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아트 1

미술관이 캣워크로 쳐들어왔다! 이제 우리 여자들은 예술가의 작품, 혹은 예술품이 된 옷을 입고 돌아다닐 수 있다. 걸어 다니는 갤러리가 된다는 사실을 매력적으로 느낀다면, 떠오르는 의문 하나. “내가 입은 옷이 패션인가, 아트인가?”



Gallery 1
EXHIBITION <패션 인투 아트>

6월마다 한 차례씩 꼬박꼬박 미국과 유럽 3개국의 4대 패션 도시에서는 장장 한 달간의 패션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2014년 첫 시즌을 위한 패션 위크는 평소보다 몇 배 더 요란하고 유난스러웠다. 인간의 시청각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대소동쯤 됐으니까. 특히 ‘안습’이나 ‘안구 정화’ ‘안구 테러’ 등등의 요즘 유행어들처럼 시각에 호소하는 순간이 많아 패션쇼장을 빠져나올 때 필요한 건 안구에 휴식을 주기 위한 선글라스였다. 물론 2014 S/S 패션 위크 대단원의 막을 내리던 순간은 장례식이 떠오를 만큼 어두침침했다. 새까만 루이 비통 무대를 기억하시는지. 죄다 검정이라 어딘지 불길한 옷들, 여기에 마크 제이콥스와 파리의 애절한 이별까지 보탰으니까. 그렇다면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의 극장 안 같은 어둠 속에서 동공 확장과 망막 자극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루이 비통이 펼친 어둠의 세력을 제외한 나머지를 둘러보시라! 유미주의와 낙천주의, 맥시멀리즘의 천국이다. 오죽하면 그곳이 패션 위크인지 아트 페어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을까. 예술적인 옷들은 미술 교과서에 실린 작품 사진만큼 충분했다. 패션 위크를 취재하는 내내, 그리고 수백 장의 런웨이 사진들을 재점검하는 동안 이런 질문이 천장에 떠돌아다녔다. ‘대관절 무엇이 옷이고 무엇이 예술품인가?’ ‘패션도 예술이 될 수 있나?’ ‘예술품을 입고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게 가능할까?’ 특히 몇몇 디자이너들은 패션계의 앤디 워홀이 되고 싶은 것 같다. 심지어 어떤 인물은 패션의 벽을 무너뜨린 채 예술계로 한 발짝 건너가 거기서 워홀을 자처하는 눈치다. 미우치아 프라다라면 패션과 예술 영역 모두를 아우르는 거대한 세계에서 21세기 앤디 워홀로 지칭해도 될 만하다.




올봄 프라다 컬렉션을 보며 디에고 리베라 같은 멕시코 화가들의 정치적 벽화가 떠올랐나? 제대로 짚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엘 맥, 스페인의 메사, 캐나다의 가브리엘 스펙터, 콜롬비아의 스팅크피시, 그리고 프랑스 출신의 잔느 톨란트와 피에르 모르네 가운데도 익숙한 이름이 몇몇 있을 것이다. 미우치아 프라다가 올봄 우리의 쇼핑이 단순한 소비 행위로 끝나지 않고, 일종의 ‘아트 패션’ 작품을 소지할 절호의 기회를 주기 위해 섭외한 예술가 명단이다. 지구 곳곳에서 벽화와 삽화를 그리는 젊은이들을 발굴해 폰다치오네 프라다의 벽을 맘대로 그리게 한 뒤, 이를 배경으로 만화 같은 벽화가 사이즈를 줄여 외투, 드레스, 가방 등에 복제되어 무대에 등장했다. 평론가들은 “분명 고부가가치 미래 투자가 될 것이다”라며 이번 컬렉션의 장밋빛 미래를 예측했다. 그러니 거금을 주고 산 가방을 되팔아 재테크 하던 시대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형태로 전개될 전망. 라틴적인 느낌의 올봄 프라다 가방과 모피 코트가 몇 년 후 경매장에 매물로 나올지 누가 알겠나!

예술을 옷에 도입한 프라다의 직설 화법이 아직은 좀 낯설어 패션과 아트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면? 젊은 여자들에게 유행의 지름길을 신속히 안내하는 피비 파일로를 따라가시길! 사실 미우치아 프라다와 피비 파일로는 공통점이 있다. 당대 여자들의 유니폼을 시의적절하게 제안한다는 것, 자신은 딱히 어떤 것도 참고하지 않았다고 떳떳이 밝히는 것, 그리고 스스로 불러일으킨 논쟁을 당대 여자들과 함께 극복하며 새로운 스타일을 만든다는 점에서 코코 샤넬의 계보를 잇는다는 것! 아무튼 피비 파일로는 셀린을 통해 부활시킨 미니멀리즘을 스스로 허물고 맥시멀리즘을 견고히 세웠다. 그런 다음 맨 위에 꽂은 깃발이 바로 아트. 프란츠 클라인의 거침없는 붓 자국, 호안 미로의 선명한 색채가 떠오르는 이번 컬렉션은 프로그램 노트 대신 마련한 브라사이의 그래피티 사진을 그래픽적으로 합성해 우월하게 완성됐다(그녀의 남편 맥스 위그램이 운영하는 갤러리에 전시된 마린 위고니에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것도 있었다). 그리하여 당대 유행의 엄격한 심사 기준쯤 되는 미국 <보그>, 그것도 2014년의 포문을 여는 1월호 표지에 대문짝만 하게 게재됐다.



