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아침을 맞이한 남자 모델들 2

춤추고 노래하는 아이돌 스타가 열광의 대상이라면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신비로운 존재감을 주는 남자 모델은 선망의 대상이다. 김원중, 윤진욱, 박형섭, 김태환은 그 중에서도 특별하다. 젊음이라는 인생의 가장 찬란한 아침을 맞이한 그들과 2014년의 시작을 함께했다.

꼬임 디테일의 실팔찌는 모리(Moree), 바닥에 놓인 가죽 슬리퍼는 파르팔라(Farfalla at Unipair).

실팔찌들은 모리(Moree), 허리에 두른 타월은 에이트리움(Atrivm).



아이보리색 터틀넥 니트는 비슬로우(Beslow), 트렁크는 갭(Gap), 클래식한 악어가죽 스트랩의 핑크 골드 케이스 시계는 피아제(Piaget) ‘알티플라노’, 실팔찌들은 모리(Moree).

별에서 온 남자
Kim Won Joong

김원중의 팬들은 그를 모델왕 ‘킹원중’이라고 부른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 만들어내는 개구쟁이 같은 이미지, 짐 캐리처럼 변화무쌍한 표정,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움직임. 2009년 10월, 느닷없이 나타난 그는 곱상하거나 남자답게 잘생긴 기존 모델들과는 은하계만큼이나 거리가 멀었다. 외계인에 홀리듯 이 신선한 모델의 매력에 빠져든 사람들은 그의 외모를 설명할 적당한 단어를 한참 찾다 결국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잘생기진 않았다.” 김원중이 가장 자주 들어온 말이다.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모델처럼 생겼다기보단 그냥 ‘생겼다.’ 흐흐.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죠.” 아메리칸 어패럴 매장에서 일하다 우연히 캐스팅되었을 때만 해도, 모델이 되길 결심한 이유는 딱 하나. 그토록 좋아하는 옷을, 더구나 비싸고 좋은 옷을 매일 공짜로 실컷 입어볼 수 있다는 유혹 때문이었다.
“모델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어요. 디스퀘어드2 진에 흰 티 입고 멋진 오토바이만 타면 짱인 줄 아는 그런 허황된 모습이 싫었거든요. 돈도 별로 못 벌면서 이걸 왜 하나 싶었죠.” 프라다 쇼에 선 최초의 동양인 모델이자 모두가 찾는 패션 아이콘이 된 지금의 김원중은?

아침에 입고 나온 유니클로 청바지와 티셔츠를 훌훌 벗어 던진 그는 팬티 바람으로 스태프들이 가득 찬 방 안을 활보 중이다. 허세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꺼릴 것도 없다. “노출이요? 남들만 상관없으면 전 괜찮아요. 제 몸이 그렇게 근육질은 아니잖아요. 문신도 있고. 흐흐.” 등에 새긴 작은 십자가 외에 양팔을 장식한 알록달록한 문신은 3개월 전 새로 한 것이다. 오른팔 문신은 턱을 괸 채 엎드린 어린 시절의 김원중이다. 주근깨 꼬마 원중의 배에도 그와 마찬가지로 흉터가 있다. “어릴 때 장이 꼬여서 죽을 뻔했대요. 얼마 못 산다고 다들 포기했는데, 엄마가 절 살려줬다고요. 그때 꿰맨 자국이에요.” 있는 그대로 잡지에 싣고 싶다고 하자 그는 오히려 더 좋아했다. “잡지 촬영을 하면 항상 리터칭으로 없애더라고요. 독자들에게 약간 혐오감을 줄 수도 있어 지우나 보다 생각은 하는데, 어떻게 보면 제겐 자랑스러운 흉터거든요. 엄마가 날 살려준 흔적이니까.” 가족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그는 모델로 활동하며 얻은 첫 수입을 조부모님의 빨간 내복과 바꾼 살뜰한 손주이며, 의외로 보수적인 남자이고, 독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하다.

