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정선과 유돈

2016.03.17

by VOGUE

    정선과 유돈

    패션 발원지로서 다시 르네상스를 맞기 직전에 있는 런던 패션 위크. 안나 윈투어의 고향이자, 피비 파일로가 학업을 마쳤고, 톰 포드가 패션쇼를 여는 이 도시에서 두 명의 한국 디자이너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치고 있다. <보그>가 이정선과 최유돈을 런던 작업실에서 만났다.

    2000년대 중반, 뉴욕에서 벤자민 조, 두리 정, 리차드 채 등 우리에게 익숙한 패밀리 네임을 쓰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한꺼번에 등장해 주목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벤자민과 두리는 종적을 감췄고, 리차드 채만이 명맥을 유지하는 중이다. 뉴욕에서 코리안 파워가 주춤한 대신, 런던에선 두 명의 한국인 디자이너들이 뜨고 있다. 최유돈과 이정선. 특히 최유돈의 의상은 올봄 런던 패션 위크를 매일매일 리뷰하던 미국 ‘스타일닷컴’의 그날 첫 화면에 올랐다. 또 이정선은 작년 10월호 <보그 코리아>에 실린 기사 A‘ ngel Investors’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패션 칼럼니스트 사라 무어가 밀어주는 신인이다.

    최유돈과 이정선이 활약하는 런던 패션 위크는 최근 들어 패션의 정점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슈퍼스타 톰 포드는 스텔라 맥카트니와 빅토리아 베컴에게 런던 패션 위크에 스케줄을 올릴 것을 제안했다. 또 런던 신인들은 뉴욕과 파리가 신인 육성에 살짝 주춤한 사이, 전 세계 기자들과 바이어들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중. 그 가운데 몇몇은 대기업의 투자를 받는 상황이다. 이런 긍정적인 분위기에도 다른 유행의 도시에서는 신인 디자이너들이 뜨기도 전에 사업을 접거나 종적을 감추는 일이 많다. 하지만 최유돈과 이정선은 런던 패션 위크의 견고한 시스템 안에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고 있다. 이렇듯 주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는 두 사람의 런던 작업실을 <보그>가 방문했다.

    애완견 ‘써니’와 함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한 디자이너 이정선. 미국 스타일닷컴은 물론 패션 저널리스트 사라 무어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그녀는 미니멀리즘을 기본으로자신만의 패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J JS LEE

    지난여름, <보그> 패션 칼럼니스트인 사라 무어를 취재하기 위해 들렀던 디자이너 이정선의 스튜디오를 몇 개월 만에 다시 찾았다. 오늘은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 MA 졸업쇼에서 해로즈 어워즈를 수상했고, 런던 패션 위크의 뉴제네레이션 어워즈(탑샵과 영국패션협회 공동 신인 디자이너 후원 프로그램으로 ‘뉴젠’으로 불린다) 4회 수상까지. 그녀는 4회로 수상이 제한된 뉴젠에 이어 2014년 가을 · 겨울 컬렉션을 위해 다음 단계인(후원금과 비즈니스 서포트가 훨씬 막강해진다) 패션 포워드 심사를 마친 뒤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사라와 정선을 촬영했던 작업실 하얀 벽에는 다른 무드보드가 완성돼 있다. 벽을 가득 채운 이미지들은 2월로 예정된 2014년 가을 컬렉션을 위한 것들이다. “패턴(옷본)을 뜨는 작업은 자신 있었지만, 사실 디자인 개발은 백지 같은 느낌이었어요. 다행히 작업할 때 나쁜 습관은 없었는데, 루이즈 교수가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줬죠.” 세인트 마틴 출신의 런던 디자이너들에게 살아 있는 전설이자 패션 대모로 통하는 루이즈 교수가 정선에게 맨 처음 가르쳐준 것은 컬렉션의 디자인 개발 단계. 이 무드보드는 당시 루이즈로부터 배운 방식이다. 한국에서 패턴 메이커로 경력을 쌓고 런던으로 유학 온 정선에게 이 과정은 신선했다. “리서치부터 달랐어요. 한국에서는 리서치를 위해 백화점으로 향하는데, 런던에서는 도서관을 가거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영감을 얻더군요.”

