그건 일종의 명상 같은 거예요. 저는 하루에 3번 목욕을 합니다. 누군가가 그 얘기를 꺼낼 때마다 숫자가 점점 느는 것 같아요.”

    아빠 역할은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는 포드의 성향이 조금 누그러져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절대 건물 공용 현관에 부가부 유모차를 세워놓는 그런 부모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지금 그곳엔 우리 유모차가 서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더럽고, 잭이 가지고 노는 플라스틱 장난감 들이 가득하고, 뒤쪽 바구니에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유모차. 그런 게 인생이죠. 상관없어요.” 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분명 움찔했을 것이다.

    그는 일곱 살 때 디테일에 본능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걸 기억한다. 당시 그는 어머니가 운전하는 에메랄드 그린 컬러 머큐리 쿠거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새 신발을 신었는데, 발가락 부분의 결함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저는 모든 것에 아주 강박적이었어요. 그런 성향은 타고나는 것입니다. 분명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건 아니었어요. 어머니께 당신 방을 깨끗이 유지하는 방법을 가르치려 하던 기억이 납니다. 제 아들이 어떤 아이가 될지 궁금해 죽겠어요. 분명 자신만의 개성이 있을 거예요. 방을 청소하는 문제라면 아직 멀었습니다. 이제 간신히 기는 걸요.”

    지금 포드의 삶은 안정되고 있다. 100% 그런 건 아니지만. 그의 삶에서 무언가 만들고 고치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그것이 매장이 아닐 때는 집이다. 현재 리젠트 파크에 있는 그의 런던 집은 마무리 공사까지 1년이 남았다. 그래서 그의 가족은 사우스 켄싱턴에 있는 아파트를 빌려 생활하고 있다. LA에도 집이 있고, 산타페에는 목장이 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런던에 있는 집이야말로 진짜 집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영국에서 학교에 다닐 것이다.

    “저는 이곳 사람들이 정말 좋아요. 그들의 유머, 매너, 불손함, 엉뚱함, 패션에 대한 대담무쌍함 등등. 스타일과 관련해서 이곳 사람들은 모험을 즐깁니다. 남자든 여자든 말이죠. 이곳엔 그런 문화가 있어요. 남자들은 이탈리아와 런던을 제외하면 더 이상 패션을 입지 않습니다. 미국인들은 그것을 잃어버렸어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편안함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는 자신의 남성복 패션쇼를 밀라노에서 런던으로 옮겨와서 연다. 그리고 지난 9월 자신의 두 번째 여성복 쇼도 이곳에서 열었다(그는 파리와 뉴욕 쇼를 그만두고 영국의 수도에서 쇼를 선보이도록 스텔라 맥카트니, 피비 파일로, 그리고 빅토리아 베컴을 결집하고 있다. 사실 그런 설득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다).

    감독과 프로듀서 데뷔작 <싱글맨(A Single Man)>의 성공에 힘입어 포드는 더 많은 영화를 만들길 희망하고 있다. 그리고 ‘행복할 정도로 자주’ 그런 제안을 받고 있다. 그는 엄선된 대본 두 편을 갖고 있고, 2년 전 여름엔 시나리오 한 편을 직접 쓰기도 했다. “이제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너무 바쁘니까요. 하지만 진짜 이유는 제가 충분히 열정을 느낄 만한 제대로 된 프로젝트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들 때문이기도 하고요. 아들에게 필요한, 그가 당연히 누려야 할 시간을 내야 하니까요.”

    잭에 관한 한 포드는 맹렬한 보호자이자, 사생활 지킴이다. 그는 실제로 이번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가정생활을 제외하길 원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자부심 가득한 아빠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들을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번진다. “제가 다른 사람이 제 아이를 돌보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깨닫지 못했어요. 지금의 훌륭한 보모를 찾기 전에 다른 보모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그들과 남겨두고 나가는 게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다른 방에서 그들이 제 아이에게 뭔가 얘기하는 것도 듣기 싫었습니다. 그냥 참을 수가 없었어요. 지금은 사람들이 어떻게 전업 부모가 될 수 있는지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그전에는 절대 이해하지 못했어요. 리처드가 잭과 집에 있기 때문에 전업 부모가 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둘은 수영 교실을 비롯해 모든 곳에 함께 갑니다. 제가 그런 것을 할 수 없어서 미칠 것 같아요. 그런 변화들이 제겐 큰 놀라움이었어요.”

    물론 버클리와 포드가 모든 걸 둘이서만 관리하는 건 아니다. “우리에겐 아주 좋은 팀이 있어요. 맞아요. 요리사들과 가사 도우미들, 운전기사들, 그리고 ‘사람들’이 있습니다. 버릇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사람들을 관리하면서 제게 필요한 것들의 리스트와 제가 취하는 동작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달해줘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부자들의 재수 없는 면이지요. 저는 아주 운이 좋아요. 그건 틀림없어요”라고 그는 덧붙였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하지만 가끔 뉴욕의 세인트 마크스 플레이스에 있는 원룸아파트에서 리처드와 단둘이 살던 시절이 그리워요.” 나는 그의 말을 믿는다. “하지만 저는 이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이걸 창조했지요.” 그 말과 함께 오후 6시가 가까워졌다. 목욕 시간이 손짓하고 있다

      에디터
      사라 해리스
      포토그래퍼
      솔브 선즈보
      기타
      Courtesy Photos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