패션 디자이너라는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2011년부터 그는 87년생 또래 모델들과 함께 오피셜 온라인 숍 ‘87mm’를 운영하고 있다. 옷도 직접 디자인한다. ‘No Concept, But Good Sense’를 캐치프레이즈 삼아 온라인 쇼핑몰로 출발한 회사는 파리 쇼룸과 해외 매체에까지 소개될 만큼 성장했다. 얼마 전 신사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한 후로 직원도 많이 생겼다. “엄청 열심히 하고 있어요. 매일 출근도 하고요.” 디자인이나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그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돼주고 있는 고태용, 박승건 등 친한 디자이너들은 365일 쉬지 않고 일하는 김원중을 ‘미친놈’이라고 부른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서울의 젊음을 대표하는 디자이너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누구보다 바쁜 20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가 바로 답이다. 내 식대로의 멋과 유쾌한 열정과 호기심 충만한 스물 일곱. 지금 서울을 상징하는 얼굴이 궁금하다면, 김원중을 보라.


데님 팬츠는 아페쎄(A.P.C.), 가죽팔찌는 토스(Tous), 타이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러버 밴드 시계는 쇼파드(Chopard) ‘밀레밀리아’.

타월은 에르메스(Hermès), 실버 펜던트 목걸이는 크롬하츠(Chrome Hearts), 셰이빙 젤과 셰이빙 레이저 면도기는 아쿠아 디 파르마(Acqua di Parma).

플리스 소재 후드 집업과 팬츠는 아메리칸 어패럴(American Apparel), 선글라스는 레이밴(Ray Ban), 스니커즈는 반스(Vans).

건강한 이웃집 청년
Yoon Jin Wook

버스커 버스커의 뮤직비디오 ‘처음엔 사랑이란 게’는 남자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언덕 위에서 헤어졌다. 서로의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단편영화처럼 감성적인 스토리와 영상으로 화제가 된 이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은 김영광과 함께 우리나라 남자 모델들의 해외 진출 시대를 연 윤진욱이다. “용이 감독님 집에서 촬영했는데,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버스커 버스커의 노래를 좋아하기도 했고요.” 데뷔 10년 차임에도 윤진욱은 여전히 신입생처럼 풋풋한 느낌이다. 깎아놓은 밤톨처럼 귀엽고 동그랗다고 해서 팬들이 붙여준 별명도 ‘윤밤’. 2009년 랑방과 보테가 베네타의 S/S 컬렉션을 시작으로, 그해 갭의 인터내셔널 캠페인 모델과 독일판 표지모델로 등장하며 화제가 되었던 그는 요즘 모델 활동과 더불어 배우라는 새로운 직업에 도전 중이다. “패션 디자인 학교를 다니던 스무 살 때 피팅 모델을 해달라는 선배 부탁으로 모델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흘러온 것처럼, 연기도 그래요. 아무래도 모델이란 게 보여지는 직업이다 보니 그쪽으로 기회가 생기고, 막상 연기를 배워보니 재미가 붙은 거죠.” 어깨에 둘러멘 통통한 배낭 속에는 이달 촬영에 들어가는 단편영화 대본과 책, 혹시 더 추워질 때를 대비한 후드 집업이 들어 있다. 대본은 휴대폰 충전기, 칫솔과 함께 늘 가지고 다니는 소지품이다.

촬영을 위해 아무렇게나 후드 집업을 툭 걸쳐 입고 문 앞에 떨어진 신문을 줍는 그는 원래부터 이곳에 살고 있던 이웃집 총각처럼 자연스럽다. “직업이 모델일 뿐이지, 평소엔 그냥 일반인 윤진욱이에요. 지나치게 유행을 따라가거나 외양을 치장하는 덴 별로 관심이 없어요.” 일상은 화려한 모델의 삶과는 완전히 별개다. 매일 연기 수업을 받고, 운동을 하고, 일요일엔 축구를 한다. 요즘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연기와 축구. 최근 SNS에 올린 내용도 축구 팀 아이들 사진이며, 5주 후에나 배송이 완료될 루이스 레더의 라이더 재킷을 제외하면 새로 구입한 거라곤 축구용품뿐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모델 친구들과 함께 지난해 ‘퍼스트 유나이티드’라는 축구 팀을 만들었거든요. 민철이, 철웅이, 지운이 등이 함께 뛰고 있어요.” 마침 2014년엔 월드컵도 열린다. 축구 팀에서 윤진욱은 미드필더와 수비수, 그리고 회장직을 맡고 있다. 화보의 한 장면 같은 모델들의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시합이 있을 때마다 찾아오는 열정적인 팬들도 제법 된다. “고맙죠. 직접 편지나 선물을 전해주기 위해 경기장까지 오는 분들도 있어요.” 그를 롤모델 삼아 모델 일을 시작한 후배들에겐 해외 활동에 대한 세세한 조언까지 아끼지 않는 든든한 선배로, 베테랑 모델로 자리 잡은 그는 새로 시작하는 신인의 자세로 2014년을 준비하고 있다. “올 해엔 배역을 하나 맡아 정말 그 사람 같더라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처음 무대에 오를 때만큼 긴장되진 않아요. 나이를 먹은 만큼 설렘도 덜한 건 아쉽지만… 너무 많이 고민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아, 또 하나 있어요! 올해는 우리 축구 팀이 연예인 리그에 들어갔으면 좋겠네요.”


