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슬립온과 버켄스탁을 이을 슈즈

2016.03.17

by VOGUE

    슬립온과 버켄스탁을 이을 슈즈

    피비 파일로라는 패션 선구자를 만나 가파른 신분 상승을 경험한 버켄스탁과 반스 슬립온. 과연 2014년에는 또 어떤 신발이 쿨한 스타일의 정상을 밟게 될까.

    “2001년부터 2006년까지 클로에를 이끌었던 피비 파일로는 2008년 셀린에 입성 후 브랜드에 활력을 불어넣은 주인공으로 인정받았다.” 지난해 마지막 날, <뉴욕 매거진>의 패션 블로그 ‘더컷’이 전한 뉴스 한 토막. 셀린의 피비 파일로가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장’을 수상하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지금 영국 패션의 자존심으로 손꼽을 만한 디자이너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던 기자는 설명을 더했다. “그 높은 영예를 안게 된 진짜 이유는 일명 ‘퍼켄스탁(Furkenstock)’을 유행시킨 공로 덕분 아닐까?”

    살짝 농담이 섞였지만, 2014년 현재 패션계에서 피비 파일로의 가공할 만한 영향력을 함축한 한마디였다. 버켄스탁 샌들을 꼭 닮아 ‘퍼켄스탁’이라는 별명의 이 샌들은 2012년 9월 말 파리 포슈가 저택에서 열린 2013년 봄 패션쇼에서 처음 등장했다.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장식과 빨강, 노랑, 파랑 모피를 더한 슬리퍼는 즉각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보그 코리아>는 “버켄스탁 한 켤레로 아주 트렌디한 스타일이 완성됐다”라고 선언했고, 스타일닷컴은 “모피 장식의 위트 넘치는 이 요상한 신발이야말로 이번 컬렉션의 열쇠였다”고 기록했다. 열풍은 대단했다. 셀린의 100만원짜리 퍼켄스탁은 물론, 오리지널 버켄스탁까지 덩달아 인기가 치솟은 것. 한때 시대에 뒤떨어진 히피나 레즈비언들의 상징이기도 했던 이 슬리퍼는 셀린 덕분에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30% 이상의 매출 신장이 그 증거다. “버켄스탁이 새로운 ‘쿨함’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전 세계 신발에 관한 모든 뉴스를 취급하는 <풋웨어 뉴스>(<보그>가 속한 콘데 나스트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제화업계 신문)는 2013년의 브랜드로 버켄스탁을 꼽으며 이렇게 기록했다. 그리고 버켄스탁 스타일의 인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영하 20℃까지 내려가는 살인적 추위에도 1월 초 열린 뉴욕 프리폴 컬렉션 프레젠테이션 장소에 나타난 슈퍼 스타일리스트 카밀라 니커슨은 도톰한 오트밀 컬러 양말에 셀린의 버켄스탁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피비 파일로의 영향력이 어디 퍼켄스탁뿐일까. 2013년 가을 시즌을 위해 셀린에서 선보인 반스의 슬립온 스타일 스니커즈 역시 85만원이 넘는 가격에도 불구,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멋에 죽고 멋에 사는 패션 중독자들에게 오리지널 반스 슬립온의 20배에 달하는 가격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피비 파일로라는 세련된 프리즘을 통과하는 순간, 보더들이 신던 슬립온은 가장 쿨한 신발로 돌변했다. 게다가 오매불망 셀린 남성복을 꿈꾸던 남성 셀린 팬들은 이 슬립온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발이 작다면 가능한 일). 덩달아 반스를 비롯, 각종 슬립온의 인기가 치솟았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2014년에는 또 어떤 ‘컴퍼트 슈즈’가 버켄스탁과 슬립온에 이어 킬힐과 플랫폼 힐에 지친 여자들의 발을 위로하게 될까? 미국 <보그>는 2014년 유행 아이템들을 꼽는 기사에서 낯선 단어를 언급했다. “2013년이 버켄스탁의 해였다면, 2014년은 ‘테바(Teva)’ 샌들의 해가 될 것이다!” ‘Teva’를 구글링해보면 곧장 ‘테바’라는 샌들 브랜드 사이트로 연결된다. 90년대 중반 ‘스포츠 샌들’이란 이름으로 대유행한 추억 속 샌들의 원조 브랜드가 테바다. “1984년 그랜드캐니언의 젊은 계곡 가이드가 세계 최초로 스포츠 샌들을 개발하며 제화업계에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사이트를 뒤지다 보면 테바 샌들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플립플랍에 나일론 소재 앵클 스트랩을 더한 것이 바로 테바의 시작이다.

