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하게, 아름답게

연기는 인생이라는 호된 훈련의 증거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아마 그녀의 눈물은 짠맛이 아니라 단맛이 날지도 모른다. ‘고마워요, 내게 이런 감정을 알게 해줘서’라고 눈물로 말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의 김지수를 만났다.

정교한 블랙 재킷과 레이어드한 화이트 셔츠는 그레이하운드(Greyhound), 롱 드레스는마이클 코어스 컬렉션(Michael Kors Collection).

김지수는 더 많은 감정과 더 많은 열정을 원했다. 피가 배어 나와 붕대를 적시듯, 감정의 잔물결이 고요히 퍼져 공기의 파동을 조이고 바람의 데시벨을 높인 감정 연기. 그 아름다운 골격 속의 모든 근육이 슬픔과 고통을 느끼고 숨을 쉬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보면 우리는 ‘비참’과 ‘동정’에 대한 정의가 새롭게 재조정돼야 한다고 느낀다. 그녀가 경멸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남편의 애인이었던 한혜진에게 던지는 독설(“외도했던 남자랑 사는 기분이 어때?”)의 과녁이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걸 알 때, 제3자인 우리는 이 ‘심리적 투사’의 현장에서 훔쳐보기의 안전선 안에서 조차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그녀의 말은 비수가 되어 한혜진의 가슴에 하나하나 제대로 꽂혔다. 사랑 때문에 더 아프지 않기 위해 잔인해지는 그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 대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서글픈 공멸. 칼자루가 없는 칼, 그러니까 양쪽 모두 날이 퍼렇게 선 칼을 잡고 서로를 찔러 피를 내는 것. 그리고 이제는 마흔이 넘은, 맑은 거울 앞에 선 내 누이 같은 여배우에겐 욕심보다는 갈망이 보인다. 거센 세상의 물살에도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태도에서 느껴지는 우아함. 머리 위로 부는 바람에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주제에, 그 무엇을 향해서도 손을 뻗으려 하지 않는 단호함만이 김지수를 지탱하고 있다. 92년, 스무 살에 S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이래, 점점 더 뜨겁게 냉담해졌고, 혹독하게 아름다워졌다. 겸손해지게 만드는 어두운 시절도 다 지나갔다.

블랙 롱 드레스는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뱀부 뱅글은 구찌(Gucci).

드라마 <따뜻한 말 한마디>의 당신을 보니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 떠오르더군요.

지옥이죠. 지옥이 따로 없어요.

그 지옥에도 희망이 있나요?

제 카톡 메시지가 뭔지 아세요? ‘미경 재학’이에요. 남편 ‘재학’이 외도를 했건 안 했건, 제 신념은 이거 하나예요. “미경이는 재학이를 너무 사랑해.” 현실에서도 지진희 씨에게 그래요. “오빠, 나 오빠 없으면 못 살아.”

우리는 관계의 지옥에 살고 있지만, 사랑해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웃을 수 있죠. 시어머니에게 모욕당하고 남편에게 거절당하면서도 당신은, 참… 외롭죠. 이복 남동생만이 당신을 지켜주더군요.

제가 트라우마가 있는 인물을 좋아하나 봐요. 캐릭터의 외로움에 저 자신을 얹고 싶어 해요. <태양의 여자> 때도 입양된 아이였고, 파양될까 두려움에 떨었어요. 나를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의식이 강해요. 뭐랄까… 외로움과 두려움은 제게 너무 익숙한 감정이죠. 그래서 전 ‘미경’을 너무 잘 알아요.

끈 떨어진 연이 될까 봐 두려운가요?

영화 <여자, 정혜> 때도 저는 거의 무인도에 떨어져 혼자 살았어요. 세상과 전혀 소통을 안 하면서요.

여배우들은 사랑받지 못하면, 연기하기 힘들어해요. 여배우 전도연 씨도 모든 장르에서 ‘상대역에게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멜로드라마적인 믿음으로 연기한다고 했어요.

그래요? 도연이가 그러던가요? 저도 사랑해왔고, 사랑하는 거 좋아해요. 그런데 외롭지만 내 편(남동생)이 있고, 설사 없다 해도 처절하게 외롭지만, 그런 인물 자체가 내 편이 되는 그런 쾌감이 있어요. 그리고 상대를 향한 어떤 희망 어린 짐작을 하고….

‘사랑 없이 시작한 결혼’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남편에게도요?

그렇게 말하고 으르렁대도 속뜻은 그게 아닐 거예요. 저는, 대사보다는 그 안에 숨은 뜻을 읽고 싶어요.

때로는 포기나 체념보다 희망이 더 무섭죠. 그 무서운 희망을 바닥에 깔고 발효가 잘된 감정 연기가 일품이더군요.

이 나이 되면 그 정도는 나와야죠.(웃음) 전 좀더 리드미컬하고 싶어요.

안 그래도 응축과 폭발에 있어서 일종의 리듬감이 느껴지던데, 그걸 계산하며 연기하나요?