누군가는 21세기 패션 워홀들이 공공미술과 마스터피스를 사적이며 고가의 옷들로 둔갑시킨 ‘아트-패션 운동’을 비난할지 모른다. 칼 라거펠트는 아트-패션 운동에 맞서기 위해 자기식대로 풍자적 각본을 마련했다. 쇼의 맨 마지막에 사뿐히 걸어 나오는 자신까지 포함해 90벌쯤 되는 옷보다 더 웅장했던 건, 역시 손수 완성한 75점의 그림과 조각들. “나는 여러 장르의 젊은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작업한 듯 보이게 만들었다.” 덕분에 그가 샤넬 아카이브에서 추출해 만든 이 가짜 예술품들은 샤넬 수집가들이 침을 질질 흘릴 만했다(어떤 작품 아래엔 판매 완료를 알리는 빨강 도트가 붙어 있었는데, 그게 라거펠트의 재치인지 실제로 누가 ‘찜’했는진 알 수 없는 일). 샤넬의 스타일리스트 아만다 할레치가 “컬렉션 안에도 예술이 존재한다”라고 전한 옷들은? 19세기 로얄 탈렌스사의 원색과 그러데이션으로 잉태된 팝아트 컬러 팔레트 의상. 이태리 <보그> 1월호 표지 의상으로 떡하니 실릴 만큼 상징성을 띠었다. 물론 팬톤 컬러칩 같은 이번 컬렉션이 데미안 허스트의 ‘The Judged’나 ‘Pyronin Y’와 맥락을 같이할 만큼 예술적 가치가 있을진 몇 년 후가 돼야 알겠지만.

이번 시즌 패션과 아트는 꽈배기처럼 꼬여 트렌드 DNA를 완성하고 있다. 질 샌더의 얼룩덜룩한 무늬는 알고 보면 알리기에로 보에티 작품. 생로랑의 기하학 줄무늬 패턴은 기 드 콩테, 롤랑 뮤레의 그래픽 터치는 팔레 루아얄의 17세기 정원에 설치된 다니엘 뷔랭의 스트라이프 기둥, 알렉산더 맥퀸은 90년대 맥퀸의 길거리 스타일과 20세기 초 아트의 결합, 디올은 컨템퍼러리 아트와 50년대 디자인 문화의 충돌이다. 하지만 패션과 아트 사이에서 자신만의 해법을 터득한 디자이너들과 달리, 단련이 덜 된 젊은이들은 아직 우왕좌왕했다. 고갱의 목가적인 타히티 시절을 되새기며 ‘The Sorcerer of Hiva Oa’를 빌려온 아퀼라노 리몬디는 뛰어난 완성도에도 불구, 살얼음판처럼 어딘지 아슬아슬했다. 모네의 수련을 곧이곧대로 옷감에 인쇄한 로다테 2012년 봄 컬렉션처럼 미술관 기념품 숍에 진열된 스카프처럼 보였으니까. LA 카운티 미술관에 전시된 켄 프라이스의 세라믹 프린트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피터 필로토는 프린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모두의 문제라면 세련된 트위스트의 부재. 오렌지색 붓 자국으로 시대 분위기에 동참한 세드릭 샤를리에의 신조만큼은 훌륭하다. “예술은 사람들을 꿈꾸게 한다!”



디자이너들은 자기만의 심미안과 탐미주의를 뽐내기 위한 독점 아트워크를 옷에 도입했다. 이런 현상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부추기듯 패션지들은 아예 아트만으로 편집된 잡지를 발간하는 데 재미가 들린 모양이다. 미국판 <W>는 매년 12월호와 1월호 합본을 ‘아트 이슈’로 마련하는데, 쿠사마 야요이의 흑백 물방울무늬 정장 차림의 조지 클루니처럼 매번 파격적인 기획으로 패션과 아트 사이의 가교를 자처한다(제시카 샤스테인도 예술과 현실이 공존하는 아수라 백작처럼 꾸며 표지에 등장한다). 프랑스 패션지 <로피시엘>은 얼마 전부터 <로피시엘 아트>를 발간 중(이집트 출신의 젊은 예술가 요세프 나빌과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의 협업이나 ‘아트 앤 모드’ 같은 주제는 물론, 마틴파,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등 아트 스타들이 이름을 올린다). 또 영국판 <하퍼스 바자> 역시 비정기적으로 아트 에디션을 내기로 했다(마틴 크리드, 트레이시 에민, 쿠사마 야요이, 개리 흄, 제프 쿤스, 샘 테일러 우드 작품으로 만든 6개의 표지는 수집용으로도 그만이다).

이렇듯 예술이 패션의 입맛에 맞게 활용될 무렵, 패션쇼라기보다 실험적인 예술품의 행진에 가까웠던 순간 앞에서 모두의 시선이 일시 정지됐다. 재주꾼이나 선동가를 초월해 선지자로 숭배되는 레이 카와쿠보의 움직이는 조형예술, 혹은 전위적 패션 퍼포먼스의 정지 장면쯤 되는 23점! 철저히 아트투웨어를 지향한 꼼데가르쏭 쇼는 패션 학도들의 졸업 작품처럼 천진난만한 분위기를 지닌 채 인습 타파로 중무장돼 있었다(냉소적인 사람들에겐 여전히 그 옷들이 별 볼 일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옷을 파는 일을 외면한 채 자기 세계에 빠진 고집불통 예술가는 아니다. 전 세계 수많은 매장에서 꼼데가르쏭의 여러 라인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데다, 얼마 전엔 뉴욕에도 자신의 멀티숍 도버 스트리트 마켓을 열었다. 패션 종사자들 사이에 ‘Thinker-in-Chief’로 통하는 그녀만이 보여주는 패션과 예술 사이의 원초적 본능은 뭘까?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유일한 방법은, 옷을 만들겠다는 의도 없이 시작하면 된다.” 요즘 자주 인용되는 카와쿠보의 이 선언에 따르자면, 2014년 첫 시즌을 위해 그녀가 창조한 건 과연 패션일까, 아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