    익숙하긴 하지만 결코 패셔너블하다고 볼 수 없는 기능성 신발이 왜 <보그>가 꼽은 2014년 신발이 될 수 있었을까? 사실 테바 샌들의 재해석은 이미 라프 시몬스와 랑방 남성복 컬렉션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여성복에서는 2003년 봄 발렌시아가 이후 처음이지만, 올봄 여러 디자이너들이 푹 빠진 스포티즘 스타일에선 바로 그 테바 샌들의 하이패션 버전이 눈에 띈다. “90년대 아이콘인 벨크로와 고무 장식 샌들은 과거에 아웃도어를 즐기는 이들만 신었다. 그러나 마크 제이콥스와 프라다의 2014년 봄 컬렉션에서 좀더 장식적이고 재해석된 버전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스트리트 스타일로 인기를 끌 전망이다.” 미국 <보그>의 품평. 아닌 게 아니라, 아크네 스튜디오, 지방시, 드리스 반 노튼, 질 샌더, 마르니, 등도 그랜드캐니언을 뛰어다녀도 될 만큼 스포티한 샌들을 잔뜩 선보였다. 물론 각자 스타일은 조금씩 달랐다. 프라다와 제이콥스가 원형 테바 샌들에 유색 보석 장식과 컬러를 더했다면, 지방시와 아크네 스튜디오는 보다 캐주얼한 멋을 더했다.

    “패션 인사이더들이 편안한 신발의 새로운 버전을 기대하면서 아웃도어 스타일의 테바 브랜드가 유행의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신발에 관한 모든 트렌드를 꿰고 있는 <풋웨어 뉴스> 역시 2014년 브랜드로 테바를 콕 찍었다. 벌써부터 새로운 유행으로 갈아 신은 멋쟁이들도 등장했다. “올봄엔 편안함이야말로 ‘쿨’하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미국의 쇼핑 매거진 <럭키> 편집장 에바 첸(안나 윈투어가 지목한 차세대 스타 에디터)은 최근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이 구입한 테바의 오렌지색 ‘무쉬 유니버설’ 네오프렌 모델 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적었다. “90년대 테바를 생각하면 안 되죠. 요즘 테바에선 네오프렌 덕분에 서핑 분위기가 나죠. 그게 중요합니다.” 올해 30주년을 맞은 테바 역시 버켄스탁처럼 제2의 전성기를 누릴 가능성이 크다. 내친김에 그들은 베스트셀러 모델에 조금씩 변화를 준 ‘오리지널 팩’ 시리즈를 기획했다. “클래식한 ‘유니버설’ 샌들에 가까운 디자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과연 테바가 버켄스탁의 뒤를 이을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올봄 셀린 캣워크에 등장한 스웨이드 소재 스트랩 장식 샌들은 분명 테바 샌들과 꼭 닮아 있다.

