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꾸뛰르 란제리

2016.03.17

by VOGUE

    꾸뛰르 란제리

    속옷 시장의 불모지 같은 국내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유럽산 란제리가 속속 입성하고 있다. 란제리의 꾸뛰르급으로 칭할 만한 럭셔리 란제리의 존재 이유.

    섬세한 자수로 완성된 뷔스티에는 라 펠라(La Perla).

    시작은 고래 뼈로 만든 코르셋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버슬 스커트가 유행하면서 여자들이 금과 자수로 장식된 화려한 코르셋을 선호했고, 프랑스 혁명 이후엔 사치품으로 인식돼 잠시 사라졌다. 하지만 패션은 미다스의 손처럼 무엇이든 과거로부터 끌어올 수 있는 법. 무슈 디올의 뉴룩과 함께 다시 코르셋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 여자들이 매일 애용하는 브래지어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1910년 미국 사교계 여성인 메리 야콥스가 이브닝 드레스에 코르셋이 비치는 것을 우려해 얇은 천 두 장을 묶어 가슴 부분에 덧댄 것이 브래지어의 시작이었다.

    화려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지금의 유럽 란제리 시장은 백화점 한 층을 전부 란제리 코너로 꽉 채울 정도로 규모도 크고 브랜드 수도 엄청나다. 주변 지인들도 대부분 유럽 여행이나 출장길에서 구입해 고급스러운 럭셔리 란제리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곤 한다. 그리고 몇 년 전 서울 청담동에 과감하고 파격적인 란제리 브랜드 아장 프로보카퇴르가 처음 문을 열 당시, 섹스용품 숍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사실 레이스로 뒤덮인 뷔스티에와 아찔한 가터벨트는 쇼윈도에 걸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야릇한 흥분을 자아낸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아장 프로보카퇴르(Agent Provocateur)는 94년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아들인 조셉 코레 부부에 의해 탄생된 속옷 브랜드, 복식사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속옷 형태를 기본으로 한 팜므 파탈적인 이미지와 파격적인 디자인이 특징이다. “아무래도 매장 특성상 여성들이 주요 고객입니다. 브래지어와 팬티 세트 가격은 30만~40만원대부터 시작하지만, AP의 클래식 라인은 가격대가 좀 높은 편입니다. 밸런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 등 연인들의 특별 이벤트가 있는 달이면 뷔스티에와 가터벨트의 판매율이 높아집니다.” B.P를 아찔하게 가리는 소품, 수갑, 채찍 등 SM적인 아이템도 물론 볼 수 있다. 또한 작년에 론칭한 라장(L’agent) 라인은 연령대와 가격을 확 낮춘 세컨드 브랜드. “아장 컬렉션과 디자인은 같고 소재만 다르게 선보입니다. 아장 가격의 50%로 20대 젊은 여성들이 주로 구입하죠.”

    아장 프로보카퇴르의 성공적인 서울 상륙에 이어 이태리를 대표하는 꾸뛰르급 란제리 브랜드 라 펠라(La Perla)도 도산공원 앞에 오픈했다. 장인 정신의 집약체로 불리는 라 펠라 란제리는 60년 전 코르셋 메이커인 아다 마조티(Ada Masotti)에 의해 볼로냐 공방에서 출발, 밀라노의 몬테 나폴레오네에 첫 매장을 오픈했다. 이후 본고장 이태리 여자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패션 아이템, 전 세계 럭셔리 란제리 브랜드의 대명사가 됐다. “이미 해외에서 구입해본 경험이 있는 고객들의 웨이팅이 많습니다. 브래지어 세트 가격이 50만원이 넘는데도 판매율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어요. 뷔스티에는 100만원대부터 시작해 200만원을 넘는 고가 제품도 있습니다.” 특히 전통 방식으로 제작한 클래식한 뷔스티에와 과감하게 레이스로만 된 얇은 브래지어와 브리프 세트는 라 펠라의 베스트셀러 아이템이다.

    꾸뛰르급 라벨을 단 또 하나의 브랜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란제리 브랜드 오바드(Aubade). 1875년 버나드 박사에 의해 의료용 코르셋으로 시작한 브랜드로, 10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특히 섬세한 자수 기법과 기름종이처럼 얇고 부드러운 레이스가 특징. 오바드의 레이스는 프랑스 칼레(Calais)에서 수작업으로 생산되는데, 제작 기간만 2년이 걸린다. 여성의 은밀한 신체 부위를 컬러풀하고 화려한 자수로 수놓은 오바드 레이스 속옷은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함 그 자체다.

    이처럼 지금 서울 한복판에는 유럽 의상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클래식한 뷔스티에, 야릇한 가터벨트, 레이스 밴드와 자수 브래지어가 쇼윈도를 장식 중이다. 실용성과 기능성은 떨어지고 세탁과 관리까지 까다로운 꾸뛰르 란제리가 국내 여성들에게 어필하는 이유? “우리나라는 오랜 유교 사상으로 인해 여자 속옷을 거론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는 분위기였죠. 속옷에 관한 한 한없이 보수적이던 시기를 지나, 또 캘빈 클라인이 주도하던 미니멀하고 스포티한 속옷 시대를 지나 이제 란제리 선택의 폭이 넓어졌어요. 남자들도 자유롭게 속옷 매장을 드나들 수 있는 시대가 됐고요. 실용적이지도 않고 편하게 입을 수도 없지만, 고급스럽고 로맨틱한 란제리를 보면 누구나 달콤한 꿈을 꾸게 됩니다. 여자들이 환상적인 패션 화보에 열광하는 이유와 비슷하죠!” 라 펠라 홍보 담당자의 말처럼, 여자들에게 란제리는 기능과 실용성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이다. 로맨틱한 꿈, 달콤한 사랑, 환상적인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아주 특별한 존재 말이다.

    에디터
    패션 에디터 / 김미진
    포토그래퍼
    KANG TAE 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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