현실에서도 다들 상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살지 않나요? 남편(사랑), 시어머니(복종), 동생(연민), 내연녀(혐오)를 대할 때, 대사 톤이 다 달라요. 그리고 극 초반부 미스터리가 있을 때와 중반부터 불륜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 에너지도 완전히 다르게 터지죠. 어떻게 하면 좀더 리드미컬할 수 있을까, 늘 생각해요.

불륜 사실을 안 후, 분노하는 연기는 장안의 화제였어요. 밥상을 엎고 책상을 쓸어버리고…

카메라 감독님이 핸드헬드로 팔로우해서 원 신 원 컷으로 갔지요.(웃음)

인간이 자기감정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허리케인 같은 에너지가 휩쓸고 지나가야 알게 돼요.(웃음) 반면에 막장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관습적인 인서트라는 비판도 있겠지요.

그런 면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제가 뭘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왜 사람을 이렇게 후지게 만드니? 자애로운 엄마, 순종적인 며느리, 다감한 아내로 살 수 있었는데…” 그냥 제 몸을 도구로 그 대사가 포효한 거 같아요.

한때 ‘눈물의 여왕’이라는 타이틀도 있었죠?

특히 <태양의 여자> 때 다양한 울음을 울었어요. 웃으면서 우는 거, 마음 내려놓고 우는 거, 분노를 터뜨리며 우는 거, 이성적으로 따지면서 우는 거… 우리는 자기감정을 알기 위해 울음의 원인을 파악할 필요가 있어요.



정적인 사람인가요? 동적인 사람인가요?

모르겠어요. 드라마 감독이나 작가분들은 저를 ‘미친년’이나 ‘웃긴 년’으로 각색해보고 싶어 해요.

창작자들이 당신이 지닌 품위에 도전 의식을 느끼나 봐요.

품위라면 목소리 덕이겠죠. 스무 살 땐 하이 톤에 아기 같다고 지적받던 목소리인데.(웃음)

당신이 말없이 가만히 있을 때조차 오랜 세월, 빛과 어둠 속에서 교차 성장한 서늘한 아름다움이 보인답니다. 그런데 고양잇과 여자인가요? 강아짓과 여자인가요?

고양잇과는 아니에요. 강아짓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중간쯤 되겠네요. 때론 여장부 같지만, 쿨하지만은 않아요.

인간이 쿨하게 살 만큼 인생이 만만하지 않죠.

맞아요. 저 혼자 질퍽거리고 지질해지고 허우적거리고 정리 정돈도 잘 안 돼요.

궁극엔 자기 연기가 산문이 되길 바라나요? 시가 되길 바라나요?

영화에서는 시적이고 드라마에서는 산문적일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한 가지 성격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영화적일 때도 있고 드라마적일 때도 있을 거예요. 다만 배우로서의 삶이 좀더 입체적이고 리듬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있어요. 스물여섯에 국민 드라마 <보고 또 보고>를 할 때는 그악스럽고 똑 부러지는 대사를 잘도 뱉었죠. 지금은 제 말에 좀더 강약이 생겼으면 해요.

여배우로서 당신에겐 서정성과 긴장이 공존하죠. 자연인으로서의 김지수는 마음에 드나요?

짜증스러울 때가 많아요. 답답하게 상황에 끌려다닐 때도 많고. 냉철하고 이성적이어서 인생 정리를 잘할 것 같다고들 하는데 정작 저는 손해를 많이 보고 살았어요. 힘든 일을 많이 겪고 나니까 ‘연쇄살인마’ 빼고는 다 동정이 가요.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도 ‘미경’의 감정이 널뛰기를 하는 것도 다 이해가 돼요. 살면서 수만 번 정신줄을 놓다 보니, 연기를 포함해서 그냥 모든 걸 놓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렇게 고통을 겪고 바닥을 치고 나야, 또 연기가 한 뼘 자라니… 힘들면서도 ‘아! 이게 연기에 도움은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참….

연기는 비참함에 바치는 우아한 헌사가 될 수 있겠네요.

하하. 실제로도 저는 많이 비참해져봤습니다. 독해지기도 했고요. 너무 기가 막힐 때는 남한테 내 비참함을 전하면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개그맨들이 고통스러운 자기 삶을 웃음의 소재로 쓰는 게 이해가 되죠.

많이 힘드셨군요.

몇 년간 악재가 겹쳤어요. 사람들 때문에 받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는데, 가령 다리가 부러져서 병원에 가면 의사가 돌팔이인 식이었지요. 사람 때문에 배신감에 치를 떨다가 사람을 희망으로 일어서길 반복했어요. 그래서 지금 드라마가 남달랐어요. 극 중 배역이 제 분신처럼 느껴진답니다.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작가에게도 얘기했어요. ‘언니, 거짓으로 연기하지 않을게. 진심을 다할게.’

예술가시군요. 감정은 불에 델 것처럼 뜨거운데, 표현은 얼음처럼 차갑더군요.

