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만리

패션 생태계에 자연 회귀본능이 살아나기 시작됐다. 당대 슈퍼 디자이너들이 ‘내추럴리즘’에 빠져 올봄 신작 공개 자리를 온통 꽃과 풀과 나무로 꾸민 것. 2014년, 패션에 펼쳐진 정글만리!



이른 아침, 풀 냄새가 비릿하게 풍기는 이곳은?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 화훼 시장이 아니다. 여기는 프랑스 수도 파리. 그렇다면 파리의 시테 섬 한구석에 어여쁜 난초와 앙증맞은 식물들로 만발한 꽃 시장? 루이 14세가 1667년 짓기 시작해 5년 만에 완공한 파리 국립천문대. 여기서 발렌시아가 2014년 봄 패션쇼가 열린다니!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보다 8년이나 앞선 명승고적이 하이패션을 향해 문호를 개방한 건 역사상 처음이라며 발렌시아가 사람들이 흥분한 투로 귀띔했다(그러면서 한국에서도 첨성대에서 패션쇼가 열릴 만하지 않겠느냐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아무튼 이곳은 천문대가 아닌 식물원에 놀러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실내가 파릇파릇했다.

자, 2014년 새로운 유행이 숨 쉬는 패션 정글만리로 여러분을 안내한다! 담쟁이를 비롯한 온갖 덩굴식물들이 수백 년 역사를 지닌 석조 건물 벽에 한가득 장식된 발렌시아가 패션쇼장. 꼭두새벽(지각쟁이에다가 늦잠꾸러기들이 대부분인 패피들에게 아침 9시나 10시에 열리는 패션쇼는 꼭두새벽이나 마찬가지)에 거대한 아치형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자연광의 세례를 받으며 맡는 식물 냄새란! 쇼가 시작되자 알렉산더 왕이 나뭇가지들이 뒤엉킨 상태로 벽을 왜 꾸몄는지 감이 왔다. 발렌시아가 자료 보관실에 고이 잠들고 있던 덩굴 이파리의 질감과 오가닉을 주제로 삼아 자기 식대로 ‘재배’해 컬렉션을 구성한 것(쇼는 두 차례 열렸는데, 뜨거운 조명 탓에 두 번째 쇼에선 식물들이 싱싱해 보이지 않았다). 패션 피플들은 옷보다 자연의 산뜻한 분위기에 도취된 것도 사실이다. 스타일 리스트 카린 로이펠트는 쇼가 끝난 뒤 백스테이지에서 알렉산더 왕에게 이렇게 전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건물 내부에 들어와본 적이 없다고!”

패션 정글만리의 두 번째 여정은 로댕 갤러리의 뒤뜰이다. 영화 <미드나잇 파리>에서 카를라 브루니가 관광 가이드로 나와 조목조목 소개하는 곳으로도 이름난 바로 그곳이 디올 쇼장으로 탈바꿈했다(유튜브를 통해 무대 제작 과정을 구경할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 턱을 괴고 앉아 지켜보며 ‘지옥의 문’ 옆에 건설된 라프 시몬스의 무릉도원은 외관부터 입이 떡 벌어질 정도. 내부는? 정말이지 “헉!”이라는 감탄사로 인해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파리 패션 위크에서 관객들이 기념 촬영을 이토록 많이 한 적이 또 있었나!). 시몬스가 무슈 디올이 생전에 아끼던 장미 정원을 현대판으로 어떻게 재현했는지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형광색 페인트로 악센트를 준 조화와 원화가 섞여 있고, 어떤 건 가짜 등꽃이었으며, 덩굴 캐노피들이 비계(scaffolding, 높은 데서 공사할 수 있게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에 폭포수처럼 매달리기도 했지만, 장미를 비롯한 생화가 곁들여져 초현실적 분위기마저 조성했다(호들갑스러운 일본 관객들 “스고이, 스고이!”를 연발하며 그 유명한 4월 기타큐슈 가와치 후지 정원의 등나무 터널을 떠올리는 눈치).

