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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의 온기, 루시드 폴

2016.03.17

by VOGUE

    음유시인의 온기, 루시드 폴

    ‘음유시인’. 이보다 더 이 음악가를 더 잘 수식하는 표현이 있을까? 시대의 음유시인, 루시드 폴이 새 앨범을 냈다. 여섯 번째 정규 앨범. 음악은 따스했다. 포근했다. 그리고 편안했다.

    의상 / 휴고 보스, 커스텀멜로우, 에르메네질도 제냐 by 세원 I.T.C

    항상 루시드 폴의 앨범은 겨울의 끝자락, 혹은 시작점에 나왔다. 루시드 폴의 음악은 그래서인지 아주 견고하게 겨울을 연상시킨다. 털실로 성기게 엮었거나, 혹은 단단한 가죽으로 여몄거나, 얼마간 따스한 장갑으로부터 연상하는 겨울이 누구에게나 아주 오랜 기억의 습관인 것처럼. 가을, 루시드 폴의 새 앨범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곧 들이닥칠 겨울을 직감했다. 그리고 10월 말 발매된 6집 <꽃은 말이 없다.>의 첫 곡, 첫 마디를 들었을 때 이내 겨울이 밀려들었다. 음악은 겨울을 묘사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연상시켰다. 세 마리 강아지 덕분에 견딜 수 있는 가장 추운 겨울밤, 루시드 폴의 음악은 다시금 따뜻했다. 소리가 가득한 작은 공간은 루시드 폴이라는 부드러운 향과 포근한 앰비언스로 가득 차올랐다. 보드라운 털로 뒤덮인 강아지의 38℃ 체온처럼 따스한 온기를 지닌 겨울 음유시인, 루시드 폴을 만났다. 그는 앨범을 갓 발매하고, 11월 6일부터 17일까지 올림픽공원 K-아트홀의 커다란 통창 앞에서 하는 콘서트를 준비하느라 겨울 가지처럼 수척해져 있었다.

    2년 주기로 겨울쯤에 앨범을 낸다.

    2년에 한 번씩 농사를 짓는 것이라고 할까? 곡을 쓰는 것은 사실 ‘수확’일 뿐이다. 2년 내내 부지런히 마음속에 씨도 뿌리고 거름도 주고 물도 대면서 살아야 한다. 이번엔 <무국적 요리>를 탈고하고 문득 올가을에 앨범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또 비슷한 계절이 됐다.

    <무국적 요리>는 첫 소설이었다. 글로 인해 음악에 영향이 있었나?

    <무국적 요리>를 탈고 할 때쯤 골치 아픈 일도 많았고, 내적으로도 고민이 많았다. 나는 어떤 음악을 하는 사람인가? 노래라는 것은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내 음악은 얼마나 음악적인가, 혹은 문학적인가? 혹시 내 노래는 음악과 문학의 교집합은커녕 여집합밖에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예술적 성취도가 어느 쪽도 그리 높지 않다면 글만 써야 하나, 아니면 연주 음악만 해야 하나….

    음악가로서의 사춘기 같은 거였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여전히 그 고민이 시원하게 마무리되지는 않았다. 예술적 성취에 대한 무의미한 동경, 자기부정 같은 감정들이 혼재해 있었는데, 다만 4월에 한 달 가까이 장기 공연을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그 부정적인 뉘앙스의 감정들이 풀어졌다. 이미 고전음악에서 음악은 완성되었는데 현대음악은 왜 존재하나?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이미 예술적으로 높은 성취를 이룬 작품들이 수두룩한데 왜 창작을해? 현대음악의 가치가 뭔지, 대중 예술의 존재 당위가 뭔지, 알아야 할까? 원론적인 고민이 단순하게 봉합됐다. 노래를 한다. 노래를 만든다. 사람들에게 들려준다. 내가 나를 위해 노래를 한다. 이 단순한 문장들에 있어 어떤 고결한 의미나 예술적 성취가 과연 중요할까? 반문해봤다. 내가 생각하는 시가 있다면, 그것은 대문호의 시일 수도 있지만, 엄마가 반찬을 택배로 보내주실 때 붙여놓은 포스트잇의 짧은 단어들일 수도 있다는 각성이 있었다. 나는 내가 선 자리에서 노래라는 틀을 벗어나려 했던 것이었는데 노래는 프레임이나 한계가 아니었다. 노래 안에서 내 능력이 닿는 한 뭔가를 구현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음악가로서의 만족도와 생활인으로서의 삶 사이에 관련성이 있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만일 내 기대치에 충족되지 않는 음악만 해야 한다면 인생이 아주 어두워질 것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살 자신도 없고.

