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냉면

냉면의 왕국에서는 겨울이 되면 냉면성애자들이 길채비를 서두른다. 올해는 갈 길이 더 멀어졌다. 동서남북으로 냉면 로드를 따라 힘차게 육향을 좇는다. 쩡하게 머리를 울리고 울대를 얼리는 겨울 냉면의 마력 때문이다.



원래는 ‘평뽕’이었다. 2013년 여름, 가수 존 박이 Mnet의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 <방송의 적>을 통해 ‘냉면성애자’ 호칭을 얻으며 이 땅의 냉면 마니아들이 이젠 냉면성애자로 불리게 됐다. 마약중독이나, 페티시즘이나 매한가지다. 빠져들기 쉬워서 위험하고 쉽게 헤어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들만의 매트릭스 밖에선 그것이 가진 마력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선. 순조도, 고종도, 정약용도, 수필 <냉면>을 쓴 소설가 김남천도, 모두 평뽕이자 냉면성애자였다.

냉면성애자들이 말하는 냉면이란 어디까지나 평양냉면이다. 평양냉면 중에서도 물냉면이 이들에게 유일한 냉면이다. 냉면성애자 중 평양냉면집에 가서 비빔냉면을 먹는 냉면성애자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평양냉면 페티시 환자들은 뭇 분식집의 달달하고 시큼한 냉면은 먹지도 않을뿐더러, 냉면이라 부르지도 않는다. 척척 비벼 식초와 설탕, 겨자를 듬뿍 넣어 매콤함을 즐기는 함흥냉면도 존중은 하되, 냉면이라 부르지 않고 엄격히 함흥 냉면이라고 부른다. 육전을 듬뿍 얹은 진주냉면도 그저 진주냉면일 뿐이다.

감칠맛이 진하게 도는 차가운 육수를 들이켜고, 턱턱 끊기는 회녹색 메밀면을 한입 가득 식도로 넘기는 것이 평양냉면의 재미다. 소(흔치 않게 사골도), 돼지, 닭, 꿩을 집집마다 비법대로 조합해 육향 가득한 육수를 내고, 거기에 동치미 국물을 섞는가 마는가 역시 집집마다의 비법에 달렸다. 맛을 더 끌어내기 위해 조미료를 한 술만 넣든, 한 바가지를 넣든, 평양냉면 육수의 근간은 아무튼 차가운 고기 국물이다. 거기에 면은 메밀 향이 잘 살아 있어야 한다. 집집마다 밀가루를 적당히 섞어 메밀에 없는 글루텐을 보충해 면발에 쫄깃함을 더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메밀 향이 나지 않는 면은 평양냉면 면이 아니다. 냉면성애자들이 100% 메밀에 집착하는 이유다.

연예인들이 방송이 아니라 일상을 기록하는 트위터에서 냉면 이야기를 주고 받은 덕분에 그들의 냉면성애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배우이자 감독 박중훈이 일부러 도쿄에 스시를 먹으러 갈 정도로 스시를 사랑하며 트위터에서도그 속 깊은 사랑을 토로하곤 하지만, 그가 스시성애자로 불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맛 좋은 스시는 중독되기엔 너무 비싼 음식이다. 냉면은 1만원 한 장으로 해결이 되는 음식이라 이슈가 되기에 부담이 없고, 대중에 영향을 주고 파급되기도 쉽다. 어디 가서 냉면을 사랑합네, 매일 먹네 얘기해도 이미지를 호사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논현동과 장충동의 평양면옥, 주교동 우래옥, 입정동 을지면옥, 필동의 필동면옥, 그리고 염리동 을밀대에서 냉면 그릇을 두 손에 들고 육수를 들이켜는 연예인을 마주치기란 청담동 미용실 앞에서 연예인의 밴을 지나치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하도 드나들어 논현동 평양면옥 문지방을 다 닳게 했다는 존박이 그렇고, 존 박에게 냉면을 가르쳤고 이제는 “루크를 보는 오비완의 마음으로” 아직 냉면의 포스가 충분히 함께하지 않은 존 박을 지켜보는 이적이 그렇다. 광명에 새로운 평양냉면집 정인면옥이 개업해 화제가 되자 발 빠르게 다녀와 존 박에게 추천해주는 등 냉면에 대해 지도 편달을 아끼지 않는다. 가수이자 피아니스트 정원영 교수는 그들보다 냉면 경력이 길다. 정원영과 이적은 2003년 발매한 긱스 2집의 ‘짝사랑’에서 “난 너를 원해, 냉면보다 더!” 하며 냉면성애를 고백한 바 있다(참고로 이트라이브가 곡을 쓰고 박명수가 <무한도전>에서 부른 ‘냉면’은 면이 질겨도 너무 질기다고 했으니 평양냉면이 아니고, 따라서 이들은 냉면성애자가 아니다). 그들과 친구인 정재형과 이상순 역시 냉면집 드나드는 것이 자주 포착된다. 어쩌면 그들의 친구이고 아내인 이효리가 채식주의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냉면성애자의 길에 들어섰을 수도 있는 일이다.

