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패션계의 셀카 열풍

2016.03.17

by VOGUE

    패션계의 셀카 열풍

    다들 지독한 나르시시즘에 빠진 걸까. 파파라치들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더니, 이젠 직접 은밀한 모습을 찍어 만천하에 공개하는 이유? 패션계에 불어닥친 ‘셀카’ 열풍에 대해.

    지난해 가장 화제가 된 단어는? 지난 연말, 옥스퍼드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셀피(selfie)’를 선정했다. 옥스퍼드 온라인 사전에 셀피라는 단어가 정식으로 등록된 지 3개월 만이다(오프라인 사전엔 아직 오르지 못했다). 2013년 온라인상에서 셀피라는 단어가 사용된 횟수는 2012년에 비해 무려 1만7,000%나 증가했다. 대체 셀피가 뭐길래? 위키피디아는 셀피를 “디지털카메라 · 카메라 폰으로 본인의 모습을 직접 찍은 사진”이라고 정의한다. 우리에게 좀더 익숙한 말은 바로 ‘셀카’. 셀피라는 표현을 처음 공개적으로 사용한 것은 호주의 어느 젊은 남자다. 2002년 넘어지는 바람에 다친 입술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흐릿한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며 이런 글을 남겼다. “초점이 맞지 않아서 미안! ‘셀피’거든.” 물론 장난스럽게 쓴 이 단어가 10년 후 이토록 큰 파장을 불러올 거라곤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셀피가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건 비교적 최근이다. 페이스북, 플리커, 인스타그램 같은 SNS의 등장, 그리고 전면 카메라가 달린 스마트폰 출시가 맞물리며 셀피 시대가 열린 것이다(한국에는 추억의 하두리, 다모임, 싸이월드 시절이 있었다!). 지난해 8월, 옥스퍼드 사전은 셀피를 공식적으로 등록하면서 “스마트폰 · 웹카메라로 본인의 모습을 직접 찍어 SNS에 올린 사진”이라고 그 뜻을 설명했다. 다시 말해, 직접 찍는 것뿐 아니라 ‘SNS에 올리는’ 행위도 포함된다.

    셀피가 떠들썩하게 활약하는 곳은 역시 보이는 것이 전부인 패션계다. ‘쌩얼’로 침대에 누워 있는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아들과 함께 화사하게 미소를 짓는 아리조나 뮤즈, 고향 바베이도스에서 카라 델레바인과 연말 휴가를 보내는 리한나, 백스테이지에서 장난치는 코코 로샤, 금발을 유지하기 위해 염색 중인 수주, 파티장에서 살짝 취기가 오른 리카르도 티시와 나오미 캠벨, 화보 촬영을 앞두고 헝클어진 머리로 대기 중인 빅토리아 베컴, 밀라노의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는 김원중 등등. 패션쇼 마지막에 수줍게 인사하고 황급히 모습을 감추던 디자이너들, 화보에서 완벽하게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던 모델들, 잡지 지면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하던 패션 에디터들이 10대 소녀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거울 셀카’ ‘침대 셀카’에 심취해 있는 상황이란(다행인지 아직 ‘눈물 셀카’를 시도한 사람은 못 봤다)! 그중 몇몇은 과감한 ‘노출 연기’까지 거리낌 없이 보여줄 정도(프랑스판 <베니티 페어>의 패션 팀장 버지니 무자는 카트린 드뇌브의 전성기 시절을 연상시키는 우아한 외모와 달리 언젠가 거울 앞에서 전라로 서 있던 자신의 셀카를 올린 적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i-D>는 최근 셀피를 찍고 있는 모델 조단 던의 모습을 표지에 실어 이런 세태를 풍자하기도 했다. 120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거느린 제임스 프랑코는 <뉴욕타임스>에 ‘셀피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에세이를 기고하기도 했다. 그 내용은? 셀피가 올라오지 않는 인스타그램 계정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 또 SNS와 전혀 동떨어진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안나 윈투어조차 미국 <보그> 인스타그램에 작년 9월호 <보그> 표지로 얼굴을 가린 채 등장했다(직접 찍은 것이 아니기에 엄밀히 말하면 셀피가 아니지만). ‘셉템버 이슈’를 홍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9월호 <보그>와 함께 찍은 셀피를 공유해달라는 이벤트였는데, 수많은 독자들은 물론 오스카 드 라 렌타, 프란시스코 코스타, 캐롤리나 헤레라, 나르시소 로드리게즈, 피터 솜 등 뉴욕 디자이너들이 신나게 참여했다.

    대관절 패피들이 셀피에 이토록 빠져든 이유는 뭘까? 셀피가 지닌 두 가지 치명적인 매력 때문이다. 첫 번째는 그야말로 ‘날것’이라는 사실. 한동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심히 스타일링한 모습을 예쁜 배경 앞에서 찍은 후, 각각의 아이템에 관해 소개하는 형식의 블로그들이 인기를 끌었다. 셀피는 이것과 정반대 느낌이다. 준비된 모습이 아니라, 낮과 밤, 머리를 다듬기 전, 메이크업을 지운 후, 아침에 눈뜨자마자 등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다는 것. 셀피를 찍거나 보는 사람은 대단한 작품성을 기대하지 않는다. 늘 완벽히 포장된 모습으로 평가받는 패션 피플들에게 셀피는 살짝 모자란 모습을 보여줘도 되는, 다시 말해 숨통을 트는 창구가 된다. 패션지 인터뷰를 앞두고 어느 사진가를 섭외할 것인지 까다롭게 묻고 또 묻는 예민한 디자이너들조차 셀피를 찍을 때만큼은 한없이 여유로워지는 이유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사진을 직접 자신의 SNS에 올린다는 사실! 멋진 모습이든 망가진 모습이든, 이를 공개적으로 SNS에 올리는 건 그 내면에 “나는 내가 이 사진에서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당신들도 이에 동의해주길 바란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결국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 철저히 편집해서 보여준다는 얘기다. 무방비 상태로 파파라치에게 찍히는 사진과의 근본적인 차이점! 한마디로 셀피에는 다른 사람에 의해 못난 모습을 포착당하긴 싫지만, ‘사람 냄새’ 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는 싶은 패션 피플들의 심리가 담겨 있다. 그 효과는 대단하다! 다른 사람(게다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유명 인사)의 사생활을 엿보고 싶은 평범한 사람들의 관음적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때문. 카라 델레바인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셀피를 인스타그램에 올리지 않았다면, 현재의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모델로서 카라가 아주 귀엽고 예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팬들은 슈퍼모델의 망가지는 모습에서 친근함을 느끼고 열광하는 것이다(사실 패션계의 거의 모든 현상은 한 꺼풀 벗기고 보면 고도의 마케팅 키워드로 설명된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인물 사진도 셀피였고(1839년 로버트 코넬료가 자신의 앞마당에서 찍은 것),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가 남긴 사진 중 사람들이 기억하는 모습도 열세 살 무렵 찍은 ‘거울 셀카’다. 혹시 인간의 본성 속엔 셀피를 찍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는건 아닐까? 분명한 건, 패피들이 셀피에 빠져든 후 패션계는 훨씬 더 흥미롭고 볼거리 넘치는 곳이 됐다는 것! 지금은 셀피 세상이다.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임승은
    기타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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