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의 법칙

영화 <관능의 법칙>에 출연한 ‘국보급’ 여배우 조민수, 엄정화, 문소리가 <보그>카메라 앞에서 우아한 레이디로 변신했다. 커튼을 열고 그녀들만의 멋진 교감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엄정화의 골드 롱 드레스는 구찌(Gucci), 메탈 슈즈는 유나이티드 누드(United Nude),조민수의 비즈 장식 홀터넥 드레스는 미스지 콜렉션(Miss Gee Collection), 오픈토힐은 구찌. 문소리의 골드 슬리브리스 롱 드레스는 발맹(Balmain), T 스트랩 슈즈는 살바토레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여러분은 <위대한 개츠비>의 닉 캐러웨이와 같은 관찰자 시점에서, 웨스트에그의 화려한 대저택에서 매일 밤 열리는 굉장한 파티와 얽히고설킨 애정의 삼각관계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세 여배우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금기, 파격, 그리고 서로를 거울처럼 반사하는 세 여자의 육체의 활력과 꿈틀거리는 마음의 정력의 목격자로. 조민수, 엄정화, 문소리. 유대감과 경쟁심이 교차하는 세 여배우는 40대 여자의 사랑과 성을 담은 영화 <관능의 법칙>에 함께 출연했다. 그녀들이 나이를 밝히는 걸 좋아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조민수는 49세, 엄정화는 44세, 문소리는 40세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로부터 <관능의 법칙>이 2014년 상반기 야심작이 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실제로 조민수, 엄정화, 문소리라는 40대 톱 여배우들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느껴지는 생동감은 놀라웠다. 육체의 이미지가 신화적으로 과장돼온 대한민국 연예계에서 그녀들이야말로 온몸으로 필름을 관통해온 진정한 육체파 여배우가 아니던가!

그녀들 모두 영화 시장에서 거래가 불가능한 자기만의 관능의 주식을 갖고 있다. 영화 <피에타>에서 조민수의 육체는 활어처럼 퍼덕거렸다. 죄의식의 저 깊은 곳을 탐험할 땐 청계천 공구 상가 이곳저곳을 심해의 뱀장어처럼 미끄러져 갔고, 수면 위로 칼 같은 정체를 드러낸 후엔 공사장 모래 무덤 속에서도 상어처럼 요동쳤다. 죄와 복수, 회개와 용서가 조민수라는 육체로 생생하게 구현됐다. 김기덕을 수렁에서 구해낸 개가였고, 조민수의 발견이었다.

문소리를 보면 선악과를 따 먹은 ‘이브’가 생각난다. 그녀의 육체에선 겨울 사과 향기가 난다. <오아시스>에서 장애인 연기로 온몸을 비틀고 연기할 때나, <바람난 가족>에서 두 다리를 벌리고 자위 자세를 취할 때를 떠올려보라. 이창동과 임상수 감독이 문소리의 육체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며 새 시대의 메시지를 전하는 순간, 그녀의 육체는 처녀림처럼 스크린 앞으로 육박해왔다. 그녀는 원초적이고 돌발적이며, 순진하지만 두려움이 없다. 금기를 넘어서는 용기를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자기 구역과 본분에 있어 모범생처럼 결벽적이다.

엄정화의 육체는 20년 동안 스테디셀러였다. 무대 위에서 대한민국 대표 쇼걸로 ‘배반의 장미’를 부를 때나, 자기 자신을 연기한 영화 <댄싱퀸>에서 절박한 가수 지망생을 연기할 때나, 그녀는 누구도 표절하지 않는다. 엄정화는 매번 새롭게 화장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30대 시절 권칠인 감독과 함께 했던 <싱글즈>에서 고 장진영과 새로운 성적 태도를 보여주었던 그가 <관능의 법칙>으로 40대 클라이맥스를 열고 있다.