셰프 박찬일은 남대문 부원면옥의 옛 맛을 잊지 않고 있으며, 장기하와 얼굴들의 멤버들, 그중에서도 특히 하세가와 요헤이, 인디 음악계에 너른 인맥을 가진 칼럼니스트 김작가, 한국 펑크의역사이자 현재인 크라잉넛의 한경록도 걸핏하면 냉면을 먹는다. 지리상 이점 때문에 을밀대를 애용한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이자 음악평론가인 배순탁 역시 냉면성애자다. “존 박과 냉면 얘기를 해보니까 이 친구, 공력이 있더라고요. 냉면이 처음부터 먹기 편한 음식은 아니지만 맛을 들이면 확 빠져드는 마력이 있어요. 게다가 해장에는 냉면만한 게 또 없죠. 요즘 노포들이 제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몇몇 집은 무리하게 분점을 내거나 주방 직원이 바뀌어서 휘청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해요. 그 와중에 경기도권에 새로운 냉면의 강자들이 나타났어요. 특히 판교의 능라라는 집이 훌륭해요. 대중교통으로 자주 가기가 쉽지 않아서, 이제까지 필요 없던 차를 사야 할까 고민하고 있답니다.”

바람이 더 차지면 침이 고인다. 남들이 한여름 더위를 달래기 위해 냉면집 앞에 줄을 서는 메밀꽃 필 무렵을 지나, 10월부터 메밀밭에서 가을 메밀이 수확되기 시작하면 냉면성애자들에게는 그때부터가 냉면의 제철이다. 햇메밀로 면을 해야 면에서 메밀 향이 난다. 소도 여름엔 육질이 물을 먹어 상대적으로 겨울에 맛있다는 속설이 있다. 음식 맛 좀 안다는 사람들이 몇 년째 울리는 냉면 타령에 ‘존 박 효과’까지 더해져 올겨울은 냉면의 왕국이 더 분주하다. 이때쯤 냉면의 왕국에서는 냉면성애자들이 길채비를 서두른다. 장충동으로, 논현동으로, 입정동, 주교동, 필동으로, 저마다 냉면 로드를 따라 힘차게 육향을 좇는다. 때로 의정부 평양냉면의 본산, 평양면옥으로 원정을 떠나기도 하고, 올해는 더욱이 광명의 정인면옥, 판교의 능라라는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 냉면성애자들의 이동 거리가 더 길어졌다.

쩡하게 머리를 울리고 울대를 얼리는 겨울 냉면을 둘러싼 냉면성애자들의 모험은 식생활이 그 자체로 유희가 된 시대를 반영한다. ‘맛집’을 찾아 낯선 동네를 찾아가는 즐거운 소일거리, 지방의 향토 음식이나 옛 정취를 간직한 노포들이 그 자체로 여행 코스가 되고 여행의 발단이 되는 트렌드의 체험판이자 축약판이 바로 냉면이다. <그래비티>가 우주를 응시하며 SF 장르의 새 지평을 활짝 열었듯이, 냉면 육수를 처음 들이켜는 순결한 순간 역시 짜릿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