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식 아이템의 매력

지금 당장 눈을 사로잡는 건 런웨이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쇼피스겠지만, 오래된 친구처럼 오래오래 곁에 두고 유용하게 입을 수 있는 건 베이식한 아이템이다. 요즘 디자이너들은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팬츠는 랑방(Lanvin), 더플 백, 바이커 재킷, 턱시도 재킷은 생로랑(Saint Laurent), 회색 스웨터와 재킷 안의 흰색 티셔츠는 조셉(Joseph), 니트 스커트는 N.21(at Raum), 검정 칼라 블라우스는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검정 펌프스는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옥스퍼드 슈즈는 처치스(Churchʼs at Koon with a View), 플랫 슈즈는 두시카(Dusica at Raum), 금색 목걸이는 코르넬리아 웹(Cornelia Webb at Raum).

첫째, 화이트 셔츠. 화이트 셔츠는 시간이 지나면 색이 변하기 쉬우니 가격 대비 질 좋은 것을 구비하는 게 좋다. 둘째, 트렌치코트. 물론 클래식한 버버리가 가장 좋겠지만, 요즘 트렌치코트 한 벌쯤 내놓지 않는 브랜드가 없으니 예산에 맞춰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 셋째, 발레 플랫 슈즈. 어떤 차림에도 무난하게 어울리는 검은색 하나, 그리고 조금 색다른 것-무늬가 있거나 색이 독특하거나 혹은 장식이 달린-으로 하나. 넷째, 데님 팬츠. 유행하는 스타일이 시시각각 변할뿐더러 몸매를 가장 형편없어 보이게 만드는 아이템이지만, 자신에게 딱 맞는 걸 발견하면 그렇게 자주 입는 바지도 없다. 다섯째, 캐시미어 스웨터. 포근하고 보드라운 스웨터보다 좋은 게 있을까? 여섯째, LBD. 그 실용성과 아름다움에 대해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겠다. 일곱째, 블랙 펌프스. 아무리 허름한 옷차림에도 늘씬하게 빠진 펌프스나 스틸레토 한 켤레면 금세 ‘쌔끈’한 룩이 된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 여덟째, 검정 블레이저. 검정 펌프스와 마찬가지로, 물 빠진 청바지와 늘어진 티셔츠를 업그레이드해주는 구원투수다. 아홉째, 탱크톱. 요즘은 목이 늘어진 T by 알렉산더 왕 스타일의 반팔 티셔츠로 대체되는 추세. 열 번째는 턱시도 팬츠. 발목 길이 시가렛 팬츠가 훨씬 대중적이긴 하지만(나도 대학 시절에 산 까슬까슬한 소재의 블랙 시가렛 팬츠를 10년째 입는 중), 에디 슬리먼이 생로랑 데뷔 컬렉션에 부활시킨 르 스모킹 덕분에 좁고 길게 빠진 턱시도 팬츠의 미학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짐작한 대로 이상은 프랑스 <보그>에서 꼽은 10개의 워드로브 에센셜. 모든 여자들이 옷장에 꼭 갖춰야 할 기본 아이템으로 구성된 이 리스트는 몇 년 전 프렌치 아이콘이 한창 유행할 때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것이다. 그리고 요즘 가장 잘나가는 젊은 디자이너들은 과거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강박적으로 추구한, 혁신적이다 못해 기괴한 디자인보다 바로 이 클래식한 ‘기본’ 아이템의 가치에 눈을 돌리고 있다. 바야흐로 ‘클래식&베이식’ 시대가 도래했다!

본격적인 물꼬를 튼 것은 미스터 왕. 2007년 알렉산더 왕이 뉴욕 패션 신에 등장했을 때, 패션계 전문가 그 누구도 그가 지금의 자리-발렌시아가의 촉망받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오르리란 걸 상상하지 못했다. 사실상 그의 초기 컬렉션은 소호 거리 여자들이 입고 있는 옷들을 조금 쿨한 방식으로 매치한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동시대 여성들(바로 그 소호 걸들, 그리고 그들의 워너비 그룹)은 바로 그 점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 그는 순식간에 다운타운 스타일의 제왕으로 추앙되며 패션계 거물로 쑥쑥 성장했다. 비결은 놀라울 정도로 간단명료하다.