    이제는 그녀는 마음에 꽂히는 ‘뭔가’가 딱 떠오르면, 곧장 세인트 마틴 아카이브로 향한다. 1916년에 발간된 영국 <보그> 창간호부터 거의 모든 패션지들은 물론, 4대 도시에서 열리는 패션쇼도 동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는 패션의 보물 창고! 지금이야 ‘스타일닷컴’으로 캣워크를 모조리 볼 수 있지만, 세인트 마틴 아카이브는 이미 오래전부터 패션쇼 영상을 수집해왔고, 오래된 잡지 냄새를 맡으며 낡은 지면을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정선은 이 아카이브 때문에 런던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수집된 이미지들을 통해 컬렉션의 틀을 잡고 디자인 작업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과정을 이제 매 시즌 반복하고 있지만, 석사 과정 중에는 이런 과정을 1년에 세 번씩이나 한다. 그리고 이 과정 심사를 통과해야 2학년에 올라갈 수 있다(석사 과정은 2년).

    “루이즈가 최종 평가 때 제가 마련한 세 권 중 하나를 좌르륵 넘기더니 일러스트 한 장을 꺼내더군요. 그러더니 어느 투터(외부 강사)에게 마구 욕하며 재키(이곳에서는 ‘재키 제이 에스 리’로 통하는 그녀)에게 이런 일러스트가 있는데, 왜 프로젝트 3과 1에는 없느냐며 다그치는 게 아니겠어요? 얼굴은 사진, 몸은 드로잉으로 완성된 일러스트였어요. 아, 여기 있군요!” 정선은 일러스트 원본이 붙어 있는 스튜디오 입구를 향해 손짓했다. “탑샵이 후원하는 뉴젠 부스에서 봤던 그 엽서 속 일러스트 아닌가요?” 내가 기억을 떠올리며 묻자 “현장에서 일하며 ‘커머셜’한 것에 질렸던 것 같아요. 그때쯤 미니멀리즘에 끌렸는데, 중성적이고 시크한 느낌의 룩을 좋아하게 됐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엽서에서 본 ‘minimalism?’이란 단아한 서체가 일러스트에 그대로 반영돼 있었다.

    그녀의 시그니처 가운데 하나가 된 히든 칼라(옷의 일부가 되어 양각으로 드러나는)는 2학년 프리 컬렉션 때 개발한 것. “중성적인 요소에 끌렸지만, 그렇다고 여자가 남자인 체 하는 건 싫었어요. 세부 묘사와 소재는 아주 여성스럽죠.” 중성적인 느낌의 여성복을 완성하기 위해 히든 칼라를 떠올린 건 1920년 러시아 구성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것. 큐비즘이 유행하기 전, 캔버스에 모래나 나무 등을 붙이는 작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표면 자체가 도드라지는 효과에 도전했다. 군더더기 장식을 최대한 억제한 채, 옷 자체에 디테일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다양한 실험들. 별의별 것들을 다 집어넣은 끝에 결국 저지에 네오프렌을 잘라 틀을 만들어 끼운 뒤 압축기로 눌러 올록볼록한 칼라를 완성했다. 악독하기로 유명한 루이즈의 졸업 작품 심사에서도 ‘안 깨지고’ 통과한 그녀는 졸업 컬렉션으로 해로즈 상을 수상했다(세인트 마틴 MA 쇼에는 두 명의 수상자가 배출된다. 하나는 해로즈 상, 다른 하나는 로레알 상. 해로즈 상을 받은 컬렉션은 백화점 쇼윈도와 매장 판매 기회가 주어진다)!