드디어 <보그>가 마련한 ‘관능 파티’를 위한 첫 번째 통과제의가 시작됐다. 그녀들이 2층 메이크업실과 1층 헤어 룸을 오가며 변신하는 사이, 우리는 세트와 소품을 점검했다. 파리의 물랭루주 클럽에서 공수한 듯한 커다란 왕관과 댄서용 봉과 SM 도구용 수갑 같은 것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들의 눈썹을 탈색하며 금기를 넘어선 순간! 문소리는 3분 만에 인상을 바꾸는 이 놀라운 화보용 도구 앞에서 살짝 겁먹었고, 엄정화는 경험자답게 미소를 지었다. 조민수는 눈썹 탈색은 물론이거니와 변신을 위해서는 머리카락이라도 밀어버릴 태세다. 조민수는 지금 흡수력이 좋은 스펀지 같은 몸을 갖고 있다. “다들 어릴 때 피었다 지는데, 난 40대에 국제적인 로또를 맞았어요. 이게 웬 복인가 싶어. 김기덕 감독이 좀 잘난체를 해서 그렇지, 그분 시나리오가 사실 영화보다 더 좋아요. 우린 서로가 서로를 장악했지요. 에너지, 그건 정말 경험하지 못한 낯선 에너지였어요.” 윤여정과 이미숙을 제외하고 이렇게 거침없는 여배우는 처음이다. “난 내가 후배 여배우들에게 희망이 됐으면 좋겠어요. 30대가 돼 역할이 없어 실의에 빠진 후배들한테 내가 하는 말은 ‘그냥 견뎌라!’예요. 대신 ‘추하게 견디지 말고 웃으면서 견뎌라. 그래야 진짜 기회가 왔을 때 얼굴이 추해지지 않는다.’ 난 어릴 때부터 섹시하단 얘길 많이 들었어요. 살결이 검고 탄력 있었거든. 지금도 카메라 앞에 설 때, 맘껏 놀 수 있는 건 20대 시절 잡지 모델로 즐겁게 일한 경험이 있어서예요. 난 늘 업그레이드되고 있어요. 늦게 성장할수록 나에 대한 호기심이 끝이 없거든.” 조민수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메이크업을 끝내고 보라색 단발 가발을 쓴 조민수는 네 남녀의 욕망이 질펀하게 얽히는 영화 <클로저>에서 스트립 댄서 역을 맡았던 어린 나탈리 포트만을 연상시켰다.

한편 문소리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에 나오는 우마 서먼처럼 냉담한 매력을 풍겼다. 조명 앞으로 나오는 걸 쑥스러워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자, 스태프들은 비주얼 쇼크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생애 최초로 보디수트를 착용한 채 편안해 보이려고 애쓰는 문소리와 달리, 엄정화에게 보디수트는 트레이닝복만큼이나 익숙하다. 엄정화는 늘 그랬듯이 엄정화가 보여줬던 과거와 현재의 최고치를 갱신한다. ‘배반의 장미’나 ‘포이즌’을 부를 때의 미니멀하고 SF적인 매력에 동물성의 입체적인 눈빛마저 더해졌다.

텁텁하고 눅진한 음악이 그녀들의 뜨거운 입김을 타고 올라왔다. 조민수가 스프링 침대 위에서 사자처럼 으르렁거리자, 엄정화는 풍만한 가슴 앞으로 채찍을 바짝 들어 올렸다. 문소리는 뾰로통한 사이보그 같았는데, 그런 기계적인 무심함이 오히려 더 야해 보였다. 그녀들의 암표범같은 실루엣이 조명 아래 선연하게 빛났다. 온몸의 신경들이 끊임없이 불이라도 지펴 달궈놓은 듯, 눈부신 생동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40대의 육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어깨선이 드러나는 레이스 롱 드레스는 디올(Dior), 브라톱은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인간의 욕망과 절제는 단단한 바위에 기초할 수도, 축축한 습지에 기초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40대쯤 되고 나면 더 이상 세상의 윤리적 잣대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100km 밖의 흔들림까지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그녀들은 카메라 앞에서 탄성을 감지하는 고도로 발달된 촉수를 갖고 있다. ‘나는 여배우다’라는 그 낭만적인 정체성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탁월한 천부적 재능이다.