“저는 완벽한 핏과 완벽한 소재로 만든, 가장 베이식한 아이템들을 좋아하죠.” 편안한 실루엣, 스포티한 디테일, 무채색, 가죽 재킷과 저지 티셔츠, 면 소재 트레이닝 팬츠와 니트. 이 베이식 아이템들은 ‘T by 알렉산더 왕’ 라벨을 달고 가장 높은 매출을 기록하는 브랜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최근 #4까지 추가된 새로운 라인 ‘오브제 컬렉션’은 “매일의 일상에 적합한 개인적 물품의 배치”라는 설명처럼, 왕이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 버전의 에센셜 아이템이다. 재떨이, 자전거 체인, 정리함, 요가 매트, 가죽 슬리퍼, 컵 받침, 노트 등은 질리지 않고 오래 쓸 수 있도록 검정 가죽(혹은 대리석이나 유리, 가오리 가죽)의 간결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지난 5월에 등장한 생로랑의 퍼머넌트 컬렉션 또한 에센셜의 진수, 에센셜의 교과서를 보여주면서 유명 셀러브리티의 파파라치 컷에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구글 창에 생로랑 모터사이클 재킷을 검색해볼 것!). 연중 어느 때나 구입 가능한 이 캡슐 컬렉션은 아브 뉘 몽테뉴의 생로랑 플래그십 스토어 리뉴얼 오픈을 기념하기 위해 탄생한 것으로, 생로랑의 DNA와 슬리먼표 디자인의 정수를 완벽하게 압축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새틴 숄 라펠이 달린 울 소재 르 스모킹 재킷, 레오파드 프린트 코트, 두루 매치하기 좋은 회색 톤의 클래식 더플 12 백, 나풀거리는 시폰 블라우스, 몇 가지 버전의 모터사이클 재킷(론칭 직후 순식간에 솔드아웃 사태를 빚은), 일본에서 수작업으로 마무리된 일본산 하이웨이스트 스키니 진, 10.5cm T 스트랩 재니스 에스카르팽 등등(시즌에 따라 아이템에 약간의 변화는 있다).

이렇듯 T by 알렉산더 왕이나 생로랑 퍼머넌트 컬렉션의 베이식 아이템들은 타 브랜드의 ‘커머셜 피스’와 동일한 역할을 하며 실질적인 매출을 담당하고 있다. 시즌에 상관없이 구입 가능하고 계속해서(무난하게) 입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매 시즌 바뀌는 아이템과 적절하게 어우러지기 때문에 가격 대비 실용성 면에서 단연 으뜸. 워드로브 에센셜의 원조, 도나 카란은 이 아이템들이 현대 여성의 복잡한 삶에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패스트푸드만큼 빠르게 옷을 입을 수 있는 일종의 시스템이죠.”

85년 데뷔 컬렉션 때 선보인 이래 RWT 라인의 하나로 계속 이어져온 도나 카란의 ‘세븐 이지 피스’는 침부터 밤까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워킹 우먼들의 필요를 반영한 7개 아이템(라이크라 디수트, 시폰 블라우스, 캐시미어 스웨터(또는 터틀넥), 저지 드레스, 재킷, 랩 스커, 레깅스. 여기에 케이프나 액세서리가 더해지기도 한다)으로 구성돼 있다. “이 아이템들이 얼마나 유용한지 잘 모른 채 입고 나면 마치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놀라곤 하죠. ‘이럴 수가, 아주 딱인데?’ 이렇게요!”



디자이너들의 에센셜 아이템에 대한 편애는 협업 프로젝트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기네스 팰트로의 라이프스타일 사이트 구프닷컴(goop.com)을 위해 그녀의 절친 스텔라 맥카트니가 디자인한 의상이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 온통 검정 일색으로 울과 실크, 캐시미어가 섞인 점프수트, 스키니 진, 울 블레이저와 팬츠, 숄더백은 스텔라 맥카트니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기본에 충실하다. “딸에게 남겨줄 만한, 클래식한 아이템으로 구성하고 싶었어요.” 팰트로의 의지를 십분 반영한 맥카트니는 “시간이 지나도 입을 수 있고, 매우 편안한 동시에 접근 가능한 의상들”에 초점을 맞춘 것.