    “졸업 작품 발표 후 세일즈 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여야 했어요. 회사 등록은 물론, 팩스도 설치하고, 가격을 매기고, 라벨을 달고, 배송 작업까지. 해로즈와 루이즈가 하나하나 잘 이끌어줬기에 가능했어요.” 게다가 운까지 따랐다고 그녀는 덧붙인다. 졸업과 동시에 상표등록을 마친 그녀의 브랜드가 곧바로 뉴젠 상을 수상하며 런던 패션 위크에 전시를 통해 공식 데뷔하게 된 것. 졸업 작품인 2010년 가을 컬렉션은 해로즈 백화점 쇼윈도와 매장에 전시되고 판매됐으며, 2011년 봄 컬렉션은 레이 카와쿠보가 운영하는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 독점 판매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꿈꾸는 시작이었다.

    이렇게 그녀의 컬렉션이 세 시즌을 지나는 동안 패션계에선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런던 패션 위크에 바이어들이 뜸하자, 협회는 ‘런던 쇼룸’을 기획해 디자이너들을 데리고 파리로 떠나 바잉에 나서 성공을 거뒀다. 런던 디자이너들 옷이 전 세계 주요 매장에서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한 때가 이즈음이다. 정선은 첫 시즌부터 런던 쇼룸에 합류했다. 또 도버 스트리트 마켓은 오픈 2년 만에 그 일대(런던의 노른자위로 불리는 옥스퍼드 광장 일대) ‘파워 플레이어’인 편집 매장 브라운즈, 셀프리지 백화점과 여러 면에서 동등한 힘을 갖게 된 데 이어, 도쿄와 미국에도 매장을 열었다. 덕분에 정선의 옷은 현재 도버 스트리트 마켓 세 개 매장에 모두 입점됐다. 사라 무어는 레이 카와쿠보가 런던 쇼룸에서 정선의 컬렉션을 보고 흡족해하던 후일담을 ‘런던 디자이너 성공 사례’로 꼽으며 곳곳에 전하는 중이다. 루이즈 교수와 사라 무어는 정선에 대한 아낌없는 후원과 신임을 공공연하게 자랑한다. “타이밍이 절묘했어요. 한 시즌이 ‘대박’ 나는 것보다는 천천히 성장하길 원합니다. 후진만 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10년 후를 내다보고 있어요.”

    ‘뉴젠’ 어워드 수상자들 가운데 시몬 로샤와는 막역한 사이. 뉴젠 멤버들이 런던 패션 위크에 참여해 맹활약하고 있는 요즘, 런던 패션 위크 기간이 되면 나  같은 영향력 있는 매체들이 이정선의 컬렉션을 비중 있게 보도한다.

    이제 정선은 런던 패션계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시몬 로샤나 J.W. 앤더슨 같은 디자이너들과도 인맥을 쌓게 됐다(시몬은 며칠 전 진행된 영국 패션 어워즈 시상식에서 신인 여성복 디자이너상을, 2012년 수상자 J.W. 앤더슨은 그다음 단계인 신인 브랜드상을 받았다). 세 사람은 같은 시기에 졸업하고 패션계에 데뷔해 꽤 친하다. 여러 정보를 공유하는 등 그야말로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중. “저를 시몬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우리는 워낙 친해서 서로 존중하고 의견도 나누며, 가끔 상대를 ‘까기도’ 하죠. 하하!” 친구를 의식하다 보니 소재 선택의 폭이 좁아진게 불편함의 전부라고 그녀는 덧붙인다. 이번 시즌에 레이스를 좀 사용해볼까 하고 생각하다가도 시몬때문에 생각을 접는가 하면, 시몬 역시 정선을 의식해 저지 소재를 피하는 편이다.

    정선은 런웨이 컬렉션 외에 10대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도 고민 중이다. “10대를 위한 세컨드 라인을 2014년 가을 컬렉션에 추가할 예정이에요.” 물론 이런 일들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서포트’가 절실하다고 덧붙인다. 뉴젠을 통해 받은 후원이 중단된 건 아니다. 사라 무어와 루이즈 교수 등 패션 거물들의 든든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브랜드를 다음 단계로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건 현실적 지원이라는 얘기다.이제 정선에게는 비즈니스 멘토링을 체계적으로 운영할 팀이 필요하다.