디올의 CEO 시드니 톨레다노는 단 한 차례의 쇼를 위한 이 공간이 무려 3,000㎡에 달한다고 몇몇 관객에게 전했다(900평이 넘는 공간이 온갖 꽃과 식물로 장식됐다면 좀더 쉽게 와 닿겠나?). 사실 호화로운 자연에 대한 라프 시몬스의 탐닉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디올 가문에서 첫인사를 건넨 2012 F/W 꾸뛰르 때도 놀라 자빠질 만한 여러 개의 꽃 방에서 쇼를 발표했다. 물론 그때는 100% 생화! 아무튼 시몬스는 “나는 더 많은 ‘나’를 원한다”라고 철학적이며 아리송한 설명을 덧붙였다. 해석하자면, 그의 ‘라프시즘’엔 경이롭게 우거진 정원과 때깔 나는 자연이 포함되는 셈이다. 미국 ‘스타일닷컴’의 패션 평론가 팀 블랭크의 눈에는 이곳이 좀 엉뚱하게 보인 걸까? “쇼장은 사이키델릭하게 뒤섞인 실제 식물과 가짜 식물 때문에 앨리스가 떨어진 이상한 나라 그 자체였다. 그리고 우리는 토끼 굴에 빠진 꼴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주황색 등꽃 프린트의 분홍색 플리츠엔 ‘Alice Garden’이란 타이포그래피 밴드가 달려 있었다.

초자연적인 곳에서 일장춘몽을 깨고 보니, 패션 정글만리는 어느새 도시로 훌쩍 공간 이동! 여기는 좀더 거칠고 야생적인 몽클레르 감므 루즈의 쇼장이다. 지암바티스타 발리는 앤 드멀미스터, 이자벨 마랑 등이 쇼장으로 애용하는 파리 좌안의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열대우림 도시 정글로 둔갑시켰다. “아프리카에서 영감을 얻었다”라는 의도를 구현하기 위한 것. 이번 컬렉션의 주인공인 얼룩말, 파이톤, 레오파드, 기린 모티브는 물론, 뱀피나 파충류 비늘을 흉내낸 깃털 장식 등의 배경으로서 습기 머금은 열대우림 세트는 딱이었다. 게다가 막판에 멧돼지가 아닌, 고릴라 두 마리(물론 사람이 분장한 것)가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나타나 런웨이를 신나게 질주했으니, 이곳이야말로 도심의 정글만리!



파리의 패션 정글만리는 뤽상부르 공원이 최종 목적지다. 에르메스가 2014 S/S 패션 위크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위해 이곳을 섭외하는 데 성공했다(천문대와 마찬가지로 사적인 행사를 위해 뤽상부르 공원이 개방된 건 이번이 처음). 에르메스의 크리스토프 르메르는 기나긴 패션 위크 취재로 지친 관객들에게 ‘자연 테라피’를 선사하듯 공원 안의 유리 온실로 모두를 초대했다. 물론 컬렉션 주제를 표현하려는 의도와 함께 겸사겸사 이곳을 고른 것(자신의 시그니처 쇼를 위해서도 아담한 정원을 선택했다). 루소의 ‘적도의 정글’에서 영감을 얻어 ‘폭우가 휩쓸고 간 후 열대우림’이 컬렉션의 주제였다. 결국 진짜 잎사귀처럼 생긴 바삭한 튀김, 축축한 양치식물과 무성한 야자과 식물, 감귤나무, 바닥에 깔린 모래 냄새, 루소의 그림에서 비롯된 수련 꽃무늬나 초록과 청록 등으로 인해 모두가 오감의 힐링을 경험할 수 밖에. 르메르의 배려에 감동한 관객들의 반응은 이랬다. “대부분 어둡고 답답한 사각 공간 안에 갇혀 있어야 했던 긴 시간들이었는데, 뤽상부르 공원 온실에 무성한 야자와 향기로운 과일 나무에 둘러싸여 앉아 있을 수 있었던 짧은 시간은 정말 큰 기쁨이었다.”