한편 판매 첫날(9월 15일 블랙 프라이데이)부터 완판 사례를 빚은 타겟과 필립 림의 콜라보레이션은 그나마 아기자기한 편. 가죽 바이커 재킷, 여성스러운 스타일과 캐주얼한 스타일의 두 가지 타입 LBD, 턱시도 팬츠, 화이트와 꽃무늬 실크 블라우스, 네이비 플리츠 스커트, 얌전한 풀오버, 트렌치코트, 토트백 등은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산뜻한 분위기의 착장 24벌-당연히 24시간을 의미한다-을 무난히 맞출 수 있다. “물론 모든 옷에 꽃가루를 흩뿌려놓을 수도 있었죠. 나름 멋졌겠지만, 그런 옷을 매일 입을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 대중을 위한 디자인을 할 것인가에서 나아가 정제된 디자인을 하는 건 일종의 도전이었어요.”

아주 간단한 아이템들이라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옷장을 뒤져보면 실제로 내 옷장에 갖춰져 있는 건 몇 가지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아무리 옷을 사도 입을 게 없다고 느끼는 것 또한 같은 맥락. 기본 아이템들은 어떻게든 요리조리 맞춰 착장을 완성할 수 있지만 색이 튀거나 디자인이 색다른 것들은 매치하기 어려울뿐더러 몇 번만 입어도 너무 자주 입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다. 물론 대중들이 베이식 아이템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데에는 스트리트 스타일이 기여한 바가 크다.

컬렉션 기간 내내 낡은 바이커 재킷을 입고 다니는 모델이나 팬츠에 재킷을 즐겨 입는 패션 에디터, 어제는 화려한 목걸이를 매치했던 평범한 스웨터를 다음 날엔 허리에 묶은 채 나타난 스타일리스트의 쿨한 옷차림은 패셔니스타들도 레이스가 나풀거리는 블라우스나 리본 달린 구두보다는 결국 베이식한 아이템을 선택한다는 걸 증명해주니까.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에서도 동일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최근 쟈뎅 드 슈에뜨는 맞춤 제작하는 쟈뎅 드 슈에뜨와 10~20대 타깃의 통통 튀는 럭키 슈에뜨 사이에, 20대 후반에서 30대를 겨냥한 화이트 라벨을 독립시켰다. 일상생활에 입기 적합한 레디투웨어 라인을 표방한 화이트 라벨은 오버사이즈 코트, 금장 단추 더블 블레이저, 맨투맨 티셔츠, 롱스커트 같은 쟈뎅 드 슈에뜨의 시그니처 아이템을 매 시즌 프린트를 바꾸거나 디자인을 조금씩 변형해서 선보일 계획. “기존 쇼피스와 다르게 입기 쉬운 옷”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디자이너 김재현의 설명대로 좀더 성숙한 버전의 커머셜 라인으로 자리 잡을 예정이다.

컬렉션 피스가 꽤 웨어러블한 스티브앤요니는 ‘트렁크 컬렉션’을 통해 양말이나 비니, 에코 백, 클러치 등 의상을 돋보이게 할 액세서리와 쿠션 같은 라이프스타일 아이템을 추가하고 있다. 시즌과 상관없이 기획에 따라 아이템군이 확장되며 역시 재고가 남아 있는 한 언제든 구입할 수 있다. 디자이너 안태옥의 새로운 라벨 ‘홈 그로운서플라이’는 기본에 충실하고 제품의 기능성이 가장 극대화된 아이템인 셔츠와 티셔츠를 중심으로 관리하기 쉽고 실용적인 아이템으로 구성돼 있다. “무인양품처럼, 누구에 게나 꼭 필요한, 편안하고 실용적인 아이템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수지 멘키스는 디자이너들이 1년에 12개 컬렉션을 디자인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고, 소비자들은 겨울이 왔을 때 정작 두꺼운 코트를 살 수 없는 패션계의 구조를 한탄했다. 그러나 젊고 현실감각 투철한 요즘 디자이너들이라면 눈이 뱅글뱅글 도는,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어지러운 유행의 부메랑 속 패션계를 다시금 안정시킬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로 인해 우리는 필요한 때 원하는 걸 살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