    물론 당장은 다음 컬렉션 준비가 시급하다. 10대들을 위한 세컨드 라인 론칭을 결심했으니 두 개의 컬렉션을 한 번에 준비하는 셈. 다음 컬렉션에 대해 살짝 귀띔해달라고 하자 정선이 새로운 무드보드가 완성된 벽을 보며 답했다. “흙탕물 위를 훑고 지나간 타이어 자국! 톤앤톤 자카드 기법으로 옷감에 타이어 자국 느낌을 보여주려고 해요. 정비공 같은 느낌의 이지 웨어도. 물론 모든 것은 미니멀하고 시크하게!”

    최유돈의 런던 작업실은 그의 외모만큼이나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다. 이곳에서 와 덕혜 옹주에게 영감을 얻은 지난가을과 다가올 봄 컬렉션이 탄생했다.

    Eudon Choi

    지난 9월 뉴욕을 시작으로 2014 봄여름 패션 위크가 시작된지 얼마 후, 미국 ‘스타일닷컴’ 메인 페이지에 유돈 최 컬렉션이 올랐다. “저도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두 번째였기에 그저 신났죠!” 디자이너 유돈 최를 만나기 위해 런던 동쪽에 자리한 그의 스튜디오를 찾았다. 유돈은 며칠 전 한국에서 삼성패션디자인펀드를 수상하고 돌아왔다(정욱준 이후 3회 수상자는 처음). 그는 입학이 까다롭고 졸업은 더 힘들다는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의 여성복 MA 과정을 거쳐 ‘올 세인츠’와 ‘트웬티 에잇 트웰브’(시에나와 사바나 밀러 자매가 론칭하던 당시) 수석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했다. 최근에는 입성하기 힘든 런던 패션 위크의 공식 일정에 이름을 올린 엘리트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RCA는 석사 과정 전반에 걸쳐 패션 업계의 다양한 콜라보레이션이나 후원금이 걸린 프로젝트가 많습니다. 패션 비즈니스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인력을 양성하는 게 특징이죠.” 스타 디자이너를 배출하는 루이즈 윌슨 사단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과 늘 비교 대상이 되는 RCA는 옷을 디자인하고 제작해 완성시키는 기술적 측면이 강하다. 한국에서 이미 경력을 쌓고(한섬의 타임 옴므 론칭 멤버) 런던에 온 유돈에게 학교 과정은 유리하게 작용했다. 외부 심사위원 자격으로 투입된 막스마라 디렉터는 그가 디자인한 옷의 완벽한 마무리를 보고 감탄했을 정도다. 여성복 경험이 없던 유돈은 “이 옷을 당신이 만들었나요?”라는 그녀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여성복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어떻게 완성돼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소재, 라인, 디테일, 마무리 등 옷을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데 있어 타협할 수 없는 당신만의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옷에는 디테일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죠”라고 대답했다.

    RCA는 비교적 적은 인원(유돈의 클래스는 여성복만 17여 명으로 구성됐다)을 입학시키기 때문에 한두 명만 탈락할 뿐 모두가 졸업 작품 쇼에 선다. 당시 그는 고민 끝에 거의 모든 한국 유학생이 한 번쯤 시도하는 한복을 소재로 ‘기생이 스튜디오 54에 가다!’란 주제로 졸업 컬렉션을 선보였다. “너무 뻔하지 않고, 조금 다르게 디자인하기로 마음먹은 채 현대적으로 해석했죠.” 기생 옷을 기본으로 70년대 트렌치코트를 두루마기와 조합한 시도는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덕분에 피날레를 장식한 유돈 컬렉션은 바로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 판매가 결정됐다. 매장에 진열을 막 끝내자마자 제이드 재거가 매장에 들어섰다고 그는 당시 일화를 들려준다. “그녀는 ‘착착 착착’ 옷을 훑어보더니 두 벌을 즉석에서 구입해갔어요!”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유돈은 비앙카 재거, 할스톤, 이브 생로랑, 앤디 워홀이 파티를 열던 시절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룩이라고 부연 설명을 곁들였다. “당신 엄마가 제 뮤즈예요!”란 말도 덧붙였다.

