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의 기술

연말 세일의 쇼핑 광기에 휩쓸려 의미 없는 물건들을 사들였다고 후회하고 있나? 세일을 공략하는 최종 기술은 지난 시즌이 아닌, 다음 시즌을 위한 아이템을 발견하는 것!

쇼핑 총액 최고 기록에 도전하는 건 이제 무의미하다. 어차피 쇼핑은 계속될 테고, 소비의 심리적 마지노선은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으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트 오브 쇼핑’ , 즉 쇼핑의 기술이다. “세일에 미친 군중에 휩쓸리기 전, 자신이 뭘 원하고 어떤 것에 꽂혔는지 숙고해서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 그것만이 광기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쇼핑욕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다.” 쇼핑에 대해 <데일리 텔레그라프>에 실린 문구는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쇼핑까지 골치 아프게 ‘학습’해야 한다면 인생의 쾌락이 하나 줄어드는 것과 같다. 자고로 쇼핑의 기술이란 경험을 통해 체득하는 것. 그렇다면 쇼핑 능력자들은 지난 연말 세일 때 무엇을 획득했을까?

“아일릿과 크로셰 장식이 잔뜩 들어간 주카 블라우스! 사랑스러운 복숭아 빛깔에 시스루 소재라 로맨틱 패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지. 올봄 컬렉션을 보니 피부가 비치는 얇은 소재(니나 리치)와 정교한 크로셰 디테일(버버리 프로섬)이 눈에 띄던데, 마침 실크와 면 혼방 소재라 봄과 여름까지 잘 입을 수 있겠더라!” 패션 유통 회사에서 일하는 Y는 하늘거리는 블라우스를 입고 출근했다. “좀 대조적인 느낌의 회색 진, 오벌 실루엣 코트와 함께 입었어. 초여름까지도 입을 작정이야. 아주 짧은 흰색 반바지 위에 느슨하게 걸치고 플랫폼 샌들을 신을까 생각 중인데, 어때? 캘리포니아 걸처럼 보이려나?” 쇼핑 고수 Y는 고티에의 스트라이프 티셔츠도 헐값에 팔리는 걸 보고 잠시 망설였지만, 국민 교복이 돼버렸기에(고티에인지 세인트 제임스인지 에잇세컨즈인지 구분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 구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는 게 일’인 바이어야말로 진짜 쇼핑의 대가라 칭할 수 있다. 가로수길의 멀티숍 ‘쿤 위드 어 뷰’의 여성복 바이어 이진영은 연말 쇼핑을 위해 국경을 넘나들었다. “세일 시즌 때 일본에 가서 포터의 백팩(포켓이 두 개 달린 고전적인 프라다 스타일)과 카무플라주 프린트 클러치를 장만했어요. 준야 와타나베의 패딩 다운 바이커 재킷도 아주 마음에 들어요. 요즘 날씨가 점점 추워져 코트보다 패딩이 훨씬 실용적인 데다 클래식한 디자인이잖아요.” 지난 시즌 부활한 백팩은 타미 힐피거나 몽클레르 감므 루즈, DKNY의 스포티한 컬렉션 외에 샤넬에도 등장, 시즌을 거듭할수록 주요 액세서리로 세력을 확장 중이다. 그녀는 쿤 위드 어 뷰 매장에서 자신이 바잉했던 MSGM의 핑크색 체크 패턴 크롭트 와이드 팬츠도 ‘접수’했다. “지난 시즌 펑크와 그런지 유행으로 대거 등장했던 체크 패턴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팬츠는 폭이 넉넉한 팔라초 팬츠와 발목을 드러내는 크롭트 팬츠가 대세죠.” 그러나 쇼핑 횟수와 소비 규모를 떠나 쇼핑에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몇 가지 패턴이 있다. 본인 외에는 차이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엇비슷한 티셔츠와 청바지만 계속 사대거나(“볼품없는 천 쪼가리 좀 그만 사!”), 신발장 구색 맞추기나 관상용으로 박제될 가능성이 90% 이상인 구두만 보면 이성을 잃거나(“계산대에서 본 이후로 신발들이 종적을 감추는구나”), 사고 또 사도 결국 주야장천 입는 것만 입는다는 것(“이러니 아무리 사도 입을 게 없다고 하지”). 그러나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터득한 고수들의 궁극적인 쇼핑 기술은 ‘앞으로 얼마나 실용적으로 입을 수 있는가’에 있다. 이 기술을 적용해 올봄 유행을 고려할 때 할인된 가격에 구입하면 좋을 지난 시즌의 세일 아이템을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크리스토퍼 케인의 자카드 카무플라주 아이템(봄여름 시즌 카르벤의 카모 못지않게 멋지다), 셀린이나 미우미우의 미디 스커트(스커트 길이가 다시 길어지고 있다), 기본 디자인에 충실한 알렉산더 왕과 스텔라 맥카트니의 기본형 봄버 재킷(이제 다소 지루해진 스타디움 재킷을 대신할 만하다), 폭이 넉넉해 여유로운 제이브랜드 보이프렌드 진(루이 비통을 떠올려보라) 등등.

세일 기간에는 정가로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는 디자이너 라벨을 사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SPA 브랜드에서 쇼핑할 때도 동일한 규칙이 적용된다. 로컬 브랜드 디자인실의 주니어 디자이너 E는 긴 세일에 들어간 자라에서 길이별로 세 벌의 스커트를 구입했다. “회색 네오프렌 소재 H라인 니렝스 스커트, 무릎 아래쪽이 팔락거리는 미디 스커트, 발목까지 내려오는 도트 패턴 롱스커트! 셀린의 재활용 가방 체크 패턴을 응용한 아우터도 엄청 많았지만, 그건 좀 아니다 싶었죠.” 이렇듯 미래가 없거나 앞으로 사그라질 유행을 비켜가는 것 역시 현명한 쇼핑 방법. 동료들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극강’ 쇼퍼홀릭인 <얼루어> 피처 디렉터는 얼마 전 적금 탄 돈을 온전히 쇼핑에 쏟아부었다. 특히 코트를 선택할 때 신중을 기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온통 이자벨 마랑 스타일의 둥그런 오버사이즈 코트뿐이었어. 보는 것도 지겨울 지경인 코트를 이제야 사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 멀티숍에서 베로니카 르로이의 쇼피스 코트를 발견해 정말 다행이었어.” 어깨 라인이 동그랗게 흐르는 남색 코트는 삼각 스카프 형태의 네크라인 장식과 포켓 디테일이 눈에 띄는, 꽤 독특하고 우아한 디자인이었다. “연말 쇼핑 주제는 ‘옷장에 없는 것을 구입하자’였어. 쭉 미니스커트만 입어왔는데 이번에 구입한 발목 길이 개더 스커트가 그렇게 편할 수 없었지. 봄 신상품이라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안 살 수 없었어.”

앞에서 언급한 내용 외에 쇼핑에서 실패하지 않는 또 하나의 팁은 가격표에 쓰인 숫자가 정확하게 두 배일 때도 여전히 사고 싶은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 단지 싸다는 이유로 구입한 물건은 결국 옷장 구석에 고이 쌓여 있다가 몇 시즌 후 ‘아름다운가게’로 직행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시장에 장 보러가듯 쇼핑 목록을 작성할 필요는 없다. 단지 두 번 세 번 생각할 여유를 갖는 것만으로도 쇼핑의 기술은 예전보다 나아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