테리 소재 목욕 가운은 에르메스(Hermès), 핀스트라이프 파자마 팬츠는 엠포리오 아르마니 언더웨어(Emporio Armani Underwear), 팔찌들은 토스(Tous) .

두툼한 니트 카디건은 빈스(Vince), 브리프는 H&M, 머그잔은 팔콘(Falcon).



21세기 제임스 딘
Park Hyeong Seop
“키가 커서 좋은 점이요? 옷을 입을 때 기분이 좋죠. 쇼핑할 때도 별 고민 없이 그냥 사면 되니까.”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한 선을 가진 박형섭은 모델 활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팬카페가 있었을 만큼 트렌디한 얼굴이다. 트위터 팔로워 수만 해도 2만여 명이 넘는다. 함박눈이 쏟아지던 춥고 깜깜한 아침, 발목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패딩 점퍼에 추리닝과 운동화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잠이 덜 깬 상태로 팔굽혀펴기부터 시작했다. “스케줄 때문에 요즘 운동을 꾸준히 못해서 걱정이에요. 예전엔 완전 마른 체형이었거든요. 몸무게가 58kg이었어요. 오디션을 볼 때마다 떨어져 충격을 먹고, 1년 가까이 하루에 대여섯 끼를 먹으며 저녁마다 3~4시간씩 운동을 해서 10kg 가까이 찌운 거예요.” 2011 F/W 장광효 카루소 쇼에서 12cm의 하이힐을 신은 쇼킹한 모습으로 처음 우리 앞에 나타난 박형섭은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국내 대부분의 쇼를 섭렵했다. 유난히 작은 얼굴과 가늘고 긴 눈, 그 사이에서 도드라지는 코, 커다란 귀까지 특색이 뚜렷한 이목구비는 화보 속에서 더욱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카메라 밖에선 그저 수줍음 많고 귀여운 스물세 살.

“우리 집 남자들이 유난히 외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요. 사촌 형 둘이 헤어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어 영향을 받았죠.” 주변 연예인 친구들에게 자극을 받은 부분도 있다. 샤이니의 키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동네 친구다. “기범이는 가수 보아를 정말 좋아했어요. 모든 아이돌 춤을 다외우고 다녔죠.” 동방신기의 열렬한 팬이었던 중학생 형섭 역시 막연히 아이돌 스타를 꿈꾼 적도 있었다. 잡지에서 이수혁과 김영광 등 당시 활발히 활동하던 선배 모델들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대구에서 헤어 디자인을 공부하던 그는 모델이 되기 위해 학교를 휴학했다. 그리고 혼자 서울로 올라왔다. ”잘할 수 있다는 확신과 최고가 되겠다는 각오가 있었어요.” 몸을 만들고, 카메라를 한 대 사서 친구와 함께 서로를 촬영해주며 포즈를 연습하고, 잡지를 볼 땐 여성 모델들의 움직임까지 유심히 살폈다. “잘하는 분들이 많아요. 오랜 시간 활동한 선배들이 많아서 그런지 남자 모델들보다 몸이 많이 풀려 있어 공부가 돼요.” 요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해외 무대에 서기 위해서다. “인지도도 올라가고 내 나이엔 벌 수 없는 돈도 얻게 되면서 점점 더 이 일에 대해 신중해져요. 지금의 바람은 해외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는 거예요. 최선을 다해보려고요. 모델이란 직업은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룬 꿈이니까요.” 두 번째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지금, 그는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일을 즐기면서 자신의 20대를 카메라에 담고 싶다고 말했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짧은 순간에만 허락된 일이지만, 모델로서 이제 막 기지개를 켠 박형섭에겐 아직 끝나지 않은 아침과 긴 시간이 남아 있다.



