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 논란

케케묵은 인종차별 문제가 패션계에선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누드 톤, 누드 컬렉션은 여전히 통용되는 단어이고, 모델들은 무조건 백인 모델이 대세다. 과연 누드란 어떤 인종의 ‘누드’를 뜻하는 걸까?



“누드 컬렉션은 여성의 다리와 슈즈의 경계를 허물어줌으로써 다리가 길어 보이도록 한다.” 얼마 전, 크리스찬 루부탱은 명암이 다른 다섯 색상의 펌프스로 구성된 ‘누드 캡슐 컬렉션’을 론칭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다리가 연장된 듯한 착시 효과를 통해 늘씬한 실루엣을 완성해주는 것.” 디자이너가 고객인 여성들이 그들 자신의 피부색과 같은 구두를 신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일까? 하지만 패션계에서 ‘누드’라는 이름 아래 이토록 다채로운 컬러를 선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크레파스조차 ‘살색’이라는 단어를 폐기한 지 10년이 다 돼가는 지금, 패션계에서 루부탱의 시도가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헬프> <장고: 분노의 추적자>, 그리고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까지 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1950~60년대가 배경. 인종차별을 과거의 문제로 치부하며 비교적 유쾌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 말인즉슨, 언제부턴가 우리는 인종차별 문제가 현재진행형이란 사실을 망각하게 됐다는 이야기. 하지만 최근 패션계에서 인종차별과 관련한 자각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고 있다. 민감한 주제가 다시 불거진 계기는 지난 패션 위크를 앞두고 트위터에 남긴 조단 던의 솔직한 심경. “내가 유색인종(colored)이기 때문에 캐스팅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듣는 경우가 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그녀는 <가디언> 인터뷰에서 “여전히 패션계에선 믿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아무도 용기 내어 말하지 못할 뿐”이라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 순간에 캐스팅을 취소하는 이유가 피부색 때문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파리에서 꽤 여러 번 그런 경험을 했다.” 톱 모델인 조단 던이 차별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다른 흑인 모델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 상상이 간다. “스타일리스트나 캐스팅 디렉터들은 흑인 모델이 표지에 등장하면 패션지가 잘 팔리지 않는다는 핑계를 댄다.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궁금하다.” 표지 모델의 피부색과 판매량과의 상관관계를 밝힌 연구 결과는 없지만, 조단의 말처럼 패션계의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정관념을 지닌 건 사실인 듯. 1892년 창간 이후 미국 <보그> 표지를 장식한 흑인 모델 또한 1%를 간신히 넘는다. 121년 동안 제작된 1,452권 중 유색인종 표지는 딱 16권뿐(그것도 2013년 3월과 4월 비욘세와 미셸 오바마가 등장했기 때문에 올라간 수치).

작년 9월부터 시작된 ‘다양성 연합(Diversity Coalition)’은 좀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한다. 전직 모델인 이만, 나오미 캠벨, 그리고 사회운동가 베슨 하디슨은 런웨이에 유색인종 모델을 전혀 세우지 않거나 단 한 명만 세운 패션 브랜드 리스트를 작성해 뉴욕, 런던, 밀라노, 파리의 패션협회에 전달했다. 캘빈 클라인, 도나 카란, 마크 제이콥스, 발렌시아가, 샤넬, 생로랑, 알렉산더 왕 등 대다수 빅 브랜드들이 포함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피비 파일로는 셀린을 맡은 이래 단 한 번도 흑인 모델을 쇼에 기용한 적이 없다. 세 사람에 따르면, 흑인 모델들이 캐스팅 디렉터에게 가장 빈번하게 듣는 말은 “디자이너가 이번 시즌에는 흑인 모델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디자이너는 흑인 모델이 컬렉션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런웨이에 세우지 않은 것일 뿐, 자신이 인종차별 주의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모델 캐스팅에서 흑인이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있는 건 엄연한 현실이다. 페미니스트 웹진 제제벨(jezebel.com) 조사에 따르면, 지난 2014 봄여름 시즌 뉴욕 패션 위크 런웨이에 오른 총 4,637벌 중 유색인종 모델이 입은 룩은 1/5도 되지 않는다. 정확한 수치로 보자면 백인 80%, 흑인과 아시아인이 각각 8%, 나머지 소수 인종이 4%다. 제제벨의 조사는 지난 2008년 가을 시즌부터 시작됐는데, 그동안 10번의 컬렉션이 계속되는 동안 수치는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최근 몇 시즌 동안 아시아계 모델들이 활약하면서 아시아 모델 붐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수치상으론 늘 7~8%대에 불과하다. 시장 규모는 엄청나지만 말이다.

이건 모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빅 브랜드 중 유색인종 디자이너가 이끌고 있는 브랜드는 손에 꼽힐 정도. 특히 흑인 디자이너는 발맹의 올리비에 루스테잉뿐. 이에 대해선 파리에서 두 번의 쇼를 선보인 칸예 웨스트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불만을 표했다. “내가 만들고 싶었던 옷은 흑인이나 백인과는 아무 상관 없는 컬렉션이었다. 하지만 원하는 옷을 맘대로 만들 수 없었던 이유는 분명 내가 흑인이기 때문이고, 패션계에 만연한 인종적, 계급적 편견 때문이다.” 칸예 웨스트 컬렉션이 기대 이하였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실패 이유가 과연 피부색 때문일까 의문이 들지만, 인종차별이 거의 사라진 음악계에서, 게다가 흑인들이 대세인 힙합 무대에서 활동하던 칸예 웨스트가 이 같은 패션계 분위기에 적응하기란 분명 어려웠을 것이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흑인 고객들조차 인종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바니스 뉴욕의 살바토레 페라가모 매장에서 쇼핑하던 한 젊은 흑인 고객은 자신의 신용카드로 결제했는데도 도난 카드를 사용한 것으로 의심 받고 백화점에 상주하던 경찰(NYPD)에 의해 연행됐다. 누명은 곧 벗겨졌지만, 인종차별의 예라는 비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흑인이 하이패션 브랜드의 값비싼 물건을 살 리가 없다’란 놀라운 편견을 보여준 것이다. 바니스 뉴욕은 연말 쇼핑 시즌에 이런 불미스러운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전 직원에게 인종차별과 관련한 특별 유의 사항을 전달했지만, 흑인 고객들의 백화점 앞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결국 패션계 모든 구성원들이 인종차별 문제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야기. 모델 에이전시는 하이패션 브랜드와 패션지에서 유색인종 모델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하이패션 브랜드와 패션지는 자신들의 주요 고객층이 유색인종이 아니기 때문에 유색인종 모델을 기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변명한다. 그리고 고객들은 자신들은 정보를 소비하는 입장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 악순환의 고리는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패션계 내부적으로 세부적인 약속들이 생겨나면 혹 도움이 되지 않을까? 가령, 스크린쿼터제처럼 한 시즌에 반드시 캐스팅해야 하는 유색인종 모델의 비율, 패션지 화보 촬영 유색인종 모델의 비율 등등. 너무 엉뚱하다고? 물론 안다.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은 우리 자신들의 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 피부색이 진할수록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인식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패션계가 인종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