“영화에서처럼 저는 결혼한 여배우예요. 그리고 부부끼리는 솔직할 수밖에 없죠. 제가 요즘 드라마다 영화다 작품을 많이 하니까 남편(장준환 감독)은 ‘문소리 씨, 뭐가 불안해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럼 여배우가 당연히 불안하죠. 나 정도만 해도 안정적이고 덜 불안한 거 같은데요?’ 오히려 저는 남편이 더 불안하거든요. 그이는 평소엔 밝고 느긋하지만, 영화(<지구를 지켜라> <화이>)로는 어둠을 너무 깊이 파고들어요.” 얘기를 할 때 문소리는 긴 머리카락의 무게를 따라가고, 뭔가를 강조하듯 두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고 종종 목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폭발할 것 같은 웃음을 터뜨린다. 남들이 하면 재수 없거나 자조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문소리가 하면 자주적이고 유머러스한 화제로 업그레이드된다. “이 영화의 제목이 뭐였는지 아세요? <관성의 법칙>이었답니다. 원래 주인공들의 나이도 낼모레 오십을 앞둔 여자들이었지요. 그냥 나이에 따라 관성대로 살아가는 중년 여자들이었다가 <관능의 법칙>으로 반전된 거예요. 나이도 40대로 젊어졌죠.” 문소리는 출산 이후 한마디로 열심히 달리고 있다. 그녀의 커리어가 확고해졌을 때 작가주의 영화에서 대중 장르 영화로 전환한 것을 두고 그녀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대신 문소리는 요즘 다양한 실험으로 자신을 혹사시키는 중이다. 연말엔 중앙대학교 대학원 과정에서 단편영화 연출까지 했다. “영화 캐릭터가 문소리예요”라고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일종의 ‘자기 객관화’인 셈이다. “제가 연출도 하고 연기도 했어요. 저 자신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거기서 유머가 발생하더군요. 아주 빵빵 웃음이 터졌어요.” 그녀가 조금만 더 용기를 낸다면, 우리는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문소리가 감독한 <문소리>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미명하에 미화되는 진부한 감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마디로 문소리는 영화계의 진정한 풍류 가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실제로 예능 프로그램인 <힐링캠프>에 출연해서 ‘아리아리랑’ 흥겨운 판소리 판을 벌이며 춤까지 췄다.

반면, 왠지 모르게 오늘 엄정화는 깨지기 직전의 유리 구슬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탄탄한 복근을 가리키면서도 ‘이 뱃살 좀 보라’고 징징댔다. “조민수와 문소리를 보세요. 너무 솔직하고 너무 매력적이죠. 둘은 완벽한 느낌이에요. 매 순간 악착같고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그녀들에 비해 저는 허점이 많아요.” 문소리가 ‘엄정화의 엉덩이가 얼마나 탱글탱글한지 보라’며 거들어야 할 정도로,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가혹했다. 엄정화는 그냥 섹시한 것으로는 만족이 안 됐다. 그녀는 더 새로운 섹시함을 원했다. 엄정화의 속내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한국의 마돈나로 무대 위를 점령했던 디바 시절의 드라마틱한 흥분 상태를 그리워하며,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수와 저는 늘 한 몸이었는데, <싱글즈>부터 사람들이 배우로 봐주기 시작했어요. 그 뒤로 <미스터 로빈 꼬시기>며 <오로라 공주>며 운 좋게 장르를 잘 타고 왔지요. 그리고 <관능의 법칙>을 촬영한 지금이 저에겐 1막 2장이에요. 또 다른 문이 열린 셈이랄까요. 지금이 더 많은 도전과 더 많은 자신감이 필요한 시점이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음악적인 충동과 속삭임 같은 것들이 배어 있었다. 흘러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다시는 연주되지 않을 음정들의 배열 같았다. 빛나는 눈동자와 분홍색으로 빛나는 입, 그 눈부신 광채로 엄정화의 얼굴은 처연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롱 드레스로 갈아입은 세 여배우가 옷자락으로 스튜디오 바닥을 쓸고 다니는 동안 쉴 새 없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났다. 옷을 갈아입더니 성격까지 달라진 것 같았다. 뒷골목 쇼걸에서 보여주던 생기는 어느새 인상적인 우아함으로 변해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 은신한 채 은빛 후춧가루가 뿌려진 별밭을 응시하고 있었다(조민수가 두 여배우에게 소파 위에 겹겹이 몸을 겹쳐 누우면 어떻겠냐는 놀라운 제안을 했지만, 어떤 여배우가 밑에 깔린 레슬링 선수가 되고 싶겠는가!). 스포트라이트 아래 여유 있는 웃음과 드레스 자락을 늘어뜨린 안정된 자세로 미루어볼 때, 영화제 레드 카펫의 일원으로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녀들이 누군가. 문소리는 가장 먼저 2002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오아시스>로 신인여우상을, 조민수는 베를린 영화제 그랑프리 작품인 <피에타>로 2012년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그리고 엄정화는 최근 <몽타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조민수가 시상식장에서 그녀에게 트로피를 건넸다).