    버켄스탁에 이어 신분 상승을 노리는 ‘쓰레빠’는 이외에도 또 있다. 아디다스의 삼선 장식 슬리퍼와 나이키의 로고 장식 슬리퍼가 그것. “한때 래커룸의 필수품이 이제 스트리트의 쿨한 아이들과 그라임스가 신는 신발이 됐다. 그리고 삼촌 쇼에 나이키 슬리퍼를 신고 오면서 가장 어리고 스타일리시한 스트리트 스타로 떠오른 알렉산더 왕의 조카 덕분에 패션 위크도 장악했다.” <뉴욕타임스>는 스포츠 브랜드들의 슬리퍼에 손을 들어줬다. 전국 고교생들과 고시생들의 유니폼이었던 이 슬리퍼가 과연 신분의 수직 상승을 경험하게 될까? 패션 디자이너들의 ‘재해석’ 작업이 이어지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 맨 먼저 손을 내민 클로에의 클레어 웨이트 켈러는 리조트 컬렉션에서 고무 소재 슬리퍼를 선보였다. 여기에 J.W. 앤더슨, 뉴욕의 이든, 탑샵 유니크, 조셉, 필로소피 등이 넓은 밴드로 발등을 덮은 슬리퍼를 디자인했다.

    새로운 세대를 위한 하이패션 버전의 ‘쓰레빠’를 구경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90년대를 추억하게 된다. 쿨함의 결정체였던 헬무트 랭이 선보인 반뼘 정도 너비의 밴드 장식 슬리퍼를 닮은 그들. 특히 J.W. 앤더슨의 슬리퍼는 랭을 꼭 빼닮았다. 그렇다면 90년대 학창 시절을 떠올리던 여성들은 과연 네타포르테를 통해 840달러를 지불하고 클로에 슬리퍼를 구입하고 싶을까? 투자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진다면, 인터넷 최저 가격 1만9,900원의 나이키 ‘베나시’ 슬라이드부터 구입하는 게 어떨까. 1월호 영국 <보그> 리조트 화보 속 모델 프레야는 모든 룩에 높은 하이힐 샌들 대신 베나시 슬라이드를 신고 등장했으니 말이다. 셀린과 캘빈 클라인 등의 미니멀한 의상에 매치한 이 로고 슬리퍼는 킬힐보다는 분명 쿨해 보였다.

    올봄 대세가 된 편한 신발의 마지막 후보는 미네통카(Minnetonka)다. 뮤지컬 무대를 보는 듯 패션 극장전을 선보인 마크 제이콥스는 여러 버전의 모카신들을 재해석했다. 2000년대 중반 케이트 모스, 시에나 밀러 등 패셔니스타들을 통해 전성기를 누린 모카신이 다시 패션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 마크가 빅토리아풍 드레스에 미네통카 스타일의 블랙 모카신을 매치한 이유는 이랬다. “이브닝 드레스에 싸구려 스웨이드 모카신을 신고 거리를 거니는 소녀는 어떨까, 라고 생각했죠.” 즉흥적으로 떠올린 아이디어들의 콜라주를 즐기는 마크의 관심 대상 중 하나가 바로 모카신인 셈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는 안 되겠죠. 그래서 작은 시퀸 장식들로 자수를 넣고 새로운 컬러로 변형시켰죠.” 지난해 9월, 폭우가 쏟아지던 밤 마크 제이콥스 쇼를 지켜본 관객들이라면 다들 자신의 신발장 구석에 처박혀 있을 미네통카를 떠올리며 쇼장을 나섰을 것이다.

    버켄스탁과 반스 슬립온의 바통을 이어 여자들의 발에 편안함을 선사할 신발 후보는 이렇게 세 가지다. 서핑 분위기를 더한 테바 샌들, 아디다스와 나이키의 슬라이드, 그리고 미네통카의 모카신. 한마디로 캐주얼한 과거 신발들이 하이패션과 만나 신분 상승을 경험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킬힐, 아령보다 무거운 플랫폼. 이런 신발들은 확실히 그것들보다는 쿨해 보인다. 이번 시즌, 테바와 미네통카를 모두 선택한 마크 제이콥스가 선택의 배경과 원칙에 대해 직접 전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아이템을 살짝 바꾸는 거죠. 그거야말로 새롭고 모던한 방법입니다. 익숙한 것을 바라본 후, 바꾸고, 전혀 다른 배경에 그걸 밀어 넣어보는 것!”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손기호
      기타
      kim weston arnold, james cochrane,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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