    그런 고민을 친한 음악가들과 나누기도 하나? 유희열, 정재형, 이적, 김동률 등.

    다른 이들과는 일상적인 대화만 하게 되는데 유독 동률과는 음악적인 고민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서너 시간씩 통화하기도 한다. 동률과의 통화는 환기, 치유, 자극같이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음악적인 결과물도, 취향도 아주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남들에게 얘기하기 어려운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항상 그렇지만, 이번 앨범도 역시나 첫 곡을 쓰기까지가 참 힘들었는데 동률과 길게 통화한 후 뭔가가 시원하게 풀렸는지 곡이 써지기 시작했다. 그 곡이 ‘검은 개’였다.

    곡을 쓰던 때가 여름이었다. 어떤 환경에서 곡을 썼나?

    집이 북촌의 한옥이다. 밤 10시쯤 되면 문을 열어두고 모기향을 피운 채 마루에 앉는다. 와인, 맥주, 고소리술, 진도 홍주…, 좋아하든 싫어하든 뭐든 손에 닿는 술을 옆에 두고 홀짝이면서, 흥얼거리며 나일론 기타를 치며 A4 용지에 곡을 썼다. 연필로도, 볼펜으로도 쓰지만 어두운 불빛에는 볼펜이 잘 보이니까 볼펜으로 썼다. 원래 곡 쓰는 스타일이 그런데, 가사와 멜로디가 유연하게 서로 배려하면서 동시에 자리 잡았다. 매일 새벽 3~4시까지 그렇게 곡을 썼다. 빠르면 2~3일, 좀 오래 걸리면 일주일 만에 한 곡씩 써나갈 수 있었다. 쉽게 쓰인 곡도 없었지만, 무지무지 괴로울 정도로 어렵게 써낸 곡도 없다. 10곡이 써졌을 때 모든 곡이 다 마음에 들었다. 바로 악보에 옮기고 녹음실로 갔다.

    녹음도 순조로웠나?

    정말 그랬다. 계획한 기한 내에 앨범을 완성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시작했는데, 모든 과정이 물 흘러가듯이 매끄러웠다. 넋 놓고 있어도 저절로 된 것은 아니지만, 뭔가를 억지로 끼워 맞추거나 안 되는 걸 되게 해야 할 일이 전혀 없었다. 기타로 다른 사운드를 내고 싶어 바리톤 기타, 8현 기타, 집시 기타 등 다양한 기타를 사용했다. 처음 연주해보는 기타의 소리를 녹음실에서 제대로 잡을 수 있을까, 의도한 대로 소리를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많았는데, 실행했을 때 거의 원한 바대로 나왔다. 감탄했다. 모든 게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가고 있구나!

    지나고 보니 순조로웠지만, 사실은 그만큼 집중했고, 성의를 다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여지가 없었던 게 아닐까?

    이전에는 앨범을 만드는 과정에서, 4집도 그랬고 5집도 그랬고, 데모를 만들어서 들고 다니면서 친구들에게 들려주곤 했었다. ‘나 이 정도 했어!’ ‘좋다고 얘기해줘’라는 의중이었다. 뽐내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이번 앨범은 뽐내고 싶다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만큼 집중했던 것 같다. 집에서 밤마다 곡을 쓰고, 녹음할 때는 아무도 놀러 오지 못하게 하고 집중해서 녹음만 했다.