태초에 에덴이 있었다면, 2014년 봄을 위한 캣워크에도 에덴과 정글이 있다. 그곳에서 뛰노는 아담과 이브를 상상해보시라! 등꽃 아래 서 있는 빨간 셔츠 차림의 라프 시몬스, 수줍게 꽃비를 맞고 있는 크리스토퍼 베일리, 담쟁이덩굴 사이를 펄펄 뛰는 알렉산더 왕, 뤽상부르 공원 벤치에 앉은 크리스토프 르메르…. 서정적 소설의 한 대목처럼 들리거나 패션계의 그린 캠페인을 위한 광고 콘티처럼 보이시나? 여기에 남태평양 휴양지 해변에서 비니키 차림 아가씨들에게 칵테일을 서빙하는 디스퀘어드2의 쌍둥이 딘앤댄, <한여름 밤의 꿈> 속 장면처럼 초록 잎사귀 화관을 머리에 쓴 아가씨들과 노니는 안토니오 마라스, 메두사와 관능미를 정화시키는 팔라초 베르사체 쇼장 한가운데 선악과 나무처럼 상징적으로 심어진 나무 두 그루. 정말이지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자연주의 디자이너를 표방하는 스텔라 맥카트니도 한때(2008 S/S 패션쇼) 프랑스 식물학자 패트릭 블랑에게 무대 디자인을 의뢰한 적 있다. 자극적인 오브제가 난무하는 패션계에 아오리 사과 같은 풋풋한 향을 전하며 오가닉 바람을 일으킨 쇼였다. 그리고 6년 후인 지금, 꽃과 풀과 나무가 있는 캣워크는 판이 엄청나게 커졌다. 정원쯤으론 성에 차지 않고 아마존 정글 수준이다. 전 지구적 트렌드가 그렇듯, 패션 울타리 안쪽도 ‘가드닝’에 푹 빠져 있는 셈이다. 감각적인 패피들이나 CEO들은 월 가든을 집이나 사무 공간에 마련하거나 중정을 건물 안에 두곤 식물과 함께 호흡한다. 헤어 스타일리스트 샘 맥나이트는 인스타그램에 하루가 멀다고 자신의 영국 시골집은 물론, 전 세계 곳곳을 유람하며 찍은 정원과 숲 사진을 올려 팔로워들에게 잠시나마 내적 치유를 선사한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구찌 웨스트만도 아기자기한 정원 사진 수집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서울에도 ‘식물성’ 패션 피플들이 늘고 있다. 이상봉은 지난 서울 패션 위크 무대를 대숲으로 꾸몄고, 우영미는 서울에 ‘알레’ 신드롬을 일으킨 자매들과 함께 집이나 사무실에서 늘 다양한 식물을 가꾼다. <보그 리빙> 취재를 위해 들렀던 정욱준의 모던한 아파트 공간 역시 집 안 곳곳에 초록 화분들이 놓여 있다. 동물 애호가로도 소문난 송자인은 이젠 식물 애호가까지 겸한다. 이태원에 있는 그녀의 컨셉 스토어 ‘MO’는 <마사 스튜어트 리빙>에 소개하고 싶을 만큼 젊고 재미있고 싱그럽다. 김재현 역시 주택을 개조한 청담 부티크의 작그마한 ‘자뎅’에 꽤 정성을 기울인다. 또 봄이 오면 이태원 건물 옥상에 이런저런 꽃과 식물들을 키우기 위해 물뿌리개와 모종삽을 직접 드는 스티브와 요니 커플도 있다(그들이 키우는 고양이 세 마리가 이 옥상 정원에서 봄볕 쬐는 풍경을 떠올려보시길).

기사를 쭉 읽다 보니, 키엘의 ‘포레스트 레인’이나 꼼데가르쏭의 초록빛 ‘어메이징그린’ 향수를 ‘칙!’ 뿌린 듯 주위가 풋풋한 향으로 진동하는 착각이 든다면? 당신이 꼭 초식남이나 초식녀가 아니더라도 대세에 따르고 싶다면, 좀더 적극적으로 식물 쪽에 눈을 돌리시라. 안타깝게도 2013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를 놓쳐 후회막급이라면? 이번 주말 양재동 꽃 시장에라도 들러 화훼, 묘목, 분재, 화분, 유실수 등의 파릇파릇한 낱말과 친해지는 건 어떨지. 무차별적 공습을 퍼붓는 전자파 공해와 삭막하기 짝이 없는 책상 풍경에 수경식물 하나 들여놓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제주도 여미지식물원에서 열리는 패션쇼, 창경궁 유리온실에서 열리는 패션 파티까진 꿈꿀 순 없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