아이참…, 그렇게 칭찬을 받으면 두려워져요. 업그레이드되는 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런 불안을 느끼고 긴장하고 있어야, 진이 빠지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연기가 성장하니….

워커홀릭인가요?

그런 면이 있어요.

지옥에서 한철을 보낸 소감이 어떠세요?

‘미경’이도 부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작가는 이 커플을 이혼시킬까 안 시킬까 아직도 고민 중이라지만.

스트라이프 시스루 트렌치코트는 아르케(Arche), 블랙 톱은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Calvin Klein Underwear), 팬츠는 YSL.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사랑에 대한 관점도 달라졌나요?

재미있는 게, 저는 남편의 내연녀인 혜진을 만나서 한 질문이, “너, 내 남편 사랑했어?”였어요. 그런데 혜진 남편은 불륜 사실을 알고 난 후 첫 질문이 “그놈이랑 잤어, 안 잤어?”예요. 남녀가 중요한 게 그렇게 달라요.

결혼 제도에 대해서 회의도 생기겠어요?

결혼에 대해선 그다지 좋은 생각을 안 했어요. 굳이 이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결혼을 해서 고통받는 사람도 많이 봤고, 이혼을 해서 힘든 사람도 많이 봤어요. 물론 저는 이혼을 안 했어도 그것에 버금가는 감정의 고통도 겪어봤죠. 독신주의자도 결혼주의자도 아니지만, 어쨌든 내 인생의 소울메이트는 꼭 필요해요.

‘청순하다’는 표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아직 청순한가요? 하하. 청순해서 민폐 끼치는 캐릭터는 아니에요. 다만 이미지에 여백이 있어서 연출자들이 색을 입히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해요.

체념과 포기, 분노와 열정… 수많은 감정 중 당신을 움직이는 감정은 무엇인가요?

열정이요. 엄마는 나약해진 저를 보고, “천하의 김지수가 웬일이니?” 하셨는데, 그때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하지만 전 결국은 강한 사람인 거 같아요. 바보 같을 때도 많고, 허우적거리고 질퍽대고 포기하고 싶도록 궁지에 몰리지만, 결국은 차고 올라와요. 저는 강해요. 과거에도 앞으로도. 지난 몇 년간 힘들었던 데 감사해요. 그래서 제가 울음도 깊어지고, 감정도 ‘찐’해졌어요. 연기 기술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에요. 얼마나 고통을 겪고, 어떻게 고통을 극복했느냐의 문제지요.

몇 년 전, 영화 <여자, 정혜>로 해외 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주목받았을 때, 평론가 정성일이 그랬지요. “김지수의 아름다움은 오래 묵어 숙성된 상처에서 터져 나오는 빛의 아름다움이다. 뒤늦게 영화에 데뷔한 김지수의 섬세하고 성숙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이라고. 인생이 끝없는 성장통의 연속이라는 데 동의하세요?

너무너무 동의합니다. 사실 제 개인사 자체가 거대한 트라우마입니다. 제 안에 고통과 상처는 인생의 베이스지요.

지금의 인생에 만족하세요?

제 인생에 가장 큰 보상은 ‘제 연기가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고 말해줄 때예요. 남자한테 얻는 기쁨도 그만 못하더라고요. 남자한테는 아예 뭘 기대하질 않죠. 하하.

혹시 마흔이 넘으면서 얻은 지혜인가요?

하하. 어릴 때부터 남자한테 기댄 적이 없어요. 커서도 남자 친구는 나의 경쟁 상대였죠. 나보다 잘되는 걸 시기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누구와 경쟁하세요?

나 자신과 경쟁하지요.

남자는 어떤 상대인가요?

여자로서 나의 자아가 강해졌으니, 남자에겐 훨씬 편하게 잘해줄 수 있어요.

멜로의 여왕이던 시절도 있었죠?

지금도 변함없어요. 하하. 착각이라 해도 사랑하는 그 순간이 좋아요.

무엇이 당신을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로 단련시켰나요?

아픔이요. 밖에서 보면 김지수가 뭘 저렇게 아팠을까, 의아해들 하시겠지만, 7년간의 연애와 이별 외에도 제겐 상처가 많아요. 30대도 좋았지만, 얼굴 라인이 좀더 처져도 40대가 더 좋은 건 그만큼 상처를 잘 버틴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서예요. 매일매일 이 감정을 잊지 말자, 그래요. 고통과 고난의 상황을 받아들이되, 잊지는 말자. 나는 평생 연기자로 살 거예요. 그런 것들이 나를 더욱 정련시킬 거라 믿어요. 혹독하게! 하지만 아름답게!

화보용 메이크업을 지우지 않은 채, 김지수는 낭랑하고 직설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했다. 지뢰를 밟고선 여자처럼, 과장이나 엄살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삶에 대해. 연기는 고통, 즉 인생이라는 호된 훈련의 증거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아마 나중엔 김지수의 눈물은 짠맛이 아니라 단맛이 날지도 모른다. ‘고마워요. 나에게 이런 감정을 알게 해줘서’라고 복화술로 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