    제이드는 나중에 자신의 브랜드를 위해 일해보지 않겠느냐며 유돈에게 스카우트를 제의해왔다. 하지만 유돈에게는 이미 내정된 자리가 있어 거절했다. 1년 전에 제안된 자리는 스트리트 감성은 풍부하지만 재단이 약하다며 이 부분을 보완해달라던 하이 스트리트 브랜드 ‘올 세인츠’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 ‘아름다운 옷을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하이패션을 탐닉하던 유돈에겐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보그 코리아> 기사 중, 당시 클로에 수석 디자이너이던 스텔라 맥카트니와 그녀의 오른팔 피비 파일로에 대한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영국만의 하이 스트리트 감성을 클로에 하우스에 주입시킨 피비 이야기에 끌려 무작정 올 세인츠행을 결심했죠.” ‘하이 스트리트 감성은 잘 모르는데?’라며 수락한 올 세인츠 수석 디자이너 일에서 유돈은 컬렉션을 운영하고 팀을 이끄는 조직적 노하우에 대해 배웠다.

    자기 이름을 건 컬렉션에 대한 꿈은 ‘트웬티 에잇 트웰브’의 런던 패션 위크 데뷔쇼에서 경험한 충격에서 비롯됐다. 예정에 없던 브랜드 론칭 쇼는 그 시즌 인기 절정으로 화제 만발. 컬렉션의 절반 이상을 유돈이 완성했고, 프란체스카 번스(<i-D>와 <LOVE> 매거진을 거쳐 현재는 영국 <보그> 패션 에디터)가 스타일링하고, 칼리 클로스, 조단 던 등 꿈의 모델들이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 캣워크에 오르는 모습에서 그는 ‘쇼 맛’을 알게 됐다. “아름다운 옷을 만들고 싶다는 갈망으로 제 이름을 건 작은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떤 전략이나 계획도 없었다. 그저 열정을 따라 움직였을 뿐인데, 시작 단계에서 세일즈를 함께하는 PR이 합류했다(전에 함께 일했던 매니저). 얼렁뚱땅 시작한 컬렉션은 곧바로 여섯 개 매장에 팔렸고, 유돈의 이름은 패션 에디터들과 블로거들 사이에 심심찮게 등장하며 서서히 팬덤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비공식 일정으로 시작한 소규모 컬렉션을 완성하며 ‘내가 런던 패션 위크에 서고 있다니!’라며 감격한 것도 잠시. 안타깝게도 뉴젠 어워드에 지원했지만 낙방했다는 소식이 전달됐다. “사라 무어가 직접 이메일을 보내왔어요. 최종 10인에 들었지만 아쉽게도 떨어졌다고.” 대신 사라 무어는 실망하지 말라며 그에게 새로 기획된 ‘엘르 론칭 패드’에 지원하길 권했다. 여기서 합격한 유돈은 영국판 <엘르> 서포트를 받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런던 패션 위크 공식 일정에 이름을 올린 일은 좀 특별하다. 뉴젠 어워드에서 떨어져 낙심하려는 찰나, 영국패션협회가 “공식 일정으로 쇼를 발표하겠느냐? 후원을 받겠느냐?”라는 난제를 그에게 던졌다. 뉴젠 수상자라고 해서 모두 공식 스케줄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마침 ‘삼수’ 끝에 삼성패션디자인펀드 수상자가 된 첫 시즌이기도 해서 그는 과감하게 ‘온 스케줄 쇼’를 선택했다.

    패션 위크를 실시간 타전하는 미국 스타일닷컴의 메인 화면에 두 차례나 올라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최유돈. 삼성에서 전도유망한 한국인 디자이너들을 후원하기 위해 마련한 SFDF를 3회 연속 수상한 실력파다.

