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에 돌아온 스테파노 필라티

스테파노 필라티가 돌아왔다. 남성복 제냐에 이은 그의 아뇨나 데뷔 컬렉션은 패션계 기준으로 볼 때 꽤 조용했다. 그러나 옷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줬다.



패션에서 볼륨 문제는 대부분의 시도들과 연관이 있다. 그것은 스케일뿐 아니라 소리를 의미하는 단어다. 예를 들어 아뇨나(Agnona)의 경우를 보자. 이 브랜드는 반세기 이상 세련된 더블 페이스 캐시미어와 동의어로 여겨지던 이태리 부르주아 회사다. 2012년 아뇨나와 제냐는 9개월 전 이브 생로랑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떠난 스테파노 필라티(Stefano Pilati)를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했다. 그 후 아뇨나와 관련해 어떤 얘기도 없었다. 지난 10월 필라티의 임기 중 첫 성과물들이 대대적인 광고나 눈부신 셀러브리티들 없이 매장에 등장했다. 엉덩이를 죽이지 않으면서도 상체가 길어 보이는, 아주 살짝 들어간 웨이스트 밴드를 묶고 앞 주름 없는 날씬한 팬츠, 옆모습이 가늘어 보일 정도로만 몸에서 살짝 뜬 은근한 A라인 스커트들, 그리고 브레이슬릿 슬리브(팔찌가 보일 정도 길이의 소매), 물결 모양의 숄 칼라, 부드럽고 둥근 어깨로 변형된, 남성복에서 영감을 얻은 온갖 재킷들과 코트들(리퍼, 봄버, 크롬비, 블레이저) 등등. 색상은 라즈베리, 머스터드, 카키, 네이비 등 다양하다. 그리고 하와이 깅엄으로도 알려진 큼직한 체크 팔라카도 있었다. 니트는 무게와 마무리 면에서 모든 여성들이 볼로냐의 세련된 여성복 매장에서 구입하고 싶어 할 법한 브이넥과카디건을 닮았다. 구두와 가방도 있다. 둘 다 아뇨나에선 처음 선보이는 아이템이다. 멋진 구두들은 고급스럽게 미니멀했다. 실제로 신고 걷기에 적당한 뾰족한 진홍색 웨지, 이태리의 여름날 신고 뛰어다닐 수 있는 캐멀색 슬라이드. 간단히 말해 런웨이를 걷기 위한 것이 아닌 실제로 신기에 아주 훌륭한 컬렉션이다. 떠들썩한 여성복 패션계에서 필라티의 아뇨나는 볼륨을 줄이기로 했다. “저는 쇼보다 옷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습니다”라고 필라티는 말한다.

프리다 구스타프슨이 입은 블라우스와 체크 팬츠, 민소매 트렌치, 스카프, 가죽 부티와 토트백, 그리고 주얼리는 모두 스테파노 필라티의 아뇨나 #0(Agnona #0) 컬렉션.

이런 접근 방식은 필라티에게 새로운 것이다. YSL에서 디렉터로 보낸 10년(정확히 말하면 2000년에 YSL에 합류해 톰 포드 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동안, 그는 가장 고무적이고 논쟁적인 캣워크 쇼들을 선보였다. 2004년에 선보인 그의 첫 리브 고쉬 컬렉션은 튤립 스커트, 벨티드 웨이스트, 그리고 플랫폼 힐을 다시 여자들의 옷장에 들여놓게 했다. 2007년에는 엄격한 테일러드 재킷에서 소매를 떼어냈고, 안에 입는 옷으로 스웨트 셔츠를 첨가했으며, 모든 가격대의 수트 소재들을 사용함으로써 수트의 개념을 바꿔놓았다. 2012년 3월, YSL 하우스를 위한 그의 마지막 쇼는 페티시적인 특징들이 가득했다(백합, 체인 메일, 가죽, 고무 등등). 그 쇼는 모든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레퍼런스들 사이에서 조용한 우아함을 성취해냈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놀라웠다. “저는 그 마지막 컬렉션이 마음에 들었어요. 제겐 위대한 순간이었죠. 단 1초도 슬프거나 후회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런 뒤 필라티는 베를린으로 떠났다. “베를린 이외에 다른 곳에 있는 저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필라티는 샤를로텐부르크에 있는 1840년대 건물에서 살고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시크하다고 여겨지는 곳이지요.” 그리고 아뇨나와 제냐의 피팅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밀라노를 방문한다. 그는 ‘파리의 변치 않는 아름다움’이 그립다고 말하지만, 그곳의 패션계는 그립지 않다. 파리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기로 한 결심은 아뇨나를 위한 그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는 계절, 유행, 지역과 무관한 개념들을 다듬고 확립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목표들은 현재 패션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화로운 혁명의 핵심이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좀더 수명이 긴 의상들(트렌드라는 겉치레 없이 본질적으로 럭셔리한 아이템들)을 원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베이식한 아이템이 아니라 실제로 좀더 나은 옷들이다. 자신의 스타일을 향상시켜줄 그런 옷 말이다. 필라티에게 그것은 이태리적인 동시에 자신만의 개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태리는 지원을 받아야 해요.” 그는 예전에 한 번도 갖지 못했던 자부심을 지닌 채 작업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름은 지극히 평범하게 들리지만 아뇨나는 바로 저 같은 캐릭터의 여성을 의미합니다. 태도는 반순응적이지만 여전히 아주 시크하죠.” 다시 말해 당신만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그런 옷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