두 명씩 짝을 지어 더블 컷을 찍을 때, 그녀들의 케미스트리는 절정에 달했다. 엄정화와 조민수는 서로 얼굴의 예쁜 생김새를 직접 느껴보겠다는 듯 두 손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감쌌다. 뒤에서 부둥켜안은 자세는 에로틱하고 아름다웠다. 모니터에 떠오른 사진은 숨막힐 정도로 부드러운 친밀감을 담고 있었기에, 엄정화의 매니저와 영화사 홍보 담당자는 우려를 표시했다. “너무 레즈비언 같지 않나요?” 오! 앞에서 얘기하지 않았던가. 오늘의 ‘관능 파티’는 금기를 넘어선 ‘성적 판타지’를 제공할 거라고. 다행히도 배우들은 그 사진을 좋아했다. 조민수는 특히 ‘예쁘게’ 나온 안전한 사진보다 ‘자신이 보지 못했던 표정’을 발견하면 탄성을 질렀다. 미간이 괴상하게 일그러져 있거나, 몸이 활처럼 휘어진, 심지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 사진 같은 것들.

엄정화가 입은 그물망 드레스와 브리프는 앤디앤뎁(Andy&Debb). 조민수의 메시 롱 드레스는 하우앤왓(How&What).

촬영이 이어지는 짬짬이 그녀들과 대화를 이어갔다. 어리고 민감한 시절부터 조민수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 “니가 마시기 싫다고 침 뱉은 물을 니가 마셔야 할 때가 있을 거다.” 그 말을 들은 조민수는 가능하면 모든 것에 대해 판단을 미루는 버릇이 생겼다. “남 ‘욕’을 하면, 그 기준대로 제가 욕먹게 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죽을 때 저한테 욕먹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즉흥적으로 아무 말이나 떠들어댈 때조차 조민수의 말투엔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격정이 흘러넘쳤다. “사실 저는 육감적인 영화를 안 좋아해요. 화면에 살덩이가 나오면 움찔움찔하죠. 대신 아프리카 랩, 라틴 음악을 들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흥분돼요. 누구나 성적인 욕구는 있죠. 가임기 여성이라면 살과 살이 닿는 거, 그런 거 당연히 그리울 거예요. 저는 촬영장에서 이렇게 맘껏 놀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요. 온몸이 땀에 젖을 때 손끝까지 찌릿찌릿하다고요.” 이렇게 맹렬한 움직임으로 자기 에너지를 과시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우리는 찬사를 보내게 된다. 그녀는 <러브 액추얼리> <죽은 시인의 사회> <쉰들러 리스트> 같은 휴머니즘 영화를 좋아하고, 대본은 ‘통으로’ 외워가는 게 습관이 됐으며, 요즘엔 여자들의 직업군이 다양해져서 연기할 맛이 난다고 했다. <모래시계>에서 폭풍처럼 질주하는 고현정의 반대편에서 소나무처럼 정결한 하숙집 여자를 연기했던 조민수, <불꽃>에서 이영애의 불꽃같은 사랑에 품위 있게 대적하는 조강지처 여의사를 연기했던 조민수, ‘부러지면 부러졌지 휘어지진 않는다’고 코너에 몰릴 때조차도 ‘자기다움을 잃지 않았다’는 조민수가 여기 있다.

불현듯 지구 반대편에 살다가 파티가 시작된 줄도 모르고 찾아온 마지막 손님처럼, TV 연예 방송의 리포터가 촬영을 끊고 그녀들을 불러 모았다. 리포터는 잔뜩 긴장한 채, 누가 더 섹시한가요, 라고 물었다가 “누구나 다 합당한 개성이 있다”는 논지로 조민수에게 ‘쫑코’를 먹었고, 앞뒤가 안 맞는 엔딩 멘트로 문소리에게 발음 교정을 받았다. 리포터가 권칠인 감독에 대한 뒷담화를 요구하자, 그녀들은 입을 맞춘 듯 말했다. “우리 감독님이 참 복이 많지요.(웃음)” 그제야 자기 세계가 확고한 40대 여배우들의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이 대단히 버거운 일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 문소리는 이미 <바람난 가족>에서 옆집 남자 고교생 봉태규와 자족적인 섹스를 했고, 엄정화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결혼 따로 연애 따로인 급진적인 유부녀 생활을 했다. “이 영화는 <바람난 가족>처럼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진 않아요. 좀더 말랑말랑하다고 할 수 있죠.” 문소리가 명랑하게 대변했다. “우리는 함께 고민했어요. 관객들이 정말 40대 여자들의 리얼 스토리를 원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원할까? 결국 약간의 판타지에 공감, 위안, 엔터테이닝이 될 요소를 섞었지요.”