코튼 파자마 팬츠는 로젠베리(rosenberry.co.kr), 목욕 가운은 까사미아(Casamia), 스니커즈는 반스(Vans).

페이즐리 패턴 파자마 팬츠는 로젠베리(rosenberry.co.kr).

꽃보다 아도니스
Kim Tae Hwan

그리스 신화 속 미소년 아도니스를 떠올리게 하는 모델 김태환은 첫 해외 무대에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4 S/S 컬렉션에서 그는 닐 바렛, 디젤의 밀라노 쇼에 캐스팅됐고, 파리에서는 드리스 반 노튼과 필립 림, 겐조, 존 갈리아노 등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지닌 이 스물두 살 동양인 모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세계 남자 모델 랭킹 1위인 션 오프리의 부커로부터 연락이 오기도 했다. 데뷔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을 때다. “운이 좋긴 했지만, 0.1%의 가능성이라도 잡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어요. 브랜드를 공부하는 건 기본이고, 머리도 좀 굴려봤죠. 한 번에 4~5명씩 캐스팅 오디션을 볼 때 동양인이 두 명 이상 같이 들어가면 불리하거든요. 그렇게 예쁜 몸이 아니라서 체형을 보완하는 스타일에도 신경을 썼고요.” 멋스러운 초록색 빈티지 코트에 독특한 부츠를 신고 우아한 걸음으로 들어선 깊고 큰 눈망울의 새하얀 청년은 연약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한때는 운동했냐는 말을 제법 듣던 씩씩한 태권 소년이었다. 태권도 관장인 아버지 덕분에 걸음마를 뗀 이후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태권도를 배웠다. “그땐 지금 같은 이미지가 아니었어요. 물론 싸움 같은 걸 해본 적은 없어요. 평화로운 시대에 학교를 다녀서요. 태권도를 그만두면서 체력이 많이 떨어져 최근 들어 다시 운동을 시작했어요.”

얼마 전 그는 <무한도전>의 밀라노 특집에 출연해 화보 촬영을 함께했다. 방송에 나간 후로 거리를 지날 때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꽤 생겼다. 정작 그는 <무한도전>은커녕 TV도 보지 않고, SNS 활동도 전혀 하지 않는다. 대신 음악을 듣는다. “한동안 힙합만 듣다가 요즘은 일렉트로닉 신스팝이나 테크노적인 것에 끌려요. 나름 작곡가의 꿈이 있어요. 컴퓨터로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모델 일을 하면서부터는 바빠져 장비를 사놓기만 하고 손도 못 대고 있어요.” 모델 일을 하기 전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디자인 역사를 공부하고 난 후부터는 신발 하나를 살 때도 생각이 더 많아졌다. “파리 컬렉션이 끝나고 몸살이 걸려 서른 시간 동안 누워만 있다가 기필코 짬을 내 이 부츠를 샀어요. 고딕풍이지만 코스프레 같지 않게 적당히 모던하죠. 라인이 예뻐 어디에나 잘 어울리고요.” 신발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디자인과 작곡 모두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는 일이다. 예술가적 기질을 지닌 그에게 모델이라는 직업은 더욱 특별하다. 자연인으로서의 나와는 또 다른 모델 김태환의 이미지를 쌓아가는 작업이다. 그는 게임을 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한 단계씩 클리어해가면서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즐긴다. “좀더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겠다 싶을 만큼 할수록 매력을 느껴요. 춤과 워킹을 비교해보면, 춤에는 정해진 안무가 있지만 워킹엔 아무것도 없잖아요. 습관을 버리고 절제해야 하는데, 연습보다 경험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 미묘한 분위기란 쉽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모델은 진짜 멋진 직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