    이번 앨범도 참 좋다. 아니, 이전 앨범보다 더 좋다고 말해도 될까? 틀어놓으면 편하게 술술 어간다. 집중해서 들으면 또 그 서정적인 존재감이 확 다가오기도 하고.

    아웃사이더 기질이 많아서인지, 남들이 하는 존재감 강한 음악 대신 있는 듯 없는 듯한 음악으로 앨범을 채우고 싶었다. 작년에 글을 쓸 때부터 그런 편한 존재감의 음악들을 많이 들었다. 물론 글을 쓸 때는 글에 집중하게 되니까 음악이 잘 들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음악은 내 귀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 마치 놓아둔 방향제 향이 방 안에 가득 차는 것처럼, 공간의 앰비언스를 채우는 음악을 하고 싶었다.

    앨범의 제목이 <꽃은 말이 없다.>다. 앨범 제목에 흔치 않게 마침표가 찍혀 있다.

    곡 제목에도 마침표가 있으니까, 앨범 제목에도 똑같이 마침표가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쓴 곡 중 종결어미로 끝나는 제목을 가진 곡이 2집 <오, 사랑>의 ‘사람들은 즐겁다.’가 유일했다. 그때도 마침표는 꼭 찍었다. 이번에도 그냥 찍어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 곡인 ‘꽃은 말이 없다.’가 앨범 제목이 된 것도 왠지 ‘꽃은 말이 없다.’가 앨범 제목이 될 것 같다는 마음이 계속 들었기 때문이다. 연주 음악만 하는 밴드를 만들어볼까 하던 때 생각해둔 팀 이름이 서너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Flowers Never Say.’였다.

    꽃은 왜 말이 없나?

    말은 사람의 것이니까.

    ‘나는 이러한 노래를 하겠다’는 각오를 담은 ‘바람 같은 노래를’에 이어지는 ‘꽃은 말이 없다.’에 가사가 비장하게 나올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와 달리 연주곡이었다.

    작곡할 때 ‘바람 같은 노래를’과 ‘꽃은 말이 없다.’ 두 곡은 연주곡 형태로 쓰여졌다. 그런데 ‘바람 같은 노래를’은 멜로디와 가사가 함께 있어야 ‘왠지’ 더 좋아질 것 같은 곡이고, ‘꽃은 말이 없다.’는 ‘왠지’ 가사가 없어야 더 좋을 것 같았다.

    자신의 앨범 외에, 영화나 드라마 OST 작업에는 흥미가 없나?

    나라는 사람이 원체 드라마나 영화를 그리 즐겨 보는 편이 아니라서일까? 하지만 좋아할 만한 작품이 있다면 참 재미있는 일이 되리라 생각하고는 있다. 2년 전에 그런 제안이 있었지만, 정규 앨범 일정과 겹쳐서 고사했다.

    인터뷰 때마다 나오는 질문이고 앞으로도 쭉 나올 질문이지만, 최종 학력이 로잔 연방 공과 학원 생명공학 박사다. 음악만큼이나 공부도 좋아했기에 이룰 수 있었던 결과일 것이다. 미련은 없나?

    분명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방법을 찾고 고민하고 실험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입증하는 일련의 과정을 즐겼다. 하지만 그 목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긴 후엔 미련이 사라졌다. 내가 하던 일이 동물실험을 빼놓고 진행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특히나 더.

    같이 사는 강아지, 보현이는 잘 지내나?

    얼마 전 집에 친구들을 불러 바비큐 파티를 할 때 옆에서 뭘 먹었는지 배탈이 좀 나서 걱정했는데, 이젠 괜찮다.

    포토그래퍼
    CHA HYE KYUNG
    스탭
    글 / 이해림(프리랜스 기자), 스타일리스트 / 김하늘, 헤어 / 조판수, 메이크업 / 박연숙
    기타
    강아지 모델 / 보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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