딸의 눈치를 보며 연애하는 싱글맘 역할을 맡은 조민수는 ‘사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삶은 지나가는 시간일 뿐… 또 살아진다는 게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죠.” 엄정화는 <관능의 법칙>에서 “쟤가 내 애는 아니잖니?”라고 할 정도의 도발적인 연애를 한다. “영화 속에서 저는 열다섯 살 연하 남자와 사귀거든요. 결국 나이 차이 때문에 이별을 결심하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지금 좋다면, 왜 굳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앞일을 걱정해서 헤어질까?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갈 때까지 가보면 안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세 번째 ‘배드 걸’ 컨셉을 위해 여배우들이 메이크업실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밤이 으슥해져 있었다. 목이 쉬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지친 엄정화에게 문소리가 “언니! 끝나고 맥주 한잔하자”고 부추겼다. “연두 보러 가야 하지 않아?” 엄정화가 순진하게 되물었다. “이미 자고도 남을 시간이야. 힘들어죽겠는데, 너무 목이 마른 거 있지?” 행어에 걸려 있는 100여 벌의 옷과 장신구와 구두 사이에서 정신이 혼미해지다가도, 문소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행복해진다. 문소리는 30개월 된 딸아이 연두 이야기에 눈을 빛냈다. 피터팬 어린이집에 입학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어서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꼬마 아가씨 얘기로 실내가 잠시 훈훈해졌다. 엄정화는 요즘엔 아침에 커튼을 열고 강아지를 안을 때, 혹은 설거지를 하다가도 문득문득 행복해진다고 했다. 조민수는 잠시 영화 얘기에 열을 올렸다. <살인의 추억>에 이어 <변호인>을 보고 송강호의 연기에 반했다거나, <신세계>의 황정민, <관상>의 이정재를 보면 너무 좋아서 배꼽까지 찌릿찌릿해진다고. <관능의 법칙>은 남자 영화 세상에 던져진 유일한 여성 영화라고. 그래선지 조민수는 몇 개의 타이어가 무심하게 놓인 스테이지 앞에 서자, 뮤지컬 <그리스>의 남자 주인공처럼 껄렁한 포즈를 취했다. 날렵하고 저돌적인 발놀림으로 움직이다 검정 배기 팬츠가 맘에 들지 않자, 가죽 바지로 갈아입었다. 문소리는 검정 쇼츠와 아방가르드한 재킷을 입고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가만히 카메라를 응시했다. 날카롭고 거친 기운이 공기 속으로 훅 하고 스며들었다.그들 모두가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의 멋진 모델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일 에디터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배드 걸’ 컨셉은 여배우 들이 여러 번 다른 의상을 요구하면서 약간 뒤죽박죽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드라마틱한 쇼걸 차림을 한 엄정화가 카메라 앞에 다리를 쩍 벌린 채 섰다. 휘날리는 드레스 자락의 여성적 우아함도 그녀가 지닌 육체의 엄청난 힘을 숨기지 못했다. 싸이하이 부츠는 터질 듯 부풀어 올라 허벅지 위쪽까지 팽팽했고, 손목을 교차해서 포즈를 취할 때마다 어깨 위에 걸친 재킷이 움찔거렸다. 그녀의 연기력은 실로 대단했다. 세심하게 묶은 머리를 하고 나타나서 뭔가 단단한 결심을 한 눈빛으로. 자기 확신에 도취된 나머지, 그녀는 타이어 위에서 마치 지구를 정복한 듯 보였다. 엄정화를 끝으로 모든 촬영이 끝났다. 호시탐탐 배우들을 염탐하던 방송국 촬영 스태프들도 모두 돌아간 뒤였다.

조민수, 엄정화, 문소리… 파티의 주인공이었던 그녀들마저 하나둘씩 포옹을 하고 떠나자, 무시무시한 적막이 밀어닥쳤다. 정오에 시작한 촬영이 새벽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그녀들이 발산했던 에스트로겐이 스튜디오 안에 흥건하게 고여서 방금 전 여기서 벌어진 일들이 희미하고 몽롱한 꿈 같았다. 그녀들의 열정에 비하면 에디트 피아프나 마돈나의 노래도 잠시 정박했다 떠나가며 울리는 뱃고동 소리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