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도시의 창고 활용 백서

낡고 허름한 창고가 새로운 패션과 문화의 성지가 됐다. 뉴욕과 런던은 물론, 서울과 부산까지 창고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패션 도시의 창고 활용 백서.



New York
허드슨 강변을 따라 자리한 부둣가 창고는 웬만해서는 갈 일이 없는 맨해튼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패션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 부둣가를 자주 오간다. 스티븐 마이젤이 거의 모든 화보를 찍는 스튜디오부터 알렉산더 왕이 매 시즌 쇼를 선보이는 창고도 허드슨 강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프로엔자 스쿨러와 필립 림도 거대한 트럭이 오가는 창고에서 쇼를 열곤 했다. 하지만 뉴욕 창고의 신분 상승은 이번 시즌 오프닝 세레모니의 듀오, 캐롤 림과 움베르토 레온에 의해 완성됐다. 뉴욕 패션 위크 기간 동안 첼시 끝자락에 자리한 부둣가를 ‘Opening Ceremony by the Water’라는 팝업 숍으로 변신시킨 것. OC와 함께한 DKNY의 협업 제품을 판매하는 컨테이너, 네일 숍 컨테이너, 에스티 로더 컨테이너 등 패션과 뷰티, 그리고 케이터링 컨테이너들로 가득한 거대한 야외 팝업 쇼핑몰. 여기에 슈퍼카 20대를 동원해 패션쇼까지 열었으니 1,000명이 넘는 관객들이 환호할 수밖에!



London
런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갤러리를 꼽는다면, 어떤 이름이 등장할까? 테이트 모던, 사치 갤러리, 화이트채플, 와핑 프로젝트 등이 언급될 만하다. 여기에 새로운 이름이 추가됐다. 찰스 사치에 버금가는 현대미술 컬렉터인 프랭크 코헨이 올 4월 오픈한 ‘데어리 아트 센터(Dairy Art Centre)’가 바로 그곳. 우유 회사의 배달 창고로 쓰이던 곳이 이제 가장 근사한 현대미술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변신한 것이다. 게다가 수백 억을 호가하는 현대미술 작품들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모든 입장료는 무료. 벽지 장수에서 영국 최고 컬렉가 된 프랭크 코헨 덕분에 일반인들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공짜로 즐길 수 있다. 우유 창고에서 만나는 어스 피셔와 아이웨이웨이, 신디셔먼은 상상만으로도 즐겁지 않나!



Paris
파리 패션 위크를 찾는 관객들에게는 ‘지옥(Hell)’이라 불리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오스테를리츠 역 근처에 자리한 ‘라 알프레시네(La Halle Freyssinet)’. 1927년 유진 프레시네가 디자인한 이 아르데코 빌딩의 원래 기능은 기차 차고. 하지만 이제는 대규모 패션쇼가 열리는 곳으로 더 익숙하다. 장 폴 고티에의 마지막 에르메스 쇼에서 마장마술을 선보이는 기수들이 단체로 등장한 곳도, 랑방에서의 10주년을 축하한 알버 엘바즈를 위한 파티가 열린 곳도 바로 여기. 이번 시즌에도 불타는 자동차들이 등장한 지방시 쇼, 금빛 찬란한 드리스 반 노튼 쇼가 이 거대한 공간 속에서 열렸다. 그렇다면 이렇게 드라마틱한 쇼가 펼쳐지는 곳을 왜 ‘헬’로 부르냐고? 파리 중심가에서 뚝 떨어진 위치 때문에 지옥 같은 교통 체증이 빚어지면, 꼼짝없이 차 안에서 1시간 넘게 갇혀 있어야 하기 때문.



Seoul
지난 9월 말 저녁 성수동의 한 골목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멋쟁이들로 득실거렸다. 버버리가 트렌치코트를 입은 서울 멋쟁이들을 렌즈에 담아 그 사진들을 전시하는 ‘아트 오브 더 트렌치’ 전시와 파티를 성수동의 대림창고에서 연 것. 낡은 창고 근처를 지나던 행인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했겠지만, 이 근처에서 이런 풍경은 익숙한 일이 된 지 오래다. 버버리 행사 전후로 디자이너 이상현의 플랙 진 컬렉션, 코오롱 스포츠, 반스 등의 이벤트들이 모두 대림 창고에서 열렸기 때문. 심지어 샤넬은 이곳을 스코틀랜드의 고성 창고로 변신시켜 비밀스러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기도 했다. 물류 창고로 쓰이던 곳은 이제 ‘세련되게 낡은’이란 모순적인 느낌을 찾는 이들에게 1순위 로케이션 장소로 떠올랐다.



Busan
부산의 패션과 문화를 담았던 <보그> 7월호 취재를 위해 만난 ‘고 사우스’와 ‘안티도트’의 서장현 대표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부산의 구도심인 중앙동 부둣가에 있는 오래된 창고를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라는 것. 부산항을 마주하고 있는 이곳은 70여 년이 넘도록 쌀과 제지 창고로 사용되던 창고. ‘비욘드 가라지(Beyond Garage)’라 이름 붙은 이곳은 지난 8월 중순, 호주 밴드 ‘셋 세일(Set Sail)’의 공연을 포함한 파티로 문을 열었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이곳만을 위한 사운드 시스템인 ‘로얄 플래시 사운드 시스템’을 소개하는 파티와 캐나다 구스의 팝업 숍이 이곳에서 열렸다. 또 11월 초에는 반스가 펑크 라벨인 유니온웨이와 함께 파티를 열었다. 서장현 대표가 바라던 모습도 그것이다. “부산에도 흥미로운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지금 부산에서 가장 뜨거운 곳은 바로 이 낡은 벽돌 창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