    런던 패션 위크 공식 일정 속 첫 번째 유돈 최 프레젠테이션 쇼(2012년 가을 컬렉션)는 영국인 남극 탐험가이자 영웅인 스콧 선장에서 영감을 얻었다. 또 평소 친분이 있던 와핑 프로젝트(런던 동쪽 외곽에 자리한 수력발전소를 개조해서 만든 전시관) 디렉터인 줄스 라이트의 도움으로 서머셋 하우스의 포티코 룸(공식 프레젠테이션 장소)에 남극 탐험 현장을 완성했다. “우리는 어떤 ‘무드’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포티코 룸에 서 열리는 쇼는 자칫 고루하고 재미없을 수 있다는 조언에 귀 기울여 시어터 디렉터 출신인 줄스의 도움을 받은 게 적중했어요.” 무대의 흰색 배경에는 줄스 팀에 소속된 비디오 아티스트가 촬영한 남극 영상이 상영됐고, 흰색 옷을 입은 모델들은 스콧 선장 탐험대의 기념 촬영 장면을 피날레로 연출해 박수 세례를 받았다(마침 그해는 스콧 선장이 남극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은 지 100주년이 된 해). 두 번째 2013년 봄 컬렉션은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주제였고, 러시아 민속 밴드의 연주 속에 민속 의상의 현대적 해석을 선보인 2013년 가을 컬렉션은 ‘닥터 지바고’ , 2014년 봄 컬렉션은 ‘덕혜 옹주’를 테마로 했다. “안나 윈투어와 프랑카 소짜니가 주최한 ‘보그 탤런트’ 행사에 초대받아 제 컬렉션을 들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제 컬렉션을 보더니, 어딘지 한복 요소가 느껴진다고 그러더군요. 사실 흰색 깃을 더한 코트에는 두루마기, 빨간색 통바지 같은 경우 다홍치마 느낌이 풍기긴 했죠.” ‘덕혜 옹주’ 컬렉션은 한복보다 그녀의 스토리에 포커스를 뒀다. “비운의 마지막 옹주 이야기가 이상하게 끌렸어요.” 굳이 한국적 소재를 쓰려고 작심하지 않아도 그에겐 한국인의 정서가 뼛속 깊이 스며 있다. 그것이 디자인이나 시각적 스토리텔링으로 표출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돈은 케어링 그룹의 후원을 받아 다음 단계에 돌입한 크리스토퍼 케인의 사례야말로 ‘영국패션협회가 맺은 역사적인 결실’로 표현한다. 유돈에게도 런던은 가장 고마운 패션 인큐베이터다. 그 과정에서 디자이너들끼리의 경쟁은 기본. 그에게 런던에서의 서바이벌 팁은 뭘까? “그저 자신을 믿고 자기 것을 밀고 나가는 거죠.” 그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디자인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웨어러블’입니다. 물론 젊은 디자이너로서 ‘크리에이티브’를 보여줘야 하죠. 두 가지를 겸비하고 싶지만 중요한 건 ‘밸런스’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입을 수 있는 동시에 재미있는 옷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중이다.

    유돈의 다음 단계는 리조트 컬렉션 론칭이다. “2014년 가을 컬렉션 후 곧바로 선보일 겁니다. 까딱하다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살벌한 비즈니스 세계가 바로 패션 업계입니다. 지금까지 잘 이끌어왔지만, 다음 단계로 현명하게 잘 넘어가는 게 관건이죠.” 그에겐 인터뷰 며칠 뒤에 열릴 영국 패션 어워즈 참석과 12월에 있을 와핑 프로젝트의 마지막 파티(이제 문을 닫는다!) 등등 런던 패션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런던의 숨겨진 비밀이라고 자랑하는 그의 집(런던 남동쪽에 자리한 헌힐) 앞 공원(어느 저택 소유의 공원이 화재로 런던 시에 넘어가 공영화된 곳)으로 향할 예정이다. “산책 후엔 요즘 푹 빠진 버거와 로즈메리 솔티드 감자튀김을 먹기 위해 근처 브릭스턴 마켓에 갈지도 모르죠!”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신광호
      스탭
